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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림의 앤티크 스타일 16]겨울밤 찻잔에 담긴 이야기

2018-02-09 17:58

글 : 백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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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털링 이단 티어드 디시(빅토리안)
2 앰버색 샴페인잔(아르누보)
3 골드 오버레이 티잔(빅토리안)
4 스털링 베이스 저그(아르데코)
5 흑단 손잡이의 스털링 티포트와 슈거볼 크림기(아르데코)
긴긴 겨울밤이 이어지는 겨울철 한가운데다. 오후 6시도 채 되기 전에 날씨가 어두워지는 덕분인지 귀가가 일러지고 저녁도 비교적 일찍 먹게 되니 밤 시간 자연스럽게 차 한 잔을 하게 된다. 출근길 따끈한 차 한 잔과 퇴근 후 안락한 집에서 여유롭게 마시는 차는 하루의 시작과 끝에 접하는 일상의 기쁨 중 하나다. 일회용 컵에 마셔도 어색할 것이 없는 커피와 달리, 차는 조금은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예쁜 찻잔에 마셔야 제격인 듯 여겨진다. 이렇듯 우리 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차 문화도 예전에는 호사스러운 의례였다. 차가 유럽에 처음 전해졌을 때는 비싼 수입품이었고, 찻잔 또한 중국산 도자기로 요즈음으로 말하면 IT기술의 산물과 같은 귀한 것이었다.

차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동양의 차 문화는 언제부터 서양에 전해졌을까? 동양의 차 문화는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15세기 후반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전해졌다. 도자기와 함께 전해진 차 문화는 유럽인들에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극동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시 유럽 여러 나라들은 상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고 수질 또한 좋지 않았기에 차 문화의 보급은 상류층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유럽인들이 차를 처음 접했을 때 사용한 잔은 물론 중국으로부터 건너간 것이었다. 그들이 접한 찻잔은 손잡이가 없는 것으로 잔 받침 없이 전해졌다.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최초로 유럽에 전해진 차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고 유럽인들은 다과를 곁들여 차를 마셨다. 티 볼과 함께 접시가 수입되었고, 찻잔과 같은 무늬의 접시를 잔 받침으로 추가해서 사용했다. 도자기의 소유가 부와 권력의 척도인 시대였기에 누군가 찻잔과 같은 무늬의 접시를 볼 밑에 받쳐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유행처럼 퍼져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약으로 인식된 차는 가격 또한 고가여서 소량의 차를 지금의 에스프레소 잔만큼이나 작은 티 볼에 마셨다. 뜨거운 티 볼을 손으로 잡고 먹는 것이 매우 불편했고 이것을 해소하고자 고안해낸 것이 잔 받침에 차를 따라 마시는 것이었다. 이로써 잔 받침 모양도 오목한 형태로 바뀌었고 뜨거운 찻잔을 잡는 부담도 덜 수 있었다.

약이던 차가 음료로 정착한 것은 찰스 2세에게 시집온 포르투갈 공주 캐서린 왕비로부터다. 캐서린 왕비는 결혼 지참금으로 인도 뭄바이와 함께 7척의 배에 설탕과 향신료 그리고 차를 가져왔다. 당시 영국인들은 수질이 나빠 여성이나 남성 모두 아침부터 저녁까지 맥주의 일종인 에일(ale)과 와인을 마셨으며, 늘 술에 취해 지낼 정도였다. 차 애호가인 캐서린은 남편의 바람기로 외로운 심경을 귀족 부인들을 불러 궁정에서 함께 차를 마시는 것으로 달랬다. 여왕의 취미는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취향으로 받아들여져 상류계층 여성들 사이에서 점차 인기를 얻었다. 찰스 2세 이후 제임스 2세가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후 왕위는 네덜란드에 가있던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 부부에게 계승되었다. 새 여왕 메리는 이전에 캐서린이 포르투갈에서 차 마시는 풍습을 들여온 것처럼 네덜란드로부터 차, 자기, 칠기 등 동양적 취미를 가져왔다. 여인들은 둥근 티 테이블에 모여 앉아 당시 크게 유행하던 인도 옥양목 가운을 입고 차를 마셨다. 상류층 티타임은 중산층으로도 이어져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의 차 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중국산 자기로 된 다기 한 벌, 티포트, 은으로 만든 티 캐디, 찻잔, 슈거볼, 밀크포트 등을 갖추는 것이 부와 지위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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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페인잔(아르누보)
2 샴페인잔(빈티지)
3 와인잔(빈티지)
4 이마리 티잔(빅토리안)
5 18세기 티잔(마이센)
6 장미목 손잡이의 퓨표켓 스털링 초콜릿 포트와 크림기 슈거볼(아르데코)
7 레드컬러 받침의 수프볼과 와인잔(아르누보)
8 스털링 오버레이 컴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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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장식한 티잔(빅토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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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고전주의 양식의 티잔
2 나비 손잡이 티잔과 디저트 접시(아르누보)
3 경기 반닫이(조선)
4 브론즈 조각(문신)과 유화(김종학)
5 수프볼(아르누보)
6 화기로 쓴 목기 제기(조선)

차 문화는 중산층 확대라는 사회적 분위기와 동양 문화에 대한 유럽인들의 동경심에 힘입어 빠르게 확산되었다. 1740년경에는 뜨거운 잔을 잡는 부담을 덜기 위해 손잡이를 붙인 잔이 제조되었다. 이제 유럽인들은 찻잔으로 차를 마시게 되었고, 잔 받침에 차를 따라 마시는 모습은 차차 사라졌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두 가지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중 하나는 1748년 본차이나의 개발이었다. 이것은 도자기를 제작할 때 흙에 소 뼛가루를 섞어 가볍고 단단한 도자기를 만드는 독창적인 방법이었다. 이 개발로 영국은 유럽 도자기 산업을 이끄는 강자로 등장했고, 도자기 제조에 있어 오랜 기간 유럽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사건은 같은 해에 있었던 고대 로마도시 폼페이의 발굴이었다. 이로써 유럽인들은 그들 문화의 뿌리가 그리스와 로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고전을 숭상하고 모방하려는 신고전주의가 예술의 각 분야에 나타났다. 이러한 분위기는 찻잔에도 영향을 미쳐 당시 만들어진 찻잔은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아 포도 문양이나 화관 문양을 많이 사용했다. 신고전주의와 함께 중국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시누아즈리에 이어 19세기에 등장한 자포니즘은 금박과 청홍색이 어우러진 일본풍 이마리(伊萬里·도자기로 유명한 일본 규슈의 항구도시) 잔을 유행시켰다. 사치스럽기는 했으나 높은 미적 감각을 지닌 조지 4세는 특히 이마리 패턴 찻잔을 사랑한 왕으로 유명하다. 찻잔에 대한 영국인들의 사랑은 다양한 디저트 접시로도 이어졌다. 베드포드 공작부인 안나 마리아로부터 시작된 애프터눈 티는 차와 함께 내는 다과의 양을 증가시켰다. 19세기 후반에는 애프터눈 티가 더욱 인기를 끌었고, 케이크 접시 수요도 증가했다. 개인의 능력과 성공을 무엇보다 중요시한 빅토리안 시대에는 차를 마시는 사람을 더 배려해서 찻잔의 밖보다 안을 더 세밀하게 장식했다. 빅토리안 시대를 지나 화조 문양이 풍미한 값비싼 수공예 시대인 아르누보 시기 찻잔은 자연미를 더한 꽃과 나비 모양 손잡이가 유행하여 티 테이블을 장식했다.

어린 시절 거실에는 일명 ‘차단스’라고 불리는 그릇장이 있었다. 그릇과 꽃을 좋아하신 어머니는 그 안을 영국산 찻잔 세트와 접시 그리고 도자기 꽃으로 장식하셨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가구 배치와 장식은 영국 빅토리안 시대 인테리어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우리에게 들어온 것이라 생각된다. 어머니는 손님이 오시면 장미꽃 무늬가 새겨진 영국산 찻잔에 맛있는 다과와 함께 홍차를 대접하곤 하셨다. 그런 분위기가 있었기에 딸을 시집보낼 때 찻잔 세트와 디너 세트를 곁들인 도자기 세트는 중요한 혼수 품목이었다. 시집올 때 어머니가 마련해준 찻잔 세트… 그 단어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우리지만 차 한 잔 우려내어 마실 여유는 시간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남녀가 구별 없이 일하는 요즘이지만 예쁜 찻잔을 모으고 그 찻잔에 차를 준비해서 좋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하는 것은 여자로서 큰 기쁨일 수 있다. 깊고 깊은 겨울밤, 창밖의 매서운 겨울 날씨는 차 맛을 더욱 다정하고 아늑하게 만들어주기에 오늘 밤 차 한 잔을 기울여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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