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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봉 이계진의 산촌일기 레트로_5]그리운 아버지, 그때는 다 몰랐던 것들

2019-12-17 11:55

글 : 이상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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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울컥해진다. 생전에 다 나누지 못한 애틋한 정이 아쉽고 그저 못해드린 일만 생각나 죄스럽다. 시골행과 농사가 시작되기 전, 관봉은 연로해 병져누웠던 아버지를 여의었다. 오직 자식 걱정하는 마음에 극구 반대하던 귀농이었지만 세상과의 이별에 목전에 둔 아버지는 "나도 그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눈물을 적셨다. 머리 희끗해지기 시작한 아들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팠다. 살림이 궁해 대학 학비는 물론이고 교복 살 돈도 없었지만 아들에겐 끝내 꿋꿋해 보이려 하셨던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들 본 기쁨에 갓난아이가 먹지도 못할 과자봉지부터 챙겨놓았었다는 아버지가 다시 어른거려 눈물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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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에 선종하신 이경재 신부님은 음성 나환자들의 친구였다. 음성 나환자, 지금은 그들을 ‘한센인’이라 부르고 격의 없이 대하지만 한때 천형을 받은 듯 격리된 곳에서 일생을 보내야 했다. 그곳은 남해의 작은 섬 ‘소록도’였다. 화계산 산골에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지을 꿈에 들떠 있던 1996년 5월 10일, 나는 SBS 특집 음악회 ‘소록도의 봄’ 사회를 위해 그곳에 갔다.
그날의 일기를 살폈다.

한센병과 사회의 편견으로 같은 아픔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 소록도! 가족 을 떠나 생이별을 한 채 57년을 살았다는 한 할머니의 옛날 사진은 나를 눈물짓게 했다. 그들에게는 무슨 말로 위로를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봄이 찾아온 소록도에서 환우들과 함께한 음악회의 사회자로서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특히 음악회 도중에 이루어진 통곡과 눈물의 모자 상봉은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었다. 상봉을 끝낸 뒤에 이어진 아들과의 인터뷰에서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튀는 침이 내 얼굴을 마구 적셨지만, 낮에 만난 천사 같은 상주 의사와 간호사들을 본 잔잔한 감동으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었다.
음악이 끝날 때마다 치는 그들의 박수 소리는 어설프기만 했다. 그들의 손은 이미 박수를 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눈물겨웠다.
 
그날의 일기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지금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 불행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특집방송 소록도의 봄’은 그해 방송의 날에 TV특별 프로그램 최우수상을 받았다.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으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 어느 날 밤에 읽은, 곽인행의 《이경재 신부님》 중에서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이 되면 그 기억과 함께, 이제는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 어머니 가 그립고 뵙고 싶다. 갓난 손자 녀석도 보여드리고 싶다. - 아버지 어머니, 제가 벌써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내가 집짓기를 하던 1996년 무렵, 일흔아홉이었던 우리 아버지는 쇠약하신 몸으 로 거의 병석에 계셨고, 여든 둘인 어머니는 중풍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셨다.
일곱 남매를 두신 아버지에게 나는 넷째이면서 맏아들이다. 아들을 귀히 여기던 시대의 아버지는 아들을 보신 기쁨이 크셨던 것 같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내가 태어나자마자 과자를 사두시고는 어머니에게 이르시기를 ‘잘 두었다가 얘 크거든 주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때가 광복 직후, 열일곱 살 나이에 일찍 혼인해서 딸을 셋이나 두신, 그때 겨우 스물아홉  되신 젊은 아버지가 보이신 첫아들에 대한 깊은 사랑이셨다. (아버지는 스물아홉에 벌써 4남매를 두셨지만 나는 서른이 돼서야 혼 인을 했다.)
 
병약하셨던 아버지는 예순이 넘어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20년은 약과 함께 사셨 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매사에 자신이 없으셨고 비관적이셨으며, 맏이 내외가 하는 일에 늘 걱정이 많으셨다. 장성한 아들, 그래도 대한민국의 제법 괜찮게 나가는 아나운서건만 그 아들을 늘 못미더워하셨다. 그것조차 아버지의 사랑이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아들이 잘못 될까 염려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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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울을 벗어나 낯모르는 어떤 산골로 가려는 계획을 말씀드렸을 때도, 아버지는 한걱정을 하셨다. 남들은 모두 서울로 오려고 하는데 서울을 떠나, 무슨 까닭에 산골로 가려고 하느냐는 걱정이셨다. 병상에 누워 계신 당신을 두고 아들이 멀리 떠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으셨던 것 같았다.

회상조차 힘들지만, 사실 그 무렵 아버지는 그저 누워 계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 내외가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었으며 어머니 또한 중풍 후유증으로 힘들어하셨다. 어쨌든 아버지는 아들이 서울을 벗어나려는 데 대해 걱정하셨고 흔쾌히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런 상황에서도 집짓기는 계속됐다.

 
집짓기가 한창이던 무렵의 어느 날, 침대에 누워계신 아버지께 진척 상황을 말씀드리고 어서 나으셔서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사시도록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걱정만 하시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현장 사진이 보고 싶다고 하셨다. 웬일이실까, 이상했지만 며칠 후 아버지의 말씀대로 건축 중인 산골 집 사진을 찍어다 속성으로 뽑아 보여드렸다.

 
“아버지, 아버지가 바깥출입을 잘 못하시니까 방에 앉아서도 바깥경치가 잘 보이도록 설계사한테 동쪽 창문하고 남쪽 창문을 아주 크~게 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가 쓰실 방은 아주 시원시원할 거예요.”

침대에 누워계신 아버지는 누우신 채로 아들의 설명과 함께 사진을 한참 바라보시다가 눈물 젖은 눈을 깜박이며 말씀하셨다.

“이 집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그 모습을 대하며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지만 기침으로 억누르며 말씀드렸다.

“가을에 이사갈 거예요,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 말씀이 있은 얼마 후인 1996년 8월 26일, 나의 아버지는 새집에는 가보지도 못 하고 푸른 별 지구에서의 생을 마감하셨다. 아득한 날에, 스물아홉 살 아버지는 갓난 아들을 위한 과자를 사두었다가 주셨지만, 쉰 살의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집짓기를 끝내드리지 못했다. 가슴 아팠다. 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자상하시지는 않았으나, 한국의 아버지들이 대개 그러하듯 은근한 사랑을 주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 화계산 산골짜기로 들어와서는 어머니만 모시고 살게 됐는데, 여러 해 동안, 특히 돌아가시고 나서 3년간 나의 일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 이야기가 많다. 낯모르는 산골짜기에서의 새 생활을 시작하며 의논드리고 기댈 곳 없는 허전한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잔소리와 걱정이 너무나 많았던 아버지셨는데,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 그런 말씀조차 그리웠던가 보다. 아버지의 자리는 그런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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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23일의 일기를 보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오늘 서울에 갔다. 봄바람이 부는 서울 거리에서 차를 몰았다. 미도파백화점을 지나 안국동 쪽으로 가는 길에서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특히 조흥은행 본점 자리 부근을 지날 때는, 34년 전 대학에 입학했던 그해 봄의 기억이 떠올라 힘 들었다.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 형편과 동생들의 학업을 고려해 맏이인 내게 당시 2년이면 졸업을 할 수 있는 교육대학을 가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서울 유학을 허락해달라고 말씀드리고는, 덜컥 고려대학교에 합격을 했다. 아버지는 난감해하셨고, 첫 등록금과 교복 한 벌밖에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말씀으로 대학 등록을 허락하셨다. 정말로 나는 졸업할 때까지 나머지 일곱 번의 등록금을 해결하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그러나 부모가 되어, 아들이 가는 길을 기뻐하지 못하시는 당신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는 지금에서야 아버지의 슬픈 마음을 안다.
입학식을 앞두고, 서울 지리도 잘 모르는 아버지는 대학에 합격한 아들을 데리고 교복을 맞춰 주시려고 지정 양복점이 늘어선 조흥은행 본점 거리를 찾으셨다. 철철이 옷을 해 입을 형편이 못 되는 나로서는 교복을 권장한 학교의 처사가 오히 려 고마웠으나 교복값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입학금을 포함한 등록금이 2만 5천5백 원인가 했는데, 내 기억에 교복값이 3천~4천 원쯤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제일 헐한 것으로 맞춘다 해도 벅차셨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교복을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돈도 얼마 없으신 아버지는 입을 만한 것으로 맞추라고 하셨다. 부모의 도리를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속도 모르는 양복점 주인은 입학을 축하한다며 내 어깨에 고급스런 옷감 두루마리를 마구  걸쳐 보이며 ‘모직’임을 강조했다. 
‘이거 좋죠?’ 하는 양복점 주인의 질문에 ‘진달래’ 담배를 피워 무신 채 ‘글쎄요’를 연발하시며 헐한 것으로 하자는 소릴 못하시던 아버지! 나는 ‘교복을 해봤자 몇 번 입지도 못할 거’라며 그냥 헐한 것으로 하나 하겠다고 고집하고, 제일 싼 것으로 결정을 해버렸다. 아버지는 그래도 좀 나은 것으로 하자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만지고 계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남들은 기쁨이 넘칠 대학 입학식에, 교복값 때문에 쩔쩔매셨던 그날의 아버지를 생각하니 아들은 가슴이 뻐근하고 눈이 침침해졌다. 빨간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우고, 차창 밖에 보이는 34년 전 옛날의 그 양복점 자리로 보이는 어느 상점을 바라보며 나는 눈을 비볐다. 교육대학에 갈걸.

‘아버지, 아버지를 힘들고 초라해 보이게 해드린 죄, 아들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푸른 신호등으로 바뀌어 차가 다시 움직일 때까지 나는 그런 추억에 잠겼다.

‘아버지, 원망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그때 그 심정을 생각하니 오늘 오히려 아버지가 그립기만 합니다. 아들은 좋아진 세상에 잘살고 있고 어려움 없이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간에 해줄 수 있으니, 가련했던 날의 아버지의 마음이 더욱 안쓰럽게 생각납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 밤, 아들은 아버지가 너무나,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추억의 그 양복점 거리를 지날 때 서울의 하늘은 온통 황사로 덮여 있었다.
 
<6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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