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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봉 이계진의 산촌일기 레트로_3]살아 숨쉬는 느낌! 아름다운 연중행사! 시골 김장

2019-11-28 20:35

글 : 이상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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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이야기라 시제가 딱히 일치하지 않는다. 귀농 결심을 다룬 이야기가 첫장에 소개되어 부득이 첫회에 소개했지만, 절기가 엇갈려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계절을 두 번씩 돌아가며 써온 글이니 이왕이면 지금의 절기랑 맞춰 가는 게 편하다 싶다. 책의 목차를 파기하고 지금 시절에 맞춰 물 흐르듯 실어보기로 했다. 10년 전 같은 때로 돌아가 그와 함께 호흡해보면 재미와 감동이 조금 더 풍부해질 것으로 믿어본다. 글을 옮겨 싣고 있는 기자는 어느새 그때 그 가을, 그 겨울에 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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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무 거두기와 마 그리고 야콘 수확을 마치면 올해 농사도 마감이다. 회계연도가 있듯 ‘농사연도’가 있다면 올해 내 농사연도는 이 계절이 끝이다. 치열한 성장과 결실의 푸른 계절을 보내고 지금은 겨울로 가는 길목. 

망중한-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은 온종일 늦가을의 정취에 빠져 지냈다. 지난 한 주는 얼마나 뻘뻘거리며 바빴는지 산중 절간 찾아가는 마음으로 겨우 주말에야 산골짝에 들어왔다. 드문 일이다. 똑같은 일주일인데도 그 한 주일 새에 산중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내가 사는 집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절정을 이룬 앞산 단풍, 낙엽이 수북이 쌓인 진입로, 잎이 모두 지고 빨간 감만 매달려 있는 감나무 그리고 서리 맞은 고춧대와 호박덩굴의 을씨년스런 모습, 겉잎에 노란 단풍이 든 김장 배추들..... 눈물이라도 날 것 같은 만추의 풍경이다.
 
아, 그래도 ‘일’을 해야 할 텐데……. 이 그림 같은 가을날에 일이라니 무엇을 해야 하나?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이 가을의 정취를 외면한 채 머리를 숙여 무슨 일을 한다는 자체가 이 가을에 대한 모독일 것 같아서 그냥 뒷짐 지고 마음 불안한 사람처럼 서성댔다. 나는 풍경화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었다.
 
한참을 장승이 된 듯 멍하니 서서 단풍으로 물든 앞산을 바라봤다. 누군가에게 전화라도 걸어서 계절의 장한 모습을 이야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뭔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아 사방을 둘러봤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른 가지를 모아놓고 이 가을의 정지된 시간을 태우는 것이었다.
 
나는 모닥불을 지폈다. 바람도 없는 가을날에 푸른 연기는 또 하나의 정취를 더했다. 그러나 불꽃이 좀 더 세차게 오르려 할 때 후드득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들었으면서도 ‘웬 가을빈가’를 말했으니 나는 반쯤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이런 날은 정말 하루쯤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가을 정취에 취했던 꼭 이틀 후인 11월 2일엔, 때 이른 한파의 기습으로 화계산 농부들이 단단히 기합을 받았다. 기온이 섭씨 영하 5~6도까지 내려간다는 예보에 놀란 농부들이 모두 비상 출동해 비닐로 김장 무를 덮느라 저녁때까지 난리를 쳤다. 아랫동네는 냉해 걱정은 안 하는데……. 그냥들 헤어지랴, 찬바람에 언 몸을 저녁 막걸리 반주로 녹여야 했다. 13년 동안 거의 해마다 그랬던 기억이다.
 
두엄으로만 기른 배추·무
 
‘칸트’를 이야기하는 사람과 ‘퇴비’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서로 대화가 안 된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대화의 원리다. 산골생활 이야기지만 ‘우아한’ 이 공간에 ‘퇴비’ 이야기를 꺼내자니 망설여진다. 도회에서 살았거나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금비’(金肥)라는 말을 잘 모를 수도 있다. 돈을 주고 시장에서 사다 쓰는 비료, 즉 화학비료를 뜻하는 말인데 ‘거름’이라곤 ‘퇴비’와 ‘인분’이 대세이던 시절의 말이다.
 
그 시절에 화학비료는 ‘신비의 묘약’ 같은 것이었다. 솔솔 뿌리기만 하면 작물이 검푸르게 자라니 아마 농부들은 ‘금’같이 귀하다는 느낌으로도 ‘금비’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퍽 아껴서 썼다. 금비의 반대는 ‘두엄’(퇴비)이다. 금비가 귀해서 두엄을 거름으로 쓰던 시대에 두엄 만들기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 시기에 또 한 가지 귀한(?) 거름이 있었다. 거명하기 미안하지만 ‘인분’이다. 농민들은 그것을 그냥 ‘인분’이라고 부르지 않고 슬쩍 ‘망옷’이라는 은어로 말했다. ‘망옷’은 사전에 호남지방 사투리로 돼 있지만 내가 알기로는 강원도와 경기도 지방에서도 쓰였는데, 심마니들이 쓰던 말, 즉 심마니 말이다.
 
어쨌건 그놈의 망옷 거름 때문에 우리나라가 기생충 왕국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래서 ‘금비’만 주고 길렀다는 야채는 ‘깨끗한 농산물’이라는 의미로 통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그 옛 날을 잊고 ‘잘난 척하고’ 살지만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더니, 세월이 흘러 대량의 값싼 화학비료가 공급되고 녹색혁명을 이루고 나니 상황은 다시 역전됐다. 지금은 ‘금비’를 많이 사용해서 기른 채소는 ‘질산염’이 나온다나, 하며 나쁘다고 퇴비만 쓴 ‘유기농산물’을 찾는 시대가 됐다. 나 역시 비료를 안 쓰며 농사를 하니까. 혹시 쓸 일이 있을까 하여 사놓은 한 포대의 요소 비료는 뜯지도 않은 상태이다.
 
비가 안 온 가을
 
지난가을엔 비다운 비가 온 적이 없다. 수돗물이 잘 나와 식수와 목욕과 빨래에 어려움이 없는 도회인들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비가 안 와도 가뭄이 있는지 어떤지 느끼지 못한다. 별걸 다 보도하는 기자네 집 역시 항시 물이 잘 나와 가무는지 어떤지 모르니까 보도조차 아니 한다. 그러니 웬만한 국민들은 덩달아 가뭄을 모른다.
 
오직 ‘비’에 목마른 농촌 사람들만 비가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 비가 한동안 안 오면 농촌 사람들은 속상하다. 밤 9시 뉴스를 보는 이유 중 하나가 맨 끝에 나오 는 일기예보를 보기 위해서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비가 오기를 그렇게 기다리는데, 일기예보하는 어여쁜 아가씨들도 날씨에 대한 생각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심이다. 맑은 날씨를 알리며 기상 캐스터들이 별생각 없이 ‘내일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나들이하기에 매우 좋습니다’ 어쩌고 할 때 농민들은 괜스레 미운 생각이 든다고 한다. 나들이를 갈 때 가더라도, ‘가뭄이 심해 걱정’이라는 말 한마디 하면 어디가 덧나는지.
 
얼마나 가물었던지 10월 16~17일, 경기도 지역에 ‘찔끔’이지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릴 때까지 나는 바쁜 틈새에 시골집에 내려오면 밤중에라도 김장밭에 물을 주어야 했다. 물 주기가 힘든 것이 아니다. 퍼다 뿌릴 물이라도 넉넉하면 무슨 걱정일까만, 가뭄이 계속되니 계곡물도, 지표 샘도 졸아들어 잠시만 퍼주고 나면 물이 끊어져버리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말라버린 땅에 서서 따끈한 가을볕을 받으며 축 늘어진 배추·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목이 타는 느낌이었다. 한 바가지 물로 한 포기 배추에 물을 주었을 때 마치 배추들이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춤을 추는 것 같으니, 한밤중이라도 관수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퇴비 거름이 넉넉한 땅에 심은 배추와 무지만 목마른 환경에서 모질게 자라 질기고 맛이 없다.
 
김매고 물 주고 그렇게 정성을 다해 기른 배추는 해마다 ‘입동’이 지나고 첫 추위가 찾아올 무렵쯤 온 가족이 모여 김장을 한다. 올해도 11월 중순쯤 날을 받아 김장을 할 예정이다. 아들 딸 며느리 모두 모이고 사돈댁 가족도 초대해서 ‘온 가족 김장날’ 잔치를 벌이고 필요한 만큼씩 나누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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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김장. 해마다 거르지 않는, 남들보다 부지런떠는 아름다운 연례행사.

그날 소용되는 김장감 공급 책임을 내가 지고 있다. 그러니 더욱 열심히 가꿔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온 가족 김장날’이람? 그것도 11월에? 하겠지만 우리의 자랑인 김치를 거의 공장에서 나오는 ‘비닐 포장 김치’로 대신하는 시대를 쉬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 집은 서울에 살 때나 지금이나, 농촌에서 하는 식대로 입동이 지나면 김장을 하곤 한다. 1996년 이곳 산골로 이사 온 이듬해, 내 손으로 처음 지은 배추농사는 대단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 배추와 무로 흥분된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김장하던 날의 일기가 눈에 띈다.
 
1997년 11월 3일 첫 김장!
어제부터 배추를 뜯어 절여놓고, 무를 뽑아 깨끗이 씻었다. 노모와 아내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따뜻한 거실에 불을 밝히고 밤늦게까지 무를 썰고 채를 쳤다. 어머니도 합세하시기는 했지만,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셨듯이 일하는 며느리를 향해 옛날 살림하시던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을 쏟으셨다.
뒤란에 만들어놓은 우물 수곽에 맑은 샘물을 가득히 받아놓고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배추를 씻고, 조반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양념 삼아 소를 버무려 넣고 후닥닥 김장을 마쳤다. 누구의 도움을 청할 곳도 없어 식구끼리 해치웠다. 오후 늦게야 뒷설거지를 마친 아내는 거의 탈진한 듯 자리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다. 
 
11월 초순에 김장을 하다니. 그러나 이사 온 첫해이고, 평지보다 추운 이곳에 추위가 어떻게 찾아올지 몰라 11월 초지만 일찍 김장을 해 넣었다. 좀 이르다 싶었지만 아랫동네에서도 김장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기른 배추와 무로 김장을 하게 되다니! 땅은 아마추어 농사꾼에게도 산물을 주었다. 여름채소도 풍성히 키워 먹었지만 김장 농사를 지었다는 것은 느낌 이 조금 달랐다. 다만 수요량을 잘못 계산했다. 파종한 것들이 100% 다 잘 크는 것 으로 오해한 것이다. 충분할 것 같은 생각에 두 두럭의 무를 심었는데, 끌끌한 놈들을 동치미 거리로 뽑고 보니 쓸 만한 것이 50~60개밖에 안 되고, 여분은 그저 ‘쥐’ 만 한 것 스무 개 남짓이었다. 이게 어찌 된 것인가.
 
쓸 만큼만 심어놓고는 무가 자라던 가을에 찾아오는 사람마다 자랑삼아 몇 개씩 뽑아준 결과다. 배추도 그런 대로 잘 됐으나 역시 포기 수를 계산해보니 속이 찬 놈은 절대량이 부족했다. 아, 두더지가 파거나 벌레가 뿌리를 잘라 먹어 죽는 놈까지 생각해서 넉넉히 파종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결국 부족한 양은 아랫동네에서 사와야 했다. 우리 집 김장은 1백포기가 기본이다. 우리는 김치를 잘 먹는 3대 가족이라 적어도 1백포기 정도는 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되지 않은 추억   
 
어린 시절 원주에서 살 때 ‘입동’이 되면 어머니는 도대체 김치며 깍두기며 동치미를 몇  독이나 담그시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많은 김장을 하셨다. 아버지가 배추·무 농사를 잔뜩 지어 놓으시면, 그 물량을 거의 다 우리 집에서 소화를 했다. 배추만 해도 아마 2백~3백포기는 되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엄청난 양의 김장이었다. 하긴 많은 식구가 긴 겨울 동안 먹을 ‘김장’은 ‘반 양식’이었으니까.
 
김장철이면 나는 직장에 계신 아버지 몫의 일과 함께, 시집간 누님들 몫의 일도 대신했다. 멀리 있는 밭에서 배추·무를 지게로 져 나르는 일부터 무 씻기, 깍두기 썰기, 채 썰기, 무거운 광주리 들어 나르기, 예닐곱 개의 독을 묻을 김장 구덩이 파기, 그리고 흡사 아메리카 인디언의 집 모양 같은 김치 광 만들기까지 실로 맹활약이었다. 그러니 자연, 내 눈과 가슴속에는 그런 풍경이 가득 차 있게 됐고, 김장 행사는 평생 거르거나 빼놓을 수 없는 나의 생활이 돼버렸다.
 
기후 변화로 인해 겨울이 천천히 온다지만, 지금도 시골에서는 여전히 절기 따라 입동이 지나면 서둘러 김장을 해 묻는다. 아직 춥지 않다고 해서 밭에 서 있는 배추와 무를 두고 보다가 어느 날 한파가 몰아칠 때 허둥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추위가 더디 와서 김치가 시면 신 대로 먹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변화는 아파트에 사는 도회 사람들을 위해 만든 ‘김치냉장고’가 요즘은 시골에도 많이 보급돼서 땅 파고 김장독 묻는 가정이 점점 준다는 것이다. 우리 집도 3, 4년 전부터인가 김장독 묻을 일이 없어졌다. 나의 신성한 계절성 ‘중노동’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이제 화계산 자락 배추·무 농사와 김장 이야기를 하자. 배추·무가 크는 가을에 일일이 물을 준다니까 아마 몇 포기 안 되는 줄로 짐작하겠지만, 배추·무가 모자 랐던 첫해의 경험을 잊지 않고 올해도 나는 약 3백50포기의 배추와, 개수로 말하 기는 곤란한 정도(긴 사래로 두어 두럭)의 무와, 넉넉히 쓸 만큼의 청갓과 쪽파, 그 리고 3백뿌리 정도의 대파를 심었다.
 
올해는 특히 많이 심기 좋아하는 ‘허만’ 선생 님과 함께 심었다. 그리고 부드럽고 맛있는 배추·무를 기르기 위해 두 트럭분의 발효 ‘돈분’(豚糞)을 사서 밑거름으로 뿌려놓고 때를 놓치지 않고 모종을 했다. 모종을 할 때만 해도 밭이 축축했는데 그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비다운 비가 온 적이 없어 물 주기 고생을 한 것이다. ‘고생’이라고 했지만 나의 ‘기꺼운 정성’이다.
 
그렇게 열심히 배추·무 농사를 지었는데, 올해 김장 행사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작년까지 결혼 후 30여 년을 변함없이 해오던 그 ‘큰살림 집 김장’을 감당하기 힘들다며 아내가 ‘규모 큰 김장행사’는 작년으로 ‘마감하자’는 뜻을 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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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새아기와 사돈네 가족까지 모셔서 두 집이 함께 김장을 해 나눴다. 행사를 치르듯 떠들썩하게 ‘김장축제’를 벌였다. 그런데 김장을 끝낸 다음 날 그만, 아내가 몸살이 났다. 원래 약한 아내에게 대규모 김장은 이제 감당하기 어려운 연례행사 가 된 것이다.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2008년 김장행사를 끝으로 대규모 행사는 안 하기로 했더니, 작년에 함께 담근 김치를 맛있게 잡수신 사돈댁에서 당신들이 ‘주관가’(主管家)를 할 터이니 배추·무만 길러 달라는 제의를 해와 올해도 김장행사를 이어 갈 수 있게 됐다. 사돈댁 만세!!
그런 상황에 올해도 김장날을 잡았다. 이쯤 되니 ‘김장감’이 모자라거나 배추·무의 ‘품질’이 떨어지면 농사에 ‘달인’처럼 비쳐진 아마추어 농사꾼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서, 올해 김장 농사는 더더욱 신경을 썼던 것이다.
 
옥토버 페스티벌(가을이면 시골집 앞마당에서 벌이는 추수감사제 성격의 파티. 함께 농사짓는 친구들이 가족과 지인을 초대해 한 해 농사의 수확을 함께 기뻐하고 위로하는 자리다_편집자 주)처럼, 나는 또 김장행사를 위해 준비할 것이 많다. 집 뒤란에 있는 우물 확 주변에 메타세쿼이아 침엽 낙엽이 얼씬도 못하도록(고것이 바늘처럼 생겨서 배추 속에 끼어들면 골치 아프다) 말끔히 청소를 하고, 큰 비닐을 사다가 깔아 우물 확이 철철 넘치도록 물을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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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산 자락 집 앞마당에서 매년 한 번 열리는 옥토버 페스티벌.

 
아내는 아파트 좁은 부엌에서 배추를 씻던 때의 답답함을 이제쯤은 잊고 싶어한다. 그래서 시골로 온 후에 는 언제나 물이 넘치는 우물에서 시원시원하게 배추를 씻도록 마련했고 아내는 그것을 좋아했다. 남편으로서, 아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항아리도 미리 부셔서 배추를 절일 수 있게 해놓아야 한다. 또, 씻은 배추를 건져 쌓아놓을 큰 탁자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전날 밤부터 다음 날 새벽에 일할 때 어둡지 않도록 외등을 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해에는 김장하는 날 세찬 바람이 불어 추웠는데, 바람막이 비닐이라도 칠 준비를 해야 한다. 화계산에 내리치는 초겨울 북풍은 얼마나 매서운지.
 
우리 집 김장하는 그날, 주말 농부들은 무얼 하는가?
 
벌써 몇 년째 김장날 행사에 참여(?)한 농부들은 올해도 관봉이 준비한 따끈한 청주가 몇 잔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추석 때 쓰고 남겨둔 청주를 중탕으로 따끈하게 데우고 노릇노릇하게 볶은 복어 지느러미를 띄워 ‘카~~!’ 한 잔 마시고 나서, 절인 배 잎에 얼큰한 김장 ‘소’와 돼지고기 수육을 싸서 먹는 안주는 오슬오슬한 초겨울을 녹인다. 점심은 양지머리 쇠고기뭇국에 ‘이밥’이다.
 
대접받은 남정네들은 김장 버무리는 사람들이 추울까 봐 모닥불을 피워주는 봉사도 해주고!
이런 분위기의 김장행사가 끊어지는 것을 관봉이 그냥 받아들이고 싶겠는가?

소망하건대, 내가 살아 있고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나는 배추· 무 농사를 지을 것이며 입동이 지나면 도란도란 식구들끼리 김장을 하며 살 것이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아름다운 연중행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못하게 되면 내 아들이라도 그런 분위기를 이어주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김치가 맛있게 익을 ‘겨울’이 깊어지는 계절이다.
 
<4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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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경기도 광명에 살 때는 김장을 더 많이 했으니 배추 두어 접은 기본이었지. 나도 젊고 아내가 겁 없이 살림을 하던 때였지. 밤 잠을 설쳐가며 이틀에 걸쳐 김장을 해서, 40평 대지에 지은 단독주 택 손바닥만 한 시멘트 마당의 그늘진 구석 쪽을 깨고 구덩이를 파 서는, 두어 접치 김장을 묻어놓고 먹었지. 가난했던 초년 아나운서 네 대식구 겨울 반찬은 그 맛있는 김장김치로 충분했었지. 내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아마 중학교 때였지? 김장독 묻는 일을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했던 일이 있다. 그리고는 그 이듬해부터 아 버지는 김장독 묻기를 내게 맡기시고 손을 놓으셨다. 그 일은 대학 진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내 차지였다. ‘잘한다’는 어머니 의 칭찬에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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