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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07]늦여름

2017-09-03 10:10

글 : 이경석 소설가. 2016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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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인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머리가 띵했고 목울대 부근이 답답했다. 눈꺼풀이 쉬이 열리지 않고 파들파들 떨렸다. 침침했다. 계획보다 출발이 늦어졌다. 규환은 간밤 마신 술을 후회했다. 달뜬 기분 탓에 평소보다 많은 맥주를 들이켰고 늦도록 이미 본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또 봤다. 잠이 든 건 오전 네 시가 넘어서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모처럼의, 가족의 첫 번째 여름휴가가 아닌가.
 
 
규환과 성은은 살림을 합치면서부터 빈손으로 노량진을 떠나게 될 것을 직감했다. 고시촌 밥을 먹은 지 규환은 오 년, 성은은 사 년째 되는 해였다. 서로의 몸에 익숙해질수록 공부엔 진전이 없었다. 마지막 시험에서 낙방한 여름, 둘은 처음으로 노량진수산물도매시장을 찾아 값비싼 생선회를 사 먹고는 짐을 꾸렸다. 그 후 커피전문점과 대형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었고,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개봉동 주택가 골목에 작은 카페를 차린 것이 오 년 전이었다.

카페는 여름 장사가 일 년 매출의 절반을 차지했다. 개업 초기엔 일요일마다 문을 닫았지만 첫 여름을 치르면서 쉬는 날을 없앴다. 하루 매상 생각에 쉬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름마다 휴가를 떠나는 이들을 보며 우리도 한 번쯤 근사한 여름휴가를 갖자고 입버릇처럼 얘길 했지만 늘 말뿐이었다. 차가운 음료를 만들어 파는 동안 여름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철지난 휴가도 요원했다. 여름이 끝나 매상이 떨어지면 당장 대출 이자며 임대료가 발목을 붙들었다. 중고로 마련한 집기는 해마다 한 번씩 속을 썩였다. 커피머신과 에어컨, 냉장고를 차례로 바꾸는 동안 새것을 구입한 것 못지않은 돈이 들었다. 이태 전 지우가 태어나면서 살림살이는 더욱 빠듯해졌다.

올해는 제빙기가 말썽이었다. 불안하다 싶더니만 결국 멈췄고, 수리 기사는 냉각기를 교체하는 데 칠십오만 원을 불렀다. 돈 쓸 일은 꼭 겹쳐 생겼다. 미안하지만 월세를 좀 올려야겠어요, 전화를 받은 것도 제빙기가 멈춘 것과 같은 날이었다. 둘은 해종일 말이 없었고, 성은은 자꾸만 입술을 깨물어 피를 냈다.

-구내염이래. 심하진 않다는데… 어린이집엔 며칠 보내지 말래. 옮을 수 있다고.

지우를 안고 병원에 다녀온 성은이 그날 처음 한 말에 규환은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큭큭큭,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는 걸 성은이 토끼 눈을 하고 지켜보는 동안, 규환은 에이포용지를 꺼내 매직펜으로 글씨를 써 넣고는 그걸 카페 출입문에 붙였다.

「8월 29~31일 여름휴가로 쉽니다.」

-어쩌려고 그래?

-쉬자 좀, 우리도. 어차피 장사하기도 틀렸는데.

-그래도 돼?

-괜찮아. 쉬면서 어떻게 할지 생각도 좀 하고. 고작 삼 일이잖아.
 
 
주말 고속도로는 막혔다. 휴가철도 지났으니 한산할 거란 규환의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늦여름이래도 뙤약볕은 여전했다. 낡은 승용차의 에어컨은 차창을 통해 쏟아지는 태양열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차 안이 답답한 건지, 미열 때문인지 지우는 자주 칭얼댔다. 바닷가에 도착해 숙소를 구해도 충분할 거라 호언장담했던 규환은 펜션 두 곳에 전화를 걸어본 뒤로 마음이 급해졌다. 작은 방은 없나요? 아기랑 셋뿐인데요. 아니오, 오늘 묵어야 하는데요. 성수기도 지났는데 왜 그렇게 비싸죠? 수영장은 있는 거 맞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차가 멈춰 설 때마다 규환은 스마트폰으로 숙소를 검색하고 전화를 걸었다.

-아무 데나 잡아. 민박집도 괜찮아.

-아니야. 수영장은 꼭 있어야지. 너도 펜션 한 번도 못 가봤다며.

-그런데 갈 새가 있었나 뭐.

-그러니까. 우리 첫 휴간데, 좋은 데서 자야지. 바비큐도 해 먹고.

칭얼거리는 지우를 달래느라 휴게소마다 들르다 보니 가는 길은 더 더뎌졌다. 정오를 넘기면서 차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휴게소 주차장에서도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해열제가 맞질 않는 건지, 지우의 열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복작이는 시장 통 같은 휴게소 식당에서 사 먹은 어묵우동과 돈가스는 형편없었다. 맛도 맛이지만, 아이를 건사하며 먹느라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지우는 평소보다 더 뻗댔고 종종 새된 소리를 질러 눈총을 샀다. 성은이 절반은 내뱉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기저귀를 가는 동안 규환은 여전히 펜션을 수소문하느라 부산했다.

기저귀 가방을 두고 온 걸 알아챈 건 휴게소를 빠져 나온 지 이십여 분이 지난 뒤였다. 정신없는 와중에 식당 의자에 두고 나온 게 분명했다. 안절부절못하던 성은은 어떡해, 말끝에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정색하고는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느냐며 지청구를 한 터라 규환은 머쓱해졌다. 엄마가 우는 걸 아는지 지우도 울기 시작했다.

-야… 왜 울고 그래. 기저귀 따로 넣어둔 거 없어?

-없어. 거기 물티슈랑 지우 약이랑 과자랑 다 들어 있는데 이제 어떡해…. 여기선 못 돌아가지?

-고속도로에서 어떻게 돌아가. 괜찮아, 가다가 사면 되지. 근데 휴게소에 기저귀 있을까?

다행인 건지 울다 지친 지우가 잠이 들자 차 안은 적막했다. 볕은 여전히 뜨거웠고, 고속도로 사정은 조금 풀린다 싶어도 시속 사십 킬로미터를 넘지 못했다. 휴대전화 내비게이션 애플리케이션에 찍힌 도착 시간은 두 시간 이십일 분 뒤였다. 괜찮은 척했지만 규환은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몇 시간째 운전을 하다 보니 더 나빠진 것도 같았다.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졸음 쉼터가 어디 있을까, 규환이 라디오 전원을 넣었다.
 
 
…에 따르면 오늘 전국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은 419만대로 추정됩니다. 지난날 평균치인 390만대보다 7.5%가량 높은 수치입니다. 폭염이 이어지면서 늦은 피서를 떠나는 차량이 몰린 것으로 분석됩니다. … 영동고속도로 강릉 방향 자포곡교 인근에서 발생한 차량 화재로 인한 6중 추돌 사고의 여파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주휴게소를 지난 차량이 대부분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가운데 경찰 관계자는 엔진 과열로 인한 화재로 보고 정확한 원인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서울 요금소에서 강릉 IC까지는 약….
 
 
-아, 사고 났구나. 그래서 이렇게 막히는 거였어. 씨발.

-욕하지 마. 애 있는데.

-자잖아. 뭐 어때.

-그래도 하지 마.

-성은아.

-어.

-나 공무원 시험이나 다시 볼까.

-미친 새끼.

-야, 욕하지 말라며!

웃음이 터졌다. 웃은 건 둘 다 오늘 처음이었다. 지우가 깰까 봐 끅끅 숨죽여 웃었다. 그러는 동안 졸음도 달아났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건물 주인이었다. 규환이 반사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게 들렀는데 휴가 가셨구나? 아유 좋겠네, 참 월세 올리는 건 어떻게 생각 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규환이 손을 뻗어 종료 버튼을 눌렀다. 성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끊으면 어떡해?

-몰라, 씨발. 큭큭큭….

-큭큭큭… 욕하지 마, 미친놈아.

-큭큭… 근데 이거 무슨 냄새야? 지우 똥 싼 거 아니야?

-아이 씨… 큭큭큭… 기저귀 없는데, 씨발… 큭큭큭….

둘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고 있었다. 어느새 잠에서 깬 지우가 동그란 눈으로 웃는 엄마를 쳐다봤다. 늦여름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고, 규환과 성은은 계속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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