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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푸디스트 최영미의 슬로푸드 + 슬로라이프 01]가을을 저장하고 겨울을 준비하는, 11월 예찬

2019-11-19 16:52

글 :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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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기다리는 11월이 벌써 반이 지났다. 달력에 일요일 빼고는 빨간 날이 하루도 없고 나무는 모두 낙엽을 떨궈 쓸쓸하기만 한 이 계절이 나는 어릴 적부터 제일 좋다. 긴 겨울을 준비하는 한 해 농사 갈무리 시기, 모기도 벌레도 없어지고 아직 많이 춥지 않아 여행 다니기 좋은 최고의 날씨, 나에게 11월은 그렇다.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텅 빈 듯하지만 오히려 꽉 찬 11월, 당신의 11월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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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11월이면 대개 첫눈이 내렸다.
아침이면 하얀 서리를 보고 ‘눈이 왔다’고 좋아하다가 ‘서리’라는 말에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본가가 있는 김포 지역은 11월 초면 김장을 시작한다. 큰집이 먼저 하고 그다음 이모네, 오촌아주머니네 순서를 지나면 우리 집 차례가 왔다. 배추김치만 300~400포기씩 하는 김장이기 때문에 서로 일손을 도울 수밖에 없다. 10월 말부터 스케줄을 짜느라 난리다. 김장은 준비부터 만만찮아 일주일 이상 시간을 내야 한다.
 
11월이면 햅쌀이 집에 온다.
어릴 적엔 햅쌀 튀밥을 조청에 버무려 만든 유과가 겨울 내내 유용한 간식이었다. 고개 넘어 마을회관 앞에 뻥튀기 아저씨가 왔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한걸음에 내달려 줄을 섰다. 쌀 한톨이라도 흘릴까봐 아저씨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저 멀리 가서 귀를 막고 있으면 ‘펑!’ 하고 우리 집 튀밥이 한가마니가 되어 나왔다. 겨울방학을 기다리게 했던 든든한 나의 간식이다. 가마솥에 엿을 고고 수확한 땅콩을 볶고, 땅콩엿도 만들었다.
 
엄마는 햅쌀로 술을 담그셨다.
식재료를 보관하던 창고에 직접 누룩을 띄웠다. 술독은 늘 내 방 아랫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 불평을 많이 했다. 그럴 때면 “너는 이거 먹어” 하며 살얼음 동동 식혜를 떠주던 엄마. 엄마는 지금도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라고 하시지만 술독 여는 날이면 모르는 사람들까지 술병을 몇 개씩 들고 와 한 병만 달라고 줄을 섰다. 그 술을 ‘농주’라고 불렀는데, 최근에 많은 이들이 ‘그 맛이 그립다’고 전해와 엄마는 한 번 더 술을 담글 예정이다. “누룩은 어디에 띄우나…” 하길래 “사면 되지” 했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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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이 끝나면 메주를 쒔다.
가마솥 가득 담긴 콩이 잘 익을 때까지 지켜보는 일이 나의 임무였다. 엄마는 내가 부르러 가려고 하면 “다 익었지?” 하며 나타났다. 그런 엄마가 얼마나 멋있는지, 나는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절구에 콩을 넣고 찧어서 삼삼오오 앉아 메주 모양을 만들 때면 언니들은 “못생긴 게 너 닮았다”며 놀리곤 했다. 다 추억이다.
 
11월에는 탈곡을 하고 쌓아놓은 볏단이 소중한 놀잇감이었다.
요즘 트램펄린 위에서 뛰듯 그 위에 올라가 방방 뛰며 놀았다. 그러다 고꾸라져 코피가 난 적도 있다. 바짝 말라버린 논바닥은 느낌이 좋았다. 삽으로 논바닥을 한 삽 떠서 논흙 안에 숨어 있는 미꾸라지를 보곤 했다. 겨울이 오면 아빠는 논 하나에 물을 받아 썰매장을 만들어주셨다. 물론 썰매도. 그 시절 우리는 아빠를 ‘맥가이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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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에 있던 배도 마지막으로 따서 쟁여두고, 감도 까치밥만 남기고 모두 따서 연시 만들어 먹을 것과 소금물에 담가 먹을 것을 따로 준비했다. 우리끼리는 ‘침당가먹는다’고 했는데, 요즘엔 침담가먹기 좋은 땡감나무가 없어 단감이나 연시(홍시)로 먹으면 그만이다. 그 맛이 그립다. 부천 살던 막내삼촌이 가끔 일 끝나고 밤에 내려오면 아주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난다. 잠든 척 엿들은 어른들의 대화도 재밌었다.
 
어린 시절 11월을 떠올리니 미소가 가득 번진다.
시골살이의 11월은 할 일이 너무 많아 바쁘면서도 행복한 시간이다. 오로지 겨울에 먹을 것을 준비하던 생존의 시간이었다. 그 기억이 이리 행복하게 남을 줄 그때도 알았을까. 우리 가족은 여전히 많은 것을 이어가고 있지만, 또 많은 것을 놓치고 산다.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집착적으로 사람 없는 곳을 찾아다니던 시기가 있었다. 기자라는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언어와 노는 직업을 가진 터라 아무말 안 하고 그저 혼자 있고 싶은 순간이 가끔 찾아온다. 일 년을 열심히 달려 긴 겨울을 시작하는 11월에 지쳐서는 죽은 듯이 쉬었다가 다시 한 해를 준비하고 시작하기를 20여 년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날 여행지에서 생각했다. 우리 집, 할 줄 아는 게 없는 만능 엄마와 말만 하면 다 만들어주는 맥가이버 아빠가 있는 우리 집의 11월, 그렇게 집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나 마흔이 넘은 딸은 11월이면 다시 그곳에 있다. 
 
 
슬로푸디스트 최영미는
<슬로매거진달팽이> 발행인 겸 편집장, 슬로카페달팽이 대표, 슬로푸드 성북지부장, 마케팅 대행사 및 독립출판사 지안(志安) 대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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