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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봉 이계진의 산촌일기 레트로_7]어머니 그리고 누님, 끝없는 이야기

2020-01-07 14:40

글 : 이상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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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선호 사상은 이제 아주 옛날 이야기가 된 듯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그랬다. 아버지와 남자형제와 한 밥상을 두고 마주할 수 없던 딸들이 있었다. 귀한 흰쌀밥이 가장의 입으로 들어가고 아들의 숟가락엔 얹어져도 딸은 꽁보리밥에 숭늉이나 들이켜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야속한 아버지 슬하와 정내미 떨어지는 차별사회 속에서도 억지로 살아내는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한 이야기는, 그래서 길고 깊고 슬프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그런 아들들 중 한 사람으로 자라야 했던 관봉은 마치 자신의 잘못인 양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야기도, 눈물도, 하자고 들면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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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이 피는 계절, 6월. 화계산 농부 중에 ‘청사’라는 별호를 가진 이는 우리 가곡 〈또 한 송이 나의 모란〉을 기가 막히게 잘 불러서 인기가 대단한데, 올해도 모란이 피거든 술 한 잔 권하고 또 한 번 그 노래를 들어봐야 하겠다.
 
봄 한철, 꽃들은 우리의 진한 사랑을 받고는 어느새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그러나 그 꽃자리마다 새 생명을 잉태한 채 초록의 세상에서 치열한 결실의 꿈을 꾸고 있다. 우리 집 넓은 밭에도 봄에 심은 각종 푸성귀들이 시샘하듯 자라고 있다. 올봄에도 감자를 시작으로 상추, 쑥갓, 가지, 토마토, 오이, 고구마를 먹을 만큼 심었다. 4월에 심은 감자 싹이 잘 올라왔다. 퇴비를 넉넉히 넣고 심었더니 감자 대궁이 실 팍하다. 하지가 지나고 6월 하순쯤이면 ‘햇감자’를 먹을 수 있다.
 
사시사철 감자를 사먹을 수 있는 대형 마트의 분위기에 익숙한 터에 ‘햇감자’가 기다려질 일이 어디 있을까만, 배고픈 ‘6.25의 기억’이 있는 우리 세대들에겐 ‘잊혀진 명절’을 혼자서 기 억하듯 햇감자(하지감자)를 먹을 날이 기다려진다. 6월은 또 밭두렁이나 길이나 언덕이나 할 것 없이 온갖 잡초가 맹렬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달이다. 지금부터 가을까지는 그 풀들과 일전을 해야 하는데, 전원에 사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승산 없는 풀과의 전쟁’이라고 한다. 정말 여름 한철, 시골 생활의 8할은 김매기와 풀 깎기 그리고 예초기 메고 엔진 소음 듣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과욕 부리지 않고 일 삼아, 운동 삼아 풀을 깎아도 집 주변과 밭이 멀끔한데, 때로는 지칠 정도로 과하게 일을 해서 되레 건강을 해칠 때가 있다. 아마추어 귀농자가 하는 짓이 대개 그렇다. 풀 깎기든 농사일이든 마음을 비우고 쉬엄쉬엄 하는 ‘취미농사’는 건강에 정말 좋다.

방송일로 서울로 향하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청취자의 편지 사연을 듣고 나는 무릎을 쳤다.
전라도 어느 시골마을에서 온 편지였다. 시한부 인생의 구구절절 슬픈 사연을 솜씨 있게  써내려간 긴 편지였는데, 간단히 줄이면 ‘병원에서 더 이상 호전되기 어려우니 어디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편안하게 지내보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고 울며불며 고향에 내려와 꽃이나 심고 가꾸며 힘든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그것이 벌써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의 일이며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라는 편지였다. 그리고 ‘지금은 건강을 되찾아 조그만 채마전까지 가꾸고 있다’고 덧붙였다. 생을 마무리하며, 무욕과 무념의 마음으로 지속했을 가벼운 노동(?)이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한 것이 아닐까? 그 이야기의 실증은 우리 노모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십수 년의 일기를 다시 펴보면 유독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음을 알게 된다. 이제 우리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 짧게라도 우리 어머니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면, 앞으로 이 글에 ‘자주’ 등장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그냥 흔한 ‘자식의 수다’나 ‘사모곡’ 정도로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75년 전, 우리 어머니가 산 넘고 강 건너 가마 타고 시집오실 때 우리 아버지는 원주에서 강릉으로 유학하신 강릉농업학교 학생이셨다. 어머니의 친정과는 빈부의 차가 컸고 배움의 차 또한 많았으나 경주 김씨 양반이고, 서당을 하셨던 외할아버지의 학문을 높이 사서 며느리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반’이고 ‘절반’이고 간에(이런 표현은 어머니로부터 배웠다), 모두 그 옛날의 부질없는 이야기일 뿐. 아버지에게는 퍽 죄송한 말씀이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어머니가 훨씬 많으셨고, 머리도 어머니가 더 좋으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학교에 가시기가 소원이었지만 외할아버지의 완고함으로 학교에 가는 대신 집에서  ‘언문’을 깨쳤고 그 실력으로 많은 독서를 하셨다. 우리 고전, 《이솝이야기》, 전래동화, 춘원의 소설, 번안소설, 굴러다니는 신문 쪼가리, 손에 잡히는 잡지, 심지어 노년에는 손자들이 읽는 서양 동화책까지 읽으셨다. 어머니는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 당신이 읽거나 들어서 알고 계신 이야기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려주셨다. 내가 문학을 하고 아나운서가 된 것도 아마 그런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고요한 한밤중에 어머니는 두런두런 춘원 이광수의 〈흙〉에 대해 이야기하시다가 ‘나는 허숭이 같은 사람이 좋더라’ 하고 말씀하시며 쓸쓸히 웃으시는 걸 보고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씀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청춘을 다 보내고, 지금은 흰머리 날리는 노인이지만 나의 아버지-남편의 따뜻한 사랑을 못 받은 여자의 마음을 피력하셨음이었다. 
부부의 정이라야, 고작 노년에 함께 살면서 무덤덤하게 보내신 세월이 전부이다. 오히려 아버지가 강릉 유학시절에 가정교사 집 딸을 좋아하셨다고 알고 계신 어머니는 그 일로 서러워하다가, 할머니로부터 친정으로 내몰릴 뻔했던 아픈 기억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사셨다. 얼굴도 모르는 ‘강릉 처자’에 대한 원망과 함께, 가슴 조이던 그 시절 그 이야기를 가끔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부덕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신 분이다.
 
‘그 어머니’가 화계산 산골에 이사 오신 때는 당신의 작은 ‘원수’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직후였고, 어머니 당신은 중풍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며 얼마 더 못 사실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기한 일은 산골생활이 시작되고 나서 어머니의 건강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건강이 호전된 것은 맑은 공기와 물 덕분도 있겠지만, 여러 해 동안 ‘서울살이’를 하면서 놓았던 ‘노동’을 다시 시작하신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애비는 돈 주고~ 돌 샀다~
 
산골에 이사와서 내가 어머니를 위해 맨 먼저 한 일은 호미를 쥐어드리고 밭을 매거나 마당의 풀을 뽑게 해드린 것이다. 남들이 보면 늙으신 어머니 부려먹는다고 하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자꾸 몸이 불어나시는 어머니에게는 근력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 무렵, 가벼운 중풍 후유증에 귀까지 많이 어두우셔서 고래고래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해야 했다.   
 
“어머니, 애비 서울 갔다 올 테니 놀면서 밭 매세요!”
“그래…….”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내 솜씨로 닭장을 만들어서 닭을 몇 마리 기르기로 하고, 그 책임을 어머니 몫으로 맡겨드린 것이다. 막 집을 짓고 난 후라서 각목이나 판자, 못 따위 등 버려진 자재가 많아 닭장을 ‘호화롭게’ 지을 수 있었다. (동네 이장님이 닭장을 보고는, 이런 호화로운 닭장은 처음이라며 ‘훌륭하다’고 했다.) 어머니의 김매기, 풀 뽑기, 닭치기가 실로 20년 만에 다시 시작된 것이다. 평생 넓은 농토가 그리우셨던 어머니는 아들이 준비한 너른 땅에서 일하는 게 즐거우신 모양이었다. 근력이야 예전 같지 않지만 어머니의 끈기는 대단했다. 밭에 물주전자 하나 갖다 놓고, 꼬부리고 앉은 채 풀을 뽑는 모습은 마치 움직이는 달팽이 같았다.
 
우리가 산 땅은 위치와 모양새는 좋았으나 농토로서는 적절치 않았다. 그런 점을 살필 줄 몰랐던 것이다. 경사가 꽤 졌고, 토질과 흙살이 좋지 않은 ‘돌투성이’ 땅이었다. 땅을 사게 됐다는 사실만으로 흥분한(?) 나머지 그냥 무턱대고 옛날에 화전이던 산골 묵정밭을 샀으니 그럴 수밖에. 여러 날 중장비를 불러들여 정지작업을 하고, 한 트럭에 2만~3만 원씩 주고 흙을 사다가 수백 차, 정말로 수백 트럭분의 흙을 밭에 부어댔지만 경사면만 조금 개선되었을 뿐 별 성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밭을 매며 삼태기에 돌을 주워 담아 수도 없이 내다버렸다. 그렇게 일을 하시다가 아들이 눈에 띄면 타령하시듯이 ‘애비는~~ 돈 주고~~ 돌 샀다~~’고 중얼거리셨다. 땅을 산 아들에 대한 대견함과, 새로 마련한 밭에서 일하시는 즐거움과, 돌투성이 밭을 산 데 대한 걱정이 뒤섞인 당신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셨다.
 
어머니의 노동은 오래 살기 위한 ‘운동’도, 바쁜 아들을 도와야 한다는 ‘모정’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가난한 시절, ‘땅’을 많이 갖고 싶었던 한 맺힌 옛 생각과, 그 땅에서 나올 ‘산물’에 대한 기대,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이 땅에 농사를 지으면 들깨가 몇 섬일 테고, 콩이 몇 말, 감자가 몇 가마…… 그러면 아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배부른 세상이 됐고, ‘6.25’가 언제 일어난 전쟁인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이 많은 세 상이 됐지만, 어머니에게 6.25는 잊을 수 없는 세월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자주자주 전쟁 전후의 이야기를 푸념처럼 들려주셨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 의 ‘6.25 고생담’ 레퍼토리를 거의 좔좔 욀 정도다. 휴전 무렵, 피난길을 되짚으며 잿더미가 된 고향에 돌아와서 어머니가 느끼신 가장 큰 공포는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식구에게 더 먹이느냐, 덜 먹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먹이느냐, 굶기느냐’의 문제였다.

누님은 그 밥이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어느 날 밤 어머니의 6.25 이야기가 또 시작됐다. 하지만 늘 들어 알고 있던 레퍼토리가 아니라 처음 듣는, 생소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에 나는 충격을 느꼈고, 그날 밤엔  정말 너무나 슬퍼서 한잠도 못 잤다. 봄바람이 아직도 차갑던 2000년 2월 어느 날 밤에 쓴 일기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으로 하여 지금 펴봐도 슬프다. 저녁 밥상을 물리고 차를 달이고 있는데, 잠자리에 드셨던 어머니가 뒤뚱뒤뚱 거실로 나오셨다. 사방은 고요하고 벽난로만 자작거린다.
 
“춥긴 왜 이렇게 추운지…….”
 
어머니 방이 추운가? 얼른 보일러를 점검하고 밸브를 살펴보고 공기도 빼보고 어머니 방의  바닥을 만져봤다. 따끈했다. 별 이상이 없었다. 어머니는 혼자 주무시기가 싫어서 거실로 건너오며 핑계를 대신 거다.
과자 그릇을 밀어드리며 잡수시라고 권했다.
 
“지금은 참 먹을 것도 많다……. 예전 6.25 때는, 피난 갔다 돌아와 보니 집은 다 탔 지 먹을 건 없지…….”
 
열 번도 더 들어서 이미 다 아는 얘기……, 어머니는 순식간에 세월을 50년 전으로 돌리고 또 ‘끝없는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러나 나는 처음 듣는 어떤 대목에서 더는 차를 마실 수가 없었다.
큰 산에 가서 산나물을 뜯어 오던 길에, 먼 친척 할머니께서 밥 먹고 가라고 다정하게 불러, 밥 한 사발 주셨다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고모 할머니 댁에 쌀을 얻으러 갔더니 흰떡을 싸서 ‘계진이’ 갖다 주라며 찔러주셨다는 이야기도, 끼니가 부족해서 정들었던 검둥이를 넘겨주고 그 돈으로 쌀을 사셨다는 대목도, 입 하나 덜려고 외가에 보냈던 둘째누님이 볼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서 왔더라 하시며 우시던 그런 얘기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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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듣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은 ‘세상 떠나신’ 내 바로 위 누님에 대한 그 시절 이야기였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보국대로 끌려갔던 아버지는 서른다섯에 반 병객이 돼 집으로 돌아오셨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아버지는 면사무소에 출근을 하게 되었는데, 쌀 몇 줌 있는 것으로 밥을 지으면, 아침 먹고 남은 밥 한 사발은 ‘가장’이신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위했던 내 차지였다고 한다.
 
‘당연히’ 어머니와 누님들은 숫제 굶어야만 했다. 그리고 ‘남자’인 두 부자가 사발밥을 나눠 먹을 때마다 아홉 살짜리 단발머리 누님은 밥상머리 한쪽에 입을 꼭 다물고 앉아 밥이 줄어드는 모양을 지켜보곤 했단다. 아버지도 밥그릇을 비우고 남동생인 나도 밥그릇을 비운다. 이윽고 숟가락을 놓을 때가 되면 누님은 밥상을 바라보며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단다. 아홉 살 누님은 무슨 철이 들었는지, ‘나도 밥 달라’는 소리 한번 못하고 그냥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었단다. 무심하신 아버지, 철없는 나……. 누님은 얼마나 그 밥이 먹고 싶었을 것인가.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하시다 목이 메어 말을 못 이으셨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회상하셨다.
 
“내가 그때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지금 그 누님이 이 세상에 없어서 더 그러하시고, 이만하게 잘 먹고 사니 더더욱 누님 생각이 나시는 것이리라.
 
“그게 너무 불쌍했지……, 아홉 살짜리가 무슨…….”
 
나는 목이 막히는 느낌에 차를 마실 수가 없었다.
전쟁의 상처는 잊혀져가고 세월은 흘렀다. 성장한 뒤의 누님은 의젓했고, 끈기가 있었고, 공부도 잘했다. 특히 음악을 좋아했지만 대학을 갈 수 없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취업을 했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도 죽은 누님을 추억하게 한 어머니의 그 끝없는 이야기가 자꾸 떠올라 잠이 오지 않았다.
 
“인정머리 없는 느이 아버지, 그 어린 것이 밥이 먹고 싶다는 걸 몰라? 재개(자기)도 몇 숟갈 먹어야 일하겠지만, 밥 한 사발 앞에 놓고 새끼가 쳐다보는데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 인정머리 없지! 느이 아버지 그런 사람이다. 내 평생 그런 사람하고 살았지…….”
 
돌아가신 아버지께 이런 감정을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 세어보니 그때 내 나이 일곱 살이었다. 어머니가 언제나 진지를 맛있게 잡수시고 악식을 탓하지 않으시는 것을, 그냥 식욕이 좋으신 걸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기억으로 가슴이 아프셨던 어머니에게 ‘맛이 있고 없는’ 음식이 이 세상에 어디 있었을까……. 어머니는 진지 잡수실 때 밥알을 흘리지 않는다. 수저로 밥을 뜨실 때 보면 혹시라도 밥알이 상에 떨어질까 봐 조심조심하시는 모습이 역력하다. 얼마나 귀한 밥인데……. 어머니에게 밥은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뼈에 사무친 신앙일 것이다.
 
2007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글로 적어 조문객 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글의 한 부분은 이렇다.
 
“우리 어머니는 다음 생에 또 태어나시면 ‘인간’으로는 너무 고통스럽고 ‘자유로운 새’가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늘 같은 우리 어머니가 마지막 떠나시는 길에 바쁘신 데도 찾아주신 여러분의 조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배고픔의 슬픔을 아시는 어머니는 ‘밥’을 종교와도 같이 생각하셨습니다. 아마 오늘도 살아계시면 ‘아, 밥 먹고 가세요!’ 하셨을 겁니다. 바쁘시더라도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시며 밥 한 술에 음복으로 술 한 잔 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꿈!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에 대한 추억만 남은 화계산 산골짝은 마치 텅 빈 것 같았다. 아들에겐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며느리에게는 녹록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시집살이를 꽤 하고 마음고생도 했던 아내는 누가 봐도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큰 짐을 덜었을 터인데, 웬일인지 늘 슬픔에 잠겼고 너무나 허전한 마음에 한동안 우울증세를 보이며 몸이 아파 자리에 눕곤 했다.
 
아내는 그 마음이 스스로 너무나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날마다 기도했다. (며느리로서의 처지를 생각해서 이제야 말하지만 아내는 어머니 생전에 ‘효령대군 후손 문중’에서 내리는 큰 효부상을 받았지만, 수상 사실을 일가친척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내는 이런 이야기도 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사후세계가 궁금했다. 정말 어머니의 소원대로 새가 되셨을까? 아니면 우주공간 어느 별에서 인간 환생을 하셨을까?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잠깐 어머니를 뵈었다. 꿈속의 어머니는 저세상에서도 일을 하고 계셨다. 다만 생전의 모습과 다른 것은 작은 밭뙈기에 엎드려 울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주 드넓은 가을 벌판에 누렇게 익은 곡식이 넘실대는 그 한가운데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생시처럼 수건을 두르고 행복한 모습으로 일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잠에서 깨었다.
 
아마도 드넓은 땅을 갖고 싶으셨을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소원’이 그대로 꿈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만약 그날의 꿈속에서 어머니가 살아생전처럼 힘들게 사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면…… 나는 슬펐을 것이다.  
 
꿈속의 어머니는 저세상에서도 일을 하고 계셨다. 다만 생전의 모습 과 다른 것은 작은 밭뙈기에 엎드려 울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아주 드넓은 가을 벌판에 누렇게 익은 곡식이 넘실대는 그 한가운데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에는 생시처럼 수건을 두르고 행복한 모습으로 일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잠에서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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