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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봉 이계진의 산촌일기 레트로_4]봄이면 저 언덕 위엔 나물 캐는 아낙네들

2019-12-09 11:26

글 : 이상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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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겨울이 아무리 좋다 한들 이 계절에 들어서면 누구나 따뜻한 봄을 고대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오래 이겨내기엔 적잖은 인내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봉 이계진은 농한기 겨울을 보내며 이미 봄을 맞을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마침내 봄, 주말농사꾼 관봉의 일기장은 더 자주 펼쳐졌고 그의 손은 더 많이 분주해졌다. 2019년 겨울, 그 덕에 10년 전의 겨울과 봄이 그에겐 여전히 생생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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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이나 귀농을 시작한 사람들은 정착하는 과정에서 각자가 경험한 온갖 어려움을 기억하며 남들이 겪은 어려움과 슬쩍 비교하고 싶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실화 같은 예를 들어보자.
 
기업체 부장으로 잘나가던 김 아무개 씨는 평소 건강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생각지도 않게 병원 신세를 크게 지고 나서는 건강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됐고, 아내와 의논 끝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결심을 했다. 김 부장 내외는 아직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방도시의 교육여건도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김 부장 내외는 단기 귀농교육을 받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판 돈과 그동안 저축한 돈을 모두 털어 운 좋 게도 고향 근처에 있는 거친 땅 3천 평을 샀다. 땅은 향이 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평 당 3만 원 정도에 살 수 있었다. 김 부장 내외는 집짓기에 너무 큰돈을 들여서 고생한 사람들의 실패담을 참고로, 그 땅에 우선 컨테이너 하우스를 사다 놓고 남은 돈은 당분간 운영비와 생활비에 쓰기로 하고 농장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단기적으로는 우선 울타리 삼아 매입한 땅의 경계에 매실나무를 심고, 개간이 끝나면 오염되지 않은 땅의 특성을 살려서 콩과 유기농 채소 재배부터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뭐 이런 이야기에 흥미를 보인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쉽지 않은 일을 덜컥 저질러놓고 ‘나만’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위로 받으려는 마음일 것이다. 이런 궁금증과 막연한 흥미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우리 산골 집에 초대받은 방문객이나, 그냥 지나가다 들렀다는 사람들조차 집주인인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데 놀랐다.
 
방문객들은 거의 하나같이 자동차에서 내려, ‘어서 오세요……’ 하며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첫 질문이 ‘어디서 어디까지가 당신 땅이냐’로 시작해서 ‘모두 몇 평이나 되느냐, 평당 얼마냐, 그동안 많이 올랐겠지?’ 등을 거의 세무서에서 나온 사람처럼 순서대로 물으며 여러 상황을 궁금해했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묻는 대로 자랑삼아 척척 대답을 해줬는데, 어느 순간엔가 사람들마다 질문이 천편일률적이고 ‘와~ 좋네!’라든지 ‘서울에서 한 시간밖에 안 걸리네……’ 혹은 ‘앞산이 참 잘생겼군!’이라는 말 대신, 거의 ‘부동산적 가치’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언짢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방문자의 입에서 예의 그 첫 질문이 나오면, 웃으면서 말을 막았다. ‘아, 그거 차나 마시면서 자세히 설명해드릴게요. 어서 들어가시지요.’ 그분들은 순수하게 물었지만, 괴팍스런 내가 그렇게 받아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화가 두 사람과 시인 친구 한 사람은 그런 질문은 한마디도 안 하고 그냥 낄낄거리며, 앞산의 단풍이 좋다고 했던가? 그들은 ‘네가 농사나 할 줄 아냐, 일 너무 하지 마라’ 어쩌고 하며 술과 차를 마시다가 대취해서 서울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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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막상’이라는 말이 있다. 산골 생활을 결심하고, 땅을 매입하고, 토목 설계를 해서 형질 변경을 하고, 집을 설계하고, 짓고, 이사를 했다는 식으로 아주 간략하고 쉽게 말하지만, 막상 시작해보니 그 실행 과정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땅을 사는 데 목돈이 많이 들어가서, 살고 있던 서울 목동아파트를 팔아 여분의 돈으로 집을 짓기로 계획을 세웠다. 스스로, 조금 서두르는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질질 끌 이유도 없었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땅을 산 지 겨우 3개월 만인 1996년 6월 1일에 기공식(?)이라는 걸 했다. ‘기공식’이라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가족과 함께 오래오래 살 터전을 마련하는 데 작은 격식이라도 차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부터, 조금 과장하면 앉으나 서나 집 짓는 생각뿐이었을 정도로 마음이 급했다.
 
그렇게 첫 삽을 뜨고 나니 우리 내외의 마음속에는 벌써 완성된 집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어른거렸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내 맘대로 되는 것인가? 무엇을 뒤집어쓰는지는 모르지만 기공에서 준공까지 두 달이면 ‘뒤집어쓴다’던 주변인들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건축공사는 마냥 늘어지기 시작했다. 건축공사뿐이
아니었다. 길이 없는 땅(맹지라고 한다)에 길을 내주는 조건으로 땅을 사기는 했으나, 땅주인의 약속 이행은 세월아 네월아 했다. 건물은 다 돼 가는데 진입로가 없으니……. 성질 급한 사람이 술값 낸다고, 사정이 급한 우리가 꽤 큰 ‘생돈’을 내고서야 완전히 새로운 길을 내는 고통을 겪었다.

 
그렇게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입주할 요량으로 겁 없이 시작한 공사는 무려 일곱 달이 걸려, 있는 속을 다 썩이고 나서 우리는 차가운 겨울비를 맞으며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던 날은 겨울인데도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그래도 좋았다. 집을 짓고 이사를 하고 나면 만사 ‘그렇게’ 좋기만 하고 행복할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새집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몸살 날 일투성이었다. 적막한 산골짝에 뚝딱 집을 짓고 한겨울에 이사를 하고 보니,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사를 온 뒤 두어 달간, 신고식을 안 해서 그런지 이유도 모르게 한밤중에 꺼져버리는 보일러, 섭씨 영하 17~18도가 되면 얼어버리는 양수 펌프, 예고도 없이 떨꺼덕 나 가버리는 전기……. 그런 일들은 작은 공포로 느껴졌다. (그런 걸 내 손으로 해결 하다보니, 어느새 나는 산골 생활 2~3년 만에 뭐든 고칠 줄 아는 ‘맥가이버’가 돼 있음을 느낀 적이 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대단하게 보는 눈치였고.)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제까지 도회에서 너무나 안전하고 따뜻하고 편한 아파트에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운 물이 콸콸 나오고, 아파트 관리소 직원들이 든든하게 살펴주는…….
그런 과정이 힘들 때 가끔은, 잘못 왔나? 좀 더 나이 들어서 시작할 걸 그랬나? 내가 너무 무모한 결정을 내렸나? 나 하나가 아니라, 노모가 계시고 아내와 아직 홀로 서지 못한 아이들이 있는데 정말 이렇게 이사를 온 것이 잘한 걸까? 괜찮을까?

별별 생각이 다 났다. 그러나 빌딩의 숲속인 서울에서 한 30년 살다가 갑자기 인적도 없는 적막강산 산골로 이사를 왔으니 어쩌면 금단현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위안했다. 그리고 아마도, 추운 겨울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은 방송일이 분주해서 낮에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해질녘 시골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상대적 적막감 같은 느낌이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 같았다. 방송 스튜디오의 휘황한 조명과 대조되는 산골의 어두운 밤! 나는 마치 큰일을 저지른 아이처럼 혼자서 걱정과 위안을 반복하며 화계산 산골짝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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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매입하고부터 새로운 내 삶의 이야기를 일기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손 들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우스운 일은 없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세월이 흐른 뒤에 나만의 산골 생활이 성공하면 그것을 세상에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일일이 기억할 수 없는, 힘들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추억하기 위해서는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씀바귀 할머니께 들은 쓰디쓴 세상사
 
소로의 《월든》이나 니어링 부부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같은 숲속 삶의 이야기처럼! 그로부터 십수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6년 12월 31일의 일기를 봤다.
 
이삿짐 정리가 덜 됐지만 성화하시는 노모를 모시고 시골집으로 왔다. 오늘은 장모님 제삿날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처가로 갔다.
 
1997년 1월 1일의 일기에는 이런 글도 있다.
 
날씨는 부슬부슬 비가 오고 흐린 가운데 ‘새해’가 밝았다. 오후가 되며 비가 눈으로 바뀌는가 했더니 이내 폭설이 시작됐다. 거실 통유리를 마주하고 앉아서 앞산을 바라봤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눈이 거의 가로로 날리고 있었다. ‘눈이 저렇게도 오나……?’
무지막지하게 퍼붓는 폭설이 앞산을 배경으로 강풍과 함께 몰아치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조카들이 새해 연휴에 놀러왔다가 폭설이 심상치 않자 놀라서 일찍 서울로 돌아갔다. 은근히 걱정됐지만, 산골로 살러 온 이상 이런 걸 즐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눈 구경을 하다가 웬걸, 폭설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내일 생방송인데 큰일 나겠다’ 싶어서 나도 밤중에  서울로 떠났다.
 
그 다음날의 기록.
 
평소 자동차로 한 시간 걸리던 서울을 5시간 30분 만에 도착했 다. 눈 구경의 낭만도, 치열한 생활이 걸려 있으니 ‘아직’…… 아닌가? 우리 집 주변 산과 들 그리고 밭에는 3월의 냉이부터 시작해서 씀바귀, 햇쑥, 돌미나리, 취나물과 두릅나물 순을 따는 5월까지 봄나물 철이 이어진다. 지천으로 나는 봄나물은 농약을 쓰지 않은 땅이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봄이면, 그걸 아는 아낙네들이 나물을 뜯으러 화계산 자락으로 찾아온다. 올해도 그럴 것이다.

1990 모년, 모월, 모일의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씀바귀 수집상의 넋두리를 들었다. 아침에 거름을 펴고 나서 차를 몰아, 방송일로 서울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도중에서 낯모르는 할머니가 길을 가로막듯 차를 세우셨다. 간혹 동네 학생들을 태우거나 노인들을 읍내까지 모셔다 드린 적은 있으나 그 할머니는 뵌 적이 없었다. 차를 세웠다.

 
“타세요, 할머니!”
“짐이 좀 있는데, 씀바귀자루…….”

 
할머니는 길바닥에 놓았던 대여섯 개나 되는 씀바귀자루를 승용차 시트에 마구 집어틀었다. 내 차는 갑자기 화물차(?)가 됐다. 난감했다. 시트는 보나마나 흙투성이, 으이쿠!  할 수 없다, 출발!
차가 움직이자 할머니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일갈을 시작했다.

 
“원, 뽀쓰가 와야지……. 제기랄!”
“어디까지 가세요, 할머니?”
“그냥 중간에 차 탈 수 있는 데까지만 부탁해요. 미안해요. 만 원 드릴게!”
“아, 저 돈 받는 사람 아닙니다, 할머니.”

 
그 씀바귀 떼다 팔아서 얼마나 남는다고 만 원씩이나 주시려고 하느냐고 했더니, 비밀을 얘기하셨다. “이 동네 저 동네 씀바귀 밭에서 한 근에 2천 원씩 수집했는데 5천 원씩 받으면 한 3 만, 4만  원 남을라나 몰라.” (한 근에 3천 원씩 남으면, 자루 수를 볼 때 계산이…… 틀리는데?) 이내 할머니는 원맨쇼 같은 넋두리를 시작하셨다.

“개도 안 물어가는 돈! 어떤 놈들은 돈이 많아서, 산 까뭉개고 꼴푸장 만드느라 지랄이고…….”

 
부근에 골프장 만드는 걸 보셨나보다. 할머니는 차비를 안 받겠다는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이런저런 세상사에 분개한 심기를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썅놈의 새끼들, 우린 요렇게 팔이 늘어지고 고무신이 닳도록 다녀야 고작 몇 만 원 버는데, 웬놈의 돈이 지랄같이 많아 가지고……. 그게 다 누구 돈인데? 뭐라더라, 그거 몇 백억씩 받아 처먹어가지고 꼴푸장 만들고, 길 다 파놓고, 산 까뭉개고, 지랄덜이지! 그게 다 대통령 아덜 새끼 돈이라는데? 지가 대통령도 아닌 놈이, 왜 돈얼 먹어? 지놈이나 나나 아무것도 아닌데, 참 나. 이놈의 세상…….”

 
나는 방송에서 좋은 게스트를 만났을 때처럼 추임새를 넣었다.

 
“대통령 아들의 돈이래요? 어떻게 아세요, 할머니?”
“다들 그래! 이거 말구두 많다는데? 얼마나 처먹었는지도 모른대……. 난, 백만 원만 있어도 좋겠다. 이 지랄하고 다녀도 힘만 들지 돈 되나?”
(…만 원이나 주신다더니, 틀렸군.)

 
“할머니, 할머니처럼 버신 돈이 더 깨끗해서 좋은 거예요. 그 사람들 다 벌 받을 겁니다.”
“구캐연 새끼덜두 다 지 잘났다구 찍어달라구 해서, 불쌍해서 찍어주면, 돈 처먹느라구 눈까리가 빨개가지구 그러구, 맨날 쌈박질만 하구……. 에이 드런 놈들 같으니라구! 꼴푸는 무슨 꼴푸를 친다구, 그게 무슨 운동이야? 뭐라더라, 하루 종일 꼴푸공을 후려치구는 그 공을 쫏아 댕긴대나? 할일도 드럽게 없는 놈덜이지, 돈지랄이구! 그 꼴푸 작대기로 전부 다리몽댕이를 갈겨버렸으면 좋겠어. 난 운동은커녕 씀바귀자루만 이고 댕겨두 밥만 쑥쑥 내려가더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할머니의 분개는 계속됐다.

 
“할머니, 씀바귀 잘 파세요! 이쪽으로 자주 나오시나요?”
“안 가는 데 없지 뭐……. 고마워요! 에이 괜한 소릴 해가지구…….”

 
퍼붓고 나니 좀 켕기시는 모양이었다. 국민의 소리라는 게 이런 거구나. 방송을 하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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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는 올해 쓸 퇴비 거름을 샀다. 모두 다섯 트럭분!  함께 농사짓는 ‘일여덟’ 아마추어 농사꾼들이 공동 구입한 양이 그렇다. 4월은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화계산 골짜기에는 ‘시농제’라는 작은 굿판(?)이 벌어진다. 내가 살아온 십 여 년 동안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한 아마추어 농군들 7, 8명이 봄 농사를 앞두고 술 먹을 핑계로 시작한 작은 잔치다. ‘굿판’이 아니라 작은 ‘술판’이다.
돈 만 원씩이나 추렴하여 술 사고, 고기 좀 사고, 찌개 끓이고, 과일 좀 사서, 순전히 남자들 솜씨로 지지고 볶으며 벌여보는 봄 잔치다.
 
4월이다. 4월의 저편에, 어머니 아버지가 그리운 5월이 오고 있다. 이사를 오던 해인 1996년 여름, 산골 집이 완공되는 것도 못 보시고 어머니보다 11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 지금 이 글을 쓰다 생각하니, 아버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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