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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소설 1 - 상담

2017-02-24 15:48

글 : 이경석 소설가. 2016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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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들어온 문과 반대쪽에 또 하나의 문이 보였다. 들어온 문은 파랑, 반대쪽 문은 빨강이었다. 문제가 해결되면 빨강, 그렇지 않으면 다시 파랑 문으로 나가 다음 상담을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남자의 말투는 사무적이었다. 빨간 문 너머에는 뭐가 있죠? 글쎄요. 나가서 뭘 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로맨스라든가. 로맨스요? 농담입니다.
 
건조한 말투로 농담이라고 말하니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당신을 죽일 겁니다, 하고서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장난입니다, 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썰렁했고 한편으로는 서늘했다. 나는 춥지도 않았는데 양팔을 감싸 안고 팔뚝을 문질러댔다. 다시 시작해보죠. 그러니까, 그걸 잃어버린 게 언제쯤이죠? 저기,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거, 그게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푹신한 소파 위에 기대듯 앉아 있었다. 정신이 들었다기보다는, 캄캄한 밤길을 걷다가 느닷없는 돌부리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화들짝 깨어났다. 사실 그 이전에 정신을 잃었는지, 잠이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의 첫 기억은 그랬다. 단정하게 모은 양 무릎 위 역시나 다소곳이 포개진 양손 끝에는 번호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관공서나 은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것, 311번이 내 번호였다. 왜 이곳에 이렇게 앉아 있는 건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소파는 길게 여러 줄 놓여 있었다. 두어 자리 건너 한 명꼴로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또래로 보이는 이도, 위아래로 열 살쯤 차이 나 보이는 이도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것 또한 이상한 노릇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보아하니 다른 여자들도 나와 비슷한 처지인 눈치였다. 그때였다. 딩동, 신호음이 울린 곳을 쳐다보니 그제야 정면 천장 아래 달린 모니터가 보였다. 311번 고객님 5번 상담실로 오십시오. 모니터 아래로는 손잡이가 달린 파란색 문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상담실 1, 상담실 2, 상담실 3……. 영문도 모른 채, 나는 하릴없이 5번 상담실로 향했다.
 
 
10 저는 말이죠, 저를 턴테이블 다루듯 살살, 그렇게 조심스럽게 사랑해주는 뭐 그런 걸 꿈꿨어요. 네, 턴테이블이요. 요새 다시 유행이잖아요. 엘피판 들어본 적 없으세요? 그걸 틀려면 말이죠, 일단 전원을 넣고 알피엠, 분당 회전수를 확인해야 해요. 그다음엔 레코드판에 물을 살짝 뿌린 다음에 융으로 조심조심 잘 닦아서 턴테이블에 살짝, 아주 살짝 올려놔야 하죠. 얼마나 섬세한 작업인지 아시겠어요? 바늘을 올릴 때는 더 신중해야 해요. 원하는 부분을 조금만 놓쳐도 엉뚱한 소리를 듣게 되거든요. 까딱 잘못했다간 바늘이 판에 흠집을 낼 수도 있고요. 이해가 가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저를, 그렇게, 아휴 부끄러워. 별소리를 다 하네요. 네? 당연히 현실은 그렇지 않죠. 곰 같은 남편이랑 살거든요. 그래도 가끔 그런 상상은 하잖아요. 왜 그, 드라마 주인공 같은 남자랑…… 남자들도 그러지 않나요? 참, 그런데요, 한참 그렇게 간질간질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저를 부르는 거예요. 누구 엄마, 이러고요. 완전 깨죠? 늘 그런 식이라니까요. 산통 깨는 거죠 뭐. 아,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7 저기요,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제가 C그룹 부장이거든요. 지주회사 사회공헌 파트에서 근무하는데…… 아시죠? 여자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룹에 여자 부장이 몇 명이나 있을 것 같으세요? 아, 죄송하실 것까지야 없고요, 아무튼 제가 무척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시기거든요. 행사가 코앞이라. 이번에 진행하는 게 꽤 중요한 행사예요. 국회의원이랑 장관도 참석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거죠. 지금 몇 시죠? 회사에서 난리가 났을 텐데……. 아, 이거 혹시 꿈인가요? 맞네, 그런 거죠? 꿈치고는 엄청 생생하네. 와, 아무튼 다행이다. 놀랐잖아요. 유리 천장 깨뜨리고 올라온 저 같은 사람들은요, 남자들보다 훨씬 더 긴장해야 하거든요. 유리 천장 위에 올라섰으니 결국 유리 바닥 아니겠어요? 한순간 와장창, 깨져버릴 수도 있는 거죠. 우습지만 현실이 그래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한참 더 다녀야죠. 시부모님들이야 얼른 때려치우고 집에 들어앉기를 바라죠. 애들이랑 남편 뒷바라지 잘하는 게 돈 버는 거다, 빤하죠 뭐. 아유, 미쳤어요? 저는 일하는 게 좋아요.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만큼 저를 인정해주는 데가 또 없죠. 꿈이요? 글쎄요…… 임원 되는 거? 생각만 해도 좋네요. 네? 아, 그냥 편하게 박부장이라고 부르세요. 네, 박부장이요. 뭐가 잘못됐나요?
 
 
2 블로거들 사이에선 꽤 유명했어요. 책도 몇 권 냈는데, 혹시 모르세요? 민호, 진호 맘이라서 호호맘. 아, 잘 모르시는구나. 잘나갈 땐 하루 방문자만 수천 명씩 됐었다니까요? 인스타그램도 장난 아니었죠. 좋아요랑 댓글이 아주 뭐……. 잡지 같은 데 인터뷰도 많이 했고요. 우리 애들, 아주 난리 났었죠. 애들 옷 협찬도 여러 번 받았어요. 그게 꽤 쏠쏠했죠. 우리 애들이요? 그럼요, 잘생겼죠. 사진 보여드릴까요? 아 맞다, 내 휴대폰, 휴대폰이 어디 있죠? 여기서 보관하고 있나요? 네? 아, 네. 그러니까 그게, 애들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였죠. 사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좀 그랬어요. 사진 좀 찍으려고 하면 슬슬 피하고, 어디 같이 다니는 것도 썩 좋아하지 않는 눈치고요. 글쎄 큰애는 블로그랑 인스타에서 자기 사진 삭제하라고 난리를 피우기도 했다니까요?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래서 뭘 어떻게 해요. 다 시들해졌죠. 인터넷 세상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거품처럼, 쉬이 부풀었다 쉬이 꺼지고……. 아, 죄송해요. 왜 눈물이 나지. 그냥 좀 서운했나 봐요. 애들한테. 그런데요 선생님, 솔직히 이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이제 어쩌죠?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호호맘이라니까요. 호호맘이요, 호호맘. 꽤 유명했는데, 정말 모르세요?
 
 
5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끝내 그걸 찾아내서, 문을 열고 나간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사십 대 중반을 지나면서 깜빡깜빡하는 일이 잦아지긴 했어도 그건 전부 사소한 것들이었다. 사는 데 불편할 정도는 아니어서, 어딘가에 이상이 생겼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남자는, 그건 사실 잃어버렸다기보다는 포기한 것에 가깝다고 했다. 잘못한 건 아니지만 잘한 것도 아니라면서. 인정할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 하나는 자부할 수 있었다. 주어진 내 역할에 충실했다. 아파도, 지쳐도 이를 악물고 넘어선 역경이 숱했다. 포기해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내 탓이라면,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이유 없이 사그라져버리는 것, 그런 게 있다는 걸 인정하기엔 지나온 삶이 애석했다.
 
자신이 가장 빛났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남자는 지난번 상담에서 그렇게 물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 빛났던 순간을 떠올리라고 했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나는 과거를 되짚었다. 오래전 기억들이 때로는 아련하게, 때로는 불을 밝힌 듯 환하게 떠올랐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와 비슷한 자세로 소파에 몸을 기댄 여자들이 보였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입가에 미소를 띤 사람도 보였다. 그들은 어쩌면, 그걸 기억해낸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을 이어갈수록, 역할이나 상호관계를 의미하는 지시어로만 존재했던 세월만 확연해졌다. 사실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 곧 잠에서 깨어나면, 그걸 되찾는 것과는 상관없이 잘 살아갈지도 모른다. 늘 그래왔다.
 
딩동, 신호음이 울렸다. 5번 상담실로 향하면서 양미간이 주름지도록 기억을 쥐어짰지만 소용없었다. 불현듯 기억이 떠오른다면, 남자에게 또박또박 말해주고 싶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가뭇없이 사라져버린 내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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