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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교수의 위대한 작곡가들의 숨은 얼굴6]펠릭스 멘델스존 Felix Mendelssohn (1809~1827) 누이와 함께 한 음악 인생

2019-11-08 11:38

글 :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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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음악가들의 활약으로 눈부신 시기였습니다. 음악가 개인마다 독특한 개성을 드러냈고 사람들은 작곡가를 예술인으로 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 분야 전반의 발전도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졌습니다. 실내악단과 관현악단은 물론 연주자들의 노동조합까지 등장하는 등 오늘 날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지요. 뿐만 아니라 이전 시대의 선배들이 남긴 작품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들에 대한 헌정곡을 종종 중요한 무대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19세기 낭만주의 시기의 대표 음악가인 쇼팽, 리스트, 슈만을 다루기에 앞서 멘델스존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멘델스존이라는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탁월한 역량을 보인 바 있습니다. 그는 바흐나 모차르트의 음악 을 존경했고, 과거에 그들이 고집했던 음악적 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해 이를 보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멘델스존은 음악가 가운데 가장 독특한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멘델스존은 유복한 유대인 집안의 장남으로 1809년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족은 이듬해 베를린으로 이주했습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는 저명한 철학자, 아버지는 성공한 은행가,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멘델스존의 집안은 귀족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재력을 가진 셈이었지요. 궁궐 같았던 멘델스존의 집에는 실제로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는 음악당이 있었고, 부모님의 교육열 또한 대단했다고 합니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각 분 야에서 우수한 교수들을 아들의 가정교사로 초청해서 학교가 아닌 모든 수업을 집에서 진행하도록 했습니다. 멘델스존에게는 영어, 불어, 이탈리아어를 비롯해 문학, 미술, 승마 등 모든 과목의 개인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정서 교육의 일종으로 어린 나이에서부터 작곡, 피아노, 성악 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특히 피아노는 어머니로부터 직접 배웠다고 하네요. 이 많은 수업들을 모두 듣기 위해 멘델스존 형제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멘델스존의 집에는 개인 교향악단까지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열 살 때 본인이 작곡한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와 협연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빛나는 재능은 끊임없이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당초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고 멘델스존이 당연히 자신의 뒤를 이어 은행가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음악을 가르친 것은 교양과 감정 교육을 위해 시킨 것이지 모차르트의 아버지처럼 연주비를 벌어오기를 바란 것은 더욱 아니었지요. 어린 시절 멘델스존의 가장 중요한 보물은 할머니에게서 받은 <마태수난곡>의 악보라고 합니다. 다른 작곡가들과 비교했을 때 꿈과 같은 환경에서 자란 멘델스존은 열다섯 살에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하고 연주했으며, 야외음악당이 있는 집에서 매주 큰 음악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 음악회에는 당시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명사들이 참석했고, 어린 멘델스존은 자연스럽게 이런 유명한 명사들과 친분을 쌓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조언들을 얻었다고 합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멘델스존은 새로운 기획에 착수합니다. 베를린 징아카데미에서 <마태수난곡>을 공연으로 올리기로 한 것이지요. 멘델스존은 1829년 본인이 직접 지휘봉을 들고 바흐의 음악을 새롭게 알리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통해 부르주아 도련님이 아닌 ‘젊은 천재 지휘자 멘델스존’으로 변신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유대인인 그는 어려서부터 놀림을 받았고 음악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유대인이라는 꼬리표가 늘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소위 ‘왕따’를 당한 것인데, 훗날 말러나 바그너와 그의 아내, 리스트의 부인까지도 멘델스존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바그너 자신도 멘델스존에게 대놓고 망신을 주곤 했을 정도지요.
 
멘델스존의 대표작으로는 <한여름 밤의 꿈>이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고전적인 구성을 바탕으로 그가 선보이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은, 개인의 감정이나 과장된 음악적 기교를 구사하는 쇼팽, 리스트, 베를리오즈 등의 작품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점잖고 고급스러운, 또 품위 있는 선한 아름다움이라고 할까요? 멘델스존은 1835년 스물 여섯의 나이로 독일의 저명한 오케스트라 게반트 하우스 관현 악단의 종신 음악 감독으로 부임합니다. 그리고 그의 박식한 재능으로 오케스트라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단원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등 자신의 악단을 순식간에 유럽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도 했지요. 멘델스존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노후를 대비하는 새로운 연금 제도를 도입할 정도로 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애정과 교양이 넘치는 어머니와 엄격하고 높은 교육열의 아버지를 둔 멘델스존은 여성 문제에 있어서도 깨끗했습니다. 1831년 뮌헨을 방문했을 때 그의 누나인 화니의 편지에는 ‘동생이 약간의 애정 놀이’를 하면서 어떤 여성을 만나고 있다는 암시가 살짝 등장합니다. 상대의 여성은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델피네 폰 사우로트, 멘델스존과 함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이 음악회를 관람한 바이에른 국왕은 이 젊은 두 음악가를 높이 평가하고 이 기회에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이 어떤지 제의했으나 멘델스존은 정중하게 거절 했다고 전해집니다. 멘델스존에게는 이 여성 이외에 별다른 사랑 이야기가 없습니다. 멘델스존이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프랑크푸르트를 방문 한 멘델스존은 자신보다 여덟 살 연하의 세실 장르노라는 아가씨를 소개 받았습니다. 목사의 딸이었던 세실은 어린 나이 에 부모님을 일찍 여읜 뒤 유복한 부인의 집에서 소중한 보살 핌을 받으며 자랐는데, 멘델스존과 결혼한 그녀는 음악가인 남편을 내조하고 가정을 지키는 현모양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세실을 소개 받은 멘델스존은 그녀를 무척 좋아했고, 이 두 사람은 1837년 3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식에는 어딘지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같은 도시에 살던 먼 친척 한 사람을 제외하면 멘델스존의 가족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으니까요. 멘델스존의 부모는 물론 그렇게 각별한 사이였던 누나 화니도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원인은 바로 시누이에 대한 화니의 질투 때문 이었습니다. 화니는 결혼을 혼자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소식을 알려온 남동생을 아주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디서 내 허락도 없이 촌뜨기 같은 여자랑 결혼을 한다고!” 분해서 씩씩거리는 화니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세요? 멘델스존 남매는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각별한 사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식에 불참했을 뿐 결혼 이후부터 화니는 도리어 세실을 아주 예뻐했다고 합니다. 3남 2녀의 자식을 낳고 성실하게 멘델스존을 내조하는 모습에 오히려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하지요.

역사학자들은 좋은 남편이었던 멘델스존이 진짜 사랑한 여인은 네 살 위의 누나 화니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화니는 동생 멘델스존의 정신적인 버팀목이었지요. 아마추어였지만 그녀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여성 음악가로 유명할 만큼 500 곡이 넘은 곡을 작곡했고, 또 지휘자로도 활동했습니다. 화니가 아마추어 음악가로 남은 이유는 단지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지요.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좋은 혼처에 시집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여자로서 최고의 인생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화니가 음악에 특별한 재주가 있어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화니는 어려서부터 멘델스존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격려했다고 합니다. 멘델스존의 대표작 <무언가>도 사실 화니의 발상이었다고 합니다. 화니가 남긴 곡 중에서도 같은 제목의 곡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일찍부터 음악가의 꿈을 버려야 했던 화니는, 남동생에게 음악을 지도하고 그녀의 풍부한 음악적 지식으로 동생을 격려했습니다. 또 아버지의 반대를 이기고 멘델스존이 음악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뒤에서 노력한 것이 분명 합니다. 나중에 그녀는 빌렘 헨델이라는 궁정 화가와 결혼했는데, 사실 그는 멘델스존의 가문에 썩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화니는 그가 예술가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사실로 인해 그와 결혼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권유와 지지로 1846년 평생 그녀가 원했던 <자작곡집>을 출판했지요. 출판 이듬해 그녀는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41년이 라는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누나의 갑작스런 죽음이 멘델스존에게도 너무 큰 충격이었을까요? 화니의 남편인 빌렘 헨델에게 보낸 편지에서 멘델스존은 ‘누나는 언제나 나에게 기쁨과 많은 도움과 사랑을 주었지 만 진정 나는 받기만 하고 누나에게 해 준 일이 단 하나도 없다’고 하며 본인을 자책했다고 합니다. 결국 멘델스존은 누나에 대한 죄책감으로 날이 갈수록 쇠약해졌고,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뒤 멘델스존 역시 뇌졸중으로 사망합니다.
 
사람들은 멘델스존의 삶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마냥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의 삶은 너무나 고단한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새벽 5시부터 시작하는 수많은 공부와 멘델스존 가문의 장남이라는 압박감은 상당히 컸을 것입니다. 쉴 틈 없이 가문에 흠이 되지 않도록 공부와 일을 병행했던 멘델스존은 결국 과로사로 38년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너무나 올바르고 정직하게 산 것이 이유였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성공과 풍요 이면에서 참으로 괴로운 삶을 살았던 멘델스존입니다. 
 
 
이경미 교수는…
우아한 연주, 섬세한 터치로 특히 모짜르트 스페셜리스트로 널리 알려져있는 피아니스트.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의 협업 및 실내악 연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경남대학교 교수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 <러브스토리>, <피아니스트의 비밀노트>, <위대한 작곡가의 숨은 얼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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