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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리더 이상문의 어쩌다 뒷북 5]비좁은 단골술집 사람들의 원초적 서사

가나이 마키의 《술집 학교》

2019-09-20 17:28

글 : 이상문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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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책상에 층층이 쌓인 책들에 기가 질렸다. 출판사에 부탁드린 책들이 죄다 겉 두껍고 속 무거운 것 일색이다. 꾀가 나서 제일 얇고 가벼운 책을 골라 든 게 《술집 학교》였다. 제목부터 재미있어 호기심과 동시에 무장해제. 주당이지만 함부로 취하진 않기로 맘먹으며, 표지를 열었다.
 
가나이 마키는 이 작은 책의 저자이자 화자다. 1974년 일본 지바 현 출생이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소개된다. 임무는 세상의 다양성을 맘껏 즐기는 것. 1년 동안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 1백 회, 귀 청소 약 2백 회, 술 마시기 약 3백 회. 지은 책으로는 《세상은 끄덕끄덕으로 가득 차 있다》…. 표지 날개의 소개 글을 접하면서부터 마키는 ‘술집 학교’에 딱 어울리는 사람 같다 싶었다. 듣기 1백 회, 귀 청소 2백 회라니… 그 내공 술 없이 어찌 가능하랴.
 
도쿄 한복판 신주쿠 골든가이라는 곳에 선술집 ‘학교’가 있다. 가게 이름에 걸맞게 첫 주인은 ‘교장 선생님’이라 불리었는데, 바로 내로라하는 시인 구사노 신페이(1903~1988). 20대에 시인의 생계형 술집을 찾았다가 50년 넘게 서빙과 카운터 일을 거쳐 2대 교장이 된 여인은 레이코. ‘2대 교장’인 그녀를 뒤이어 엇비슷한 인연과 경과를 거쳐 ‘3대 교장’이 될 뻔한 여인이 저자인 가나이 마키다.
 
중학생 시절 교과서에 실린 시 한 편이 마음에 훅 파고들었다. 그 시인이 만든 술집이 있다는 말에 호기심을 가진 게 마키의 ‘학교’ 여정의 시작이었다. 수소문해 찾은 술집 ‘학교’엔 초대 교장은 당연히 없다. 대를 이은 일흔여섯살의 마담이 교장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키는 구사노 신페이의 시와 전설에 취하고 후계자인 70대 여교장의 히스토리에 빠져들며 저절로 단골이 된다. 개성 뚜렷하고 저마다 사연을 지닌 오랜 단골들의 면면도 처음엔 무섭더니 점점 매력적이다.
 
어느날 주인이자 교장인 레이코의 입원으로 갑자기 수요 마담 자리를 맡기에 이른다. 마키는 본업인 다큐멘터리 작가의 관찰력으로 술집 ‘학교’에 등교하는 손님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학교’라는 비좁고 어두운, 술병과 라디오와 재떨이와 국어사전이 자연스레 놓인 공간에서 밤마다 펼쳐지는 하룻밤 한정의 인생 드라마. 마키는 그것들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레이코는 매일 가게 문 열기가 점점 버거운 나이. 잔병치레가 많아지자 레이코와 터줏대감 단골들은 술집 ‘학교’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가게를 이어가야 할 텐데…. 명 시인의 전설의 장소가 사라지는 것도 자신들의 아지트를 잃는 것도 아쉽다. 그즈음 레이코 건강은 날로 안 좋아지고, 대주주 레이코와 술 팔아주는 이사 격인 단골들은 싹싹하고 눈치 빠르고 손이 매운 마키를 후계자로 눈독 들이게 되고….
 
그러나 본업이 있는 마키는 끝내 ‘3대 교장’으로 나서길 주저한다. 눈을 떼지 못했던 술집 ‘학교’의 드라마를 직접 목도한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과분했다. 결국 폐업을 결정한 이곳 ‘학교’의 교장과 학생들은 10월 말 폐교 날을 카운트다운하며 하루하루를 아껴가며 마지막 축제를 벌인다. 차마 밖으로는 다 거둘 수 없는 눈물이 몸 속으로 흐른다. 위로와 사랑의 함성과 노래와 대화는 밤마다 학교 창밖으로 퍼진다.
 
시인 구사노 신페이가 밥벌이를 위해 문을 연 술집 ‘학교’는 실제 존재했던 곳이다. 당대의 시인, 작가, 화가 등 유명 또는 무명의 술꾼들이 밤마다 모여 술잔을 주고받으며 노래하고 토론하고 때론 싸움을 벌였다. 손님보다 주인이 술을 더 많이 마셔 언제나 가게 살림이 말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학교’를 찾아드는 쉰 명 가까운 단골들의 직업은 출판 편집자, 그래픽 디자이너, 의사, 교수, 회사원, 건축가, 광고인 등 천차만별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직업과 비교하기 어려운 개성을 가진 흥미로운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남자라는 점과 30년 넘게 ‘비좁고 어두운’ 술집을 떠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퇴근길에 집으로 가는 길을 잠시 잊어버린 듯, 혹은 잊고 싶은 양 단골 술집에 모여든 남자 주당들은 마치 고아처럼 보이며, 그들을 품어주는 단골 술집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보인다.
 
추천의 글을 쓴 소설가 장정일은 이 단골술집을 ‘어머니의 자궁’이라 표현하려다 수정(?)했다. 요즘의 젠더 감수성 때문에 조심스러운 듯했다. 그는 술집 ‘학교’는 ‘장소’로서의 단골 술집이라고 고쳐 말했다. 인간의 사회적, 지리적 토대는 자신이 맺고 있는 밀착도에 따라 경관, 공간, 장소로 구별되는데, 그 속에 내가 속해 있지 않은 ‘경관’과 달리, 그 속에 내가 속하긴 하지만 아직 의미로 맺어지진 않은 ‘공간’과 달리, ‘장소’는 나와 의미로 맺어져 있으면서 나의 기억과 현재, 미래까지 투사되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 장정일은, ‘장소’의 특징이자 장점은 개인이 부여하는 가치들의 안식처이고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중심이라는 점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소는 인간의 원초적 동경 중 하나에 속하는 것 같다.    
 
‘학교’의 교장과 학생들 모두 공감했듯, 술집은 인생의 학교다. 술을 못 마시는 이거나 술꾼이거나 술집은 어른이면 누구나 한 백 번쯤은 모여본 적 있는 장소다. 밥집, 커피집 다음으로 수없이 많이 회합하는 장소 아닌가. 술집엔 술과 주정꾼만 있는 듯하지만, 거기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평범한 사람들 모두의 인생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밥보다 커피보다 더 진솔한 것도 자랑(?)이다. 물론 과유불급이다.
 
책을 덮고 나니 내 인생을 거쳐 간 ‘학교’들이 마구 떠오른다. 스물일곱 수습기를 함께했던 여의도 ‘달빛가족’부터 용산 ‘모서리집’, ‘골목집’, 광화문 피맛골 ‘시인통신’, 인사동 ‘소설’…. 그 많은 곳 교장 선생님들과 학생들 모두와 끝내 함께하지 못했으니, 내겐 장소로서의 단골집은 없는 셈일까. 그 안에 속하되 의미 맺음이 부족했던 것일까.
 
마침 불금. 단골집과 의미 맺어야 하기에,
나는 억지로 술 마시러 간다.     
           
 
본문이미지
<<술집 학교>> 가나이 마키 지음, 안은미 옮김. 정은문고.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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