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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03]

2017-05-14 12:22

글 : 이경석 소설가. 2016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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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J는 식은땀을 훔치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자리가 사나웠다. 아니, 사납다고만 볼 수도 없는 것이, 뜬금없고 망측했으나 싫지만은 않아서 더욱 당혹스러웠다. 꿈속에서 J는 소위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었다. 서른 살 후반쯤 되었을까. 지금의 J보다는 열두어 살 남짓 어려 보였다.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전문직 여성인지 텔레비전 속 패션쇼 무대에서나 봤음 직한 근사한 차림새였다. 양 팔목에는 금빛, 은빛 장신구가 찰랑거렸고 짙은 색 선글라스를 걸친 채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에 앉아 있었다. 마주 앉은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어쩐지 쩔쩔매는 눈치였다. 남자가 돌연 레스토랑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J는 남자 쪽으로 몸을 살짝 틀어 다리를 꼬고 앉아 발끝을 까닥였다. 남자가 떨리는 손을 뻗어 J의 레오퍼드 패턴 하이힐을 벗겨냈다. 그러고는 J의 맨발에 입을 가져다댔다. 발가락을 빨고, 발바닥을 핥았다. 주위가 술렁였다. J는 웃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너른 호텔방이다. 그런 곳은 들여다본 적도 없었지만 꿈속에서는 익숙했다. J가 즐겨 찾는 곳 같았다. J는 알몸에 샤워 가운만 걸친 채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갓 세탁한 침구에서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빳빳한 흰 천의 촉감도 좋았다. 널따란 창문 밖으로는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이런 호사라니, 뱃속 깊숙이 어디선가부터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했다. 달칵, 그때 욕실 문이 열렸다.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벌거벗은 채 걸어 나왔다. 금발에 푸른 눈, 탄탄한 가슴과 배 근육, 그리고 한껏 부푼 남자의 그것을 보는 순간 J는 잠에서 깼다. 더운 기운이 훅, 끼쳐왔다. 창은 닫혀 있었으니, 습하고 뜨거운 건 아무래도 J의 몸 안에서 나온 것 같았다. 옆자리에는 잠든 남편이 코를 골며 누워 있었다. 남편이 J의 몸 위에 올라온 건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2.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어머님, 지금 내신이랑 모의고사 성적 보면요, 지원 가능한 대학이 이 정도 나오거든요? 기가스터디 아시죠? 이게 거기서 만든 프로그램인데 꽤 정확하거든요. 성적 좀 올리고, 상향 지원까지 감안하면 수도권도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고요.
 
―아, 네. 선생님. 저도 가능하면 지방으로는 안 갔으면 하거든요. 하면 잘할 앤데 영 끈기가 없어가지고…….
 
―그런데요, 어머님.
 
―네?
 
―사실은 성적보다 제가 걱정되는 게 따로 있는데요.
 
J는 화가 났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딸의 첫 학부모 진학 상담이었다. 담임교사는 딸이 대학에 진학할 의지가 전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학과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도 없는 공부를 왜 해야 하느냐, 하고 싶은 게 없다, 되고 싶은 것도 없다, 어차피 취직도 안 된다던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 모르겠다……. 아이는 상담 내내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런 말만 반복했다고 했다. 집에서 진로 문제를 놓고 아이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느냐는 교사의 물음에 J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공연스레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연히 해봤죠, 얘가 집에선 안 그랬는데……. 목소리가 떨린 것도 같았다. 차라리 성적이 낮아서, 그래서 원하는 대학에 가기는 어렵겠다는 이야기였다면 기분이 나았을 것도 같았다. 현관문이 열리자, J는 딸이 신발도 벗기 전에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그 앞에 버티고 섰다.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학교를 다니는 거니?
 
엉거주춤 현관에 선 딸이 놀란 눈으로 J를 쳐다봤다.
 
―니 담임이 뭐랬는줄 알아? 내가 아주 창피해서, 넌 어떻게 된 애가 꿈도 없니? 그래갖고 뭐가 되려고 그래?
 
―꿈이 뭔데.
 
―뭐?
 
―그럼 엄마는 꿈이 뭐였는데. 가정주부가 꿈이었어? 현모양처 뭐 이런 거? 꿈이 뭔데. 꿈이 뭐냐고!
 
딸이 다시 문을 열고 나가버린 뒤에도 J는 한참을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 본 건 처음이라 J는 적잖이 당황했다. 엄마는 꿈이 뭐였는데, 앙칼진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에 떠돌았다.
 
―꿈은…… 그런 건 십 대에나…… 이십 대에나 어울리는 거잖아. 당연히 지금은 너무 늦어버린 거…….
 
뒤늦게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말은 당연히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가닿지 않았다.
 
 
3.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
 
봄밤이라지만 아직 바람이 차가웠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얇은 원피스가 그래도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라고 J는 생각했다. 맨 다리 사이로 스치는 바람에 소슬했지만 J는 괘념치 않았다. 머리나 가슴이 뜨거울 때면, 다른 곳에 와닿는 한기쯤은 견딜 수 있는 법이었다.
 
무작정 집을 나선 J는 동네 악기사에 들어가 요 며칠 눈여겨본 통기타 한 대를 샀다. 화려한 장미 넝쿨 문양이 새겨진, 수년 전 어리고 예쁘장한 여자 가수가 들고 나와 화제가 됐다는 기타였다.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일시불로 샀다. 남편의 카드였다. 이제는 내 이름으로 된 신용카드도 한 장 없다는 사실이 새삼 부끄러웠다. 늘 기타를 짊어지고 다녔던 K는 틈이 날 때마다 J에게 기타를 가르쳐주려 애썼다. 재능도 열의도 없어 끝내 코드 하나 제대로 짚지 못했던 J에게, K는 툭하면 그랬다. 둘이 통기타 한 대씩 둘러메고 아프리카에 가자고, 세렝게티를 가로지르며 기타를 연주하면 끝내주지 않겠느냐고. 그럴 때마다 J는 피식 웃었지만 K는 진지했다. K는 늘 그랬다. 남들이 헛된 꿈이라 여기는 걸 희망이라고 불렀다.
 
늦은 밤 인천국제공항은 한산했다. 이미 문을 닫은 항공사 카운터도 왕왕 눈에 띄었다.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도 사실 알 수 없었다. J는 커다란 물음표가 그려진 안내 데스크 앞에 섰다.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사무적인 미소를 띠며 맞았다. 부러 짓는 미소도 저렇게 예쁘구나, 그래도 예쁠 나이구나, J는 생각했다.
 
―저기…… 아프리카에 가려면요.
 
―아프리카 말씀이십니까? 여행지가 아프리카 어디이신가요?
 
―아니, 그게…… 그냥…… 얼마쯤 드는 건지…… 아니…… 사실은요, 그게 진짜로 갈 수는 있는 건지…….
 
―네? 고객님,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잘…….
 
너른 공항 대합실에 앉아 있자니 실내지만 한기가 훅 끼쳐왔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온몸에 스민 차가운 밤공기가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붙들고 싶은 것들은 늘 쉽게 떨어져나가고, 떨쳐내고 싶은 건 지겹도록 들러붙는 법이지. 오늘 밤에는 따뜻한 꿈을 꾸고 싶다고 J는 생각했다.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전화 표시가 여럿이었다.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 것도 한참 전이었다. 이거 뭘 산 거야? 이 시간에 어딜 갔어? 남편은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뭐, 당연한 일이다. 당연한 건 그러니까, 걱정할 일도 아니다. J는 기타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 품에 안았다. 실제로 못 가면 어때? 이런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아? K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공항버스가 다니려면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아직은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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