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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그 후

2019-05-01 09:07

취재 : 장가현 기자  |  사진(제공) : 조지철, 셔터스톡, 이은혜, 정지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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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2년생 김지영>(이하 ‘김지영’)이 세상에 나왔다. <김지영>은 우리나라에서 100만 부가 넘게 팔린 화제의 책이 됐고, 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김지영>이 이렇게 인기를 얻은 이유는 많은 여성의 공감을 샀기 때문이다. 딸, 아내, 며느리, 엄마로 버거운 삶을 산 김지영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책이 나오고 3년이 지난 지금 30대 주부들의 삶은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성조선>은 창간 35주년을 맞아 같은 해에 태어난 1985년생, 35살 주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가 1982년생 여자아이 이름 중 가장 많은 ‘지영’을 소설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듯 1985년생 여성에게는 ‘김지혜’라는 이름을 붙였다. 85년생 김지혜는 여전히 김지영같이 살고 있는지, 김지영에 공감한 내용을 물었다. 저마다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지혜 씨들’ 이야기도 들었다. <김지영>을 계기로 가정에 변화를 불어넣은 ‘지영 씨’가, 동생 ‘지혜 씨’에게 주는 조언도 담았다.
주부 100명 중 92명 ‘나도 김지영이다’
<82년생 김지영>(이하 ‘김지영’)이 나온 지 3년이 됐다. <김지영>은 그사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주부, 나아가 여성이 겪는 일상의 고충이 드러났다. 여성문제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주부들은 이 책을 어떻게 봤을까. 사회가 ‘김지영’으로 시끄러운 동안 주부들에게도 변화가 생겼을까. 30대 주부 50명에게 물었다. 설문조사협조 이지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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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는 4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간 진행했다. 이지데이 누리집에서 20명, 오프라인 설문조사에서 30명, 총 50명이 답했다. 모두 30대 기혼여성이다. 이들 중 55%는 워킹맘이고, 45%는 전업주부다.

자녀 수는 1명이 65%로 가장 많고, 없음이 25%, 2명이 5%, 5명 이상이 5%를 차지했다. 아이가 있는 주부들에게 자녀의 연령대를 물었다. 생후 24개월 미만 52%, 어린이집, 유치원생이 28%, 초등학생 14%, 중·고등학생 4% 순이었다.

설문조사에 응한 주부 대부분이 <김지영>에 공감했다. ‘책을 읽고 김지영이 겪은 일에 공감한 부분이 있다’는 질문에 92%가 ‘그렇다’고 답했다. 대부분 소설 속 이야기를 소설이 아닌 현실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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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로 살기 힘들다 85%

소설 속 김지영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고된 하루하루를 보낸다. 응답자들도 김지영처럼 주부로 살기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나도 김지영처럼 주부로 살기 힘들다’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가 절반(50%)을 차지했다. 그다음이 그렇다(35%), 보통이다(10%), 매우 그렇지 않다(5%), 그렇지 않다(0%) 순이다. ‘매우 그렇다’와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을 합하면 85%의 응답자가 주부의 삶을 힘들다고 느끼고 있다.

주부들이 힘들다고 느끼는 지점을 묻는 질문에는 ‘집안일 등 일과 육아의 병행’(40%)이라는 답이 가장 많다. 다음으로 ‘집안 등 가정 대소사를 챙기는 것’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30%였다. ‘육아나 아이 교육문제’는 15%, ‘주부에게 차가운 사회의 시선’이 5%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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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여전히 가정에 소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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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들이 힘들다고 느끼는 일과 소설 속 이야기에 공감한 내용은 서로 이어진다. 많은 주부들이 가정의 대소사를 챙기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소설 속에서 시댁문제나 집안문제에 소극적인 남편의 태도에 ‘공감한다’고 답한 사람이 43%였다. 답변 내용을 보면 주부의 절반 정도가 집안 대소사를 남편 도움 없이 혼자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다음으로 공감한 내용은 ‘출산 후 경력단절’(34%)이다. 김지영은 출산을 앞두고 직장을 그만둔다.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다. 그 뒤를 이어 ‘주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9%), ‘없다’(8%), ‘부부에 훈수를 두는 어른들’(6%)이다.

그렇다면 책이 출간되고 3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김지영에 공감하는 주부들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는지 물었다. 먼저 ‘가정에서는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한 주부가 80%, ‘그렇다’고 답한 주부가 20%였다. 결과적으로 ‘김지영’의 영향력은 아직 가정에 미치지 못했다. 사회에서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 주부는 60%, 변화를 느낀 주부는 40%였다. 소설이 일으킨 바람은 거셌지만 아직 주부들이 체감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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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는 출산 후 계속 일할 수 있었으면

주부들이 변화를 느낀다고 생각한 부분은 어떤 것인지 물었다. ‘없다’는 의견이 50%로 가장 많다. ‘없다’를 제외한 의견 중 ‘육아 등 가사노동에 대한 인식’(20%), ‘남편 등 가족의 이해’(10%), ‘양육수당, 육아휴직 등 정책’(10%), ‘‘맘충’ 등 주부를 보는 부정적 시선’과 ‘기혼여성에 대한 직장의 배려’는 각각 5%를 차지했다. 주부들은 가장 필요한 변화로 남편 등 가족의 태도를 꼽았다. 이 지문을 선택한 응답자는 36%다. ‘육아나 가사노동에 대한 인정’은 24%, ‘기혼여성에 대한 직장의 배려’는 14%, ‘‘맘충’ 등 주부를 보는 부정적 시선’ 13%, ‘없다’는 7%, ‘양육수당, 육아휴직 등 정책’은 6%가 선택했다.

소설 출간 후 3년이 지난 지금 변화를 느끼지 못했지만 응답자 모두 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뭔가 달라지길 희망했다. 아이가 결혼할 때쯤 가장 달라지길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응답자의 45%가 ‘출산 후 아이 걱정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꼽았다. ‘가사 노동을 가족이 함께하는 분위기’는 30%, ‘‘맘충’ 등 주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15%를 차지했다. ‘기혼여성에 대한 직장의 배려와 아이를 키우기 좋은 정부정책의 확대’가 5%로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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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주부들이 <82년생 김지영>에서
가장 공감한 내용은?
<82년생 김지영>(이하 ‘김지영’)을 읽은 독자들의 주된 반응은 “자서전을 읽는 듯했다”다. 교보문고 통계에 따르면 <김지영>을 읽은 독자는 대부분 20~30대 여성이다. 그중 30대 주부가 가장 많이 공감한 내용은 김지영의 결혼생활이다. 30대 주부들은 어떤 부분에서 공감했을까?

p. 232 “얘가 그냥 나이만 먹었지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내가 일을 쌓아두지 못하는 성격이라 먼저 해치워 그렇다, 애들이 집안일해볼 기회가 없었다, 굶지 않으려면 밥은 해 먹지 않겠느냐, 변명 같은 농담을 늘어놓았다. 양가 상견례 자리에서 김지영의 어머니가 사돈에게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정대현의 어머니가 한두 번밖에 본 적 없는 김지영을 칭찬하자 김지영의 어머니는 김지영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닉네임 ‘풍뎅이’는 “상견례를 하는 풍경은 다 비슷한 것 같다”며 “우리 엄마는 내가 고생할까 봐 나를 낮추고 시어머니는 잘할 거라고 부담을 준다”고 했다. “나도 김지영처럼 잘할 자신이 없는데 시어머니가 그렇게 말하니 집안일은 무조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다”고 의견을 남겼다. 닉네임 ‘사우나’는 “때마침 상견례 갔다가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책을 읽는다”고 썼다. 그는 “남동생이 먼저 결혼했는데 남동생의 상견례와 분위기가 다르다”며 “왜 남동생에 대해 말할 때는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말만 하면서 내가 상견례를 할 때는 뭐든 못한다, 할 줄 모른다고 깎아내렸는지 엄마에게 서운했다”며 소감을 밝혔다.

p. 134 “사돈어른,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릴게요. 그 집만 가족인가요? 저희도 가족이에요. 저희 집 삼 남매도 명절 아니면 다 같이 얼굴 볼 시간 없어요. 요즘 젊은 애들 사는 게 다 그렇죠. 그 댁 따님이 집에 오면, 저희 딸은 저희 집으로 보내주셔야죠.” 추석에 부산에 있는 시댁에 간 김지영은 시누이 가족을 맞이한다. 시누이가 “뭐하러 고생하면서 음식을 해. 앞으로는 사”라고 말하자 시어머니가 김지영을 보며 “자기 가족 먹이려고 음식하는 게 뭐가 고생이야? 얘, 너 힘들었니?” 하고 묻는다. 아픈 김지영이 순간 친정엄마로 빙의해 말한다.
닉네임 ‘꿈꾸는 여자’는 “울컥했다. 내 주변은 거의 결혼한 사람이라 명절 이야기를 많이 한다. 요즘 시댁에서 며느리를 친정에 빨리 보내주는 분도 많지만 며느리는 둘째 치고 아들, 손자들과 더 있고 싶어 내심 더 있다 가길 바란다. 명절은 가족이 모이는 즐거운 시간이다. 아들은 부모님을 뵙고 딸은 부모님 뵈러 가면 안 되는 걸까?”라고 의견을 남겼다. 닉네임 ‘’은 “종갓집 장손에게 시집을 왔다”며 “명절에 친정에 가는 건 꿈도 못 꾼다”고 했다. 그는 “시댁에 손님이 정말 많이 오는데 허리 한 번 펼 시간이 없다”며 “아이 고모는 차례 지내고 친정에 잘만 오는데 왜 나는 우리 엄마 얼굴도 못 보냐”고 댓글을 달았다

p. 247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말해?” 출산을 앞둔 김지영이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자 남편 정대현은 “내가 많이 도울게”라는 말로 아내를 위로한다. 김지영은 남편의 말이 진심인 걸 알지만 돕는다는 말에 날카롭게 반응한다.
닉네임 ‘온유맘’은 “남편이 도와준다는 말에 나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줄 알았는데 김지영도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나만의 아이, 나만의 가정도 아닌데 나는 왜 일하고 와서 애들 돌보고 집안일하는 게 당연하고 남편은 도와주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딸도 자라면 나와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며 “나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위로도 된다”고 남겼다. 닉네임 ‘파란하늘’은 “우리나라 웬만한 주부는 다 외치고 싶은 말이라 생각한다”며 “1년 365일 설거지, 빨래, 청소, 밥하는 나는 당연하고 신랑은 한 달에 한두 번 설거지하면서 으스대는 걸 보면 말문이 막힌다”고 썼다.

p. 247 결국 부부 중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그 한 사람은 당연히 김지영 씨였다. 정대현 씨의 직장이 더 안정적이고 수입이 많기도 하고, 그런 모든 이유를 떠나 남편이 일하고 아내가 아이를 키우며 살림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앞 내용과 마찬가지로 출산을 앞둔 김지영이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과정을 쓴 부분이다. 이 부분은 출산으로 경력단절을 경험한 주부들이 많이 공감했다.
닉네임 ‘84년생 김지영’은 “남편이 일하고 아내가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란 말이 이해되는 것도 씁쓸하다”며 “ 왜 아빠는 양복 입고 회사에 가고 엄마는 집에서 앞치마를 입고 일하는 이미지로 고착되어버린 걸까”라고 기술했다. 그는 “아이가 생기고 직장을 그만둘 때 나도 저렇게 생각했다”며 “다른 대안이 있었으면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을 텐데”라고 의견을 남겼다. 닉네임 ‘닭띠맘’은 “김지영이랑 다르게 난 워킹맘이지만 출산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게 당연한 절차인 줄 알았다”고 썼다. “나조차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걸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며 “책을 보고 여성은 왜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게 당연해졌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적었다.

p. 268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 잔 마실 자격도 없어?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김지영이 딸을 데리고 공원에 갔다가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라는 소리를 듣고 남편에게 하는 이야기다.
닉네임 ‘어피치피치’는 “이 부분은 정말 많은 사람이 읽어봤으면 한다”며 “문제를 일으키는 엄마도 있지만 대부분의 엄마가 그러는 건 아니다”라고 썼다. 그는 “맘충이란 소리는 안 하지만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들을 보고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며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지도 않고 상처받는 말을 하는 건 정말 아닌 것 같다”고 댓글을 달았다. 닉네임 ‘보송보송’은 “왜 맘충이란 단어를 쓴 사람이 특별이 못됐거나 생각이 없어서가 아닐 거다”며 “육아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 사회가 너무 모르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 의견을 남겼다.
 
 

85년생 김지혜 씨, 당신은 어떤가요?
2016년을 사는 김지영 씨 현실은 유쾌하지 않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35살인 85년생 주부들의 삶은 어떨까. 딩크족을 선택한 주부, 워킹맘, 전업주부 세 사람의 결혼 생활을 들여다본다.
 
 
딩크족 이은혜 씨
“남편은 안사람, 나는 바깥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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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맞벌이였다. 결혼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 남편에게 문제가 생겼다.

“자고 있는데 갑자기 호흡곤란이 왔어요. 숨넘어가는 소리로 제 팔을 흔드는데 깜짝 놀랐죠. 병원에 가니 공황장애라고 하더라고요. 연예인이나 그런 병이 생기는 줄 알았는데 남편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남편은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에 근무했다. 연봉이 높은 대신 밤낮없이 일했다. 모르는 사이 남편의 마음이 병들어가고 있었다. 병을 진단 받고 남편은 회사를 그만뒀다. 그 뒤로 은혜 씨는 가장이 됐다. 수입이 줄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부부는 고민 끝에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결혼할 때 막연히 아이를 낳겠거니 했어요. 그전에 남편이랑 진지하게 의논한 적은 없어요. 저는 일이 정말 재미있고 오랫동안 하고 싶은데 아이가 생기면 현실적으로 힘들잖아요. 그래서 남편이랑 아이 문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걸 피한 것 같아요.”

물론 시어른들 반대가 만만찮았다. 경상도 어르신들은 대가 끊기는 걸 두고 볼 수 없는지 당신 아들은 두고 며느리에게 전화해 언짢은 소리를 했다. 결국 남편이 나서서 어른들 생각을 돌렸다. 일할 생각도,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한바탕 소동을 뒤로하고 남편은 집안일을 시작했다. 집안에서 유일한 아들로 자란 남편은 집안일에 서툴렀다. 설거지는 음식물 쓰레기까지 비우는 건 줄 몰랐고, 빨래는 탁탁 털어서 널어야 주름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다. 이런 것도 모르나 싶었지만 인내심을 가졌다. 남편이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러워서였다. 좀 기다리니 갈수록 실력이 늘었다.

은혜 씨만 노력한 것은 아니다. 같은 업계 종사자이던 남편은 은혜 씨 업무를 살뜰히 도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같이 일했다. 남편이 도와주니 어려운 업무도 빨리 익힐 수 있었다. 일의 능률만 오른 것이 아니라 기분도 남달랐다. 둘이 함께 공부하니 연애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시 연애하는 기분이 과히 싫지 않았다.

“남편이 도와준 덕에 지난번 인사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어요. 결과가 좋으니까 남편이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자기를 내조의 왕이라 부르래요. 남편이 일을 그만뒀을 때는 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둘 다 행복해졌어요. 서로 휴대폰에 저장한 이름도 바꿨어요. 저는 남편을 ‘안사람’, 남편은 저를 ‘바깥사람’으로. 앞으로 우리 사이에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처음 그랬던 것처럼 둘이 노력하면 사이좋게 늙을 것 같아요.”
 

워킹맘 정지윤 씨
“나를 위한 소소한 행복을 찾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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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기 전까지 정규직으로 일했다. 아이가 생기자 풀타임으로 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예고 없이 아프고 다친다. 전염병에라도 걸리면 꼼짝없이 엄마가 옆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대신 봐줄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가까이 사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람은 지윤 씨뿐. 남편 직장은 육아휴직을 장려하지 않는다. 고민 끝에 지윤 씨가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로 했다. 파트타임 근무자는 2년 계약직이다.

“파트타임으로 옮겨서 아쉽지 않냐고요? 저는 만족해요. 아이들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딱 4시간만 일해요. 아이들도 돌보고 일도 할 수 있어서 좋지만 2년이면 끝나는 게 아쉽죠.”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엄마라서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부분은 여전히 있다. 남편도 그걸 알기 때문에 지윤 씨에게 집안일을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러면 지윤 씨는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참여하는 거”라고 고쳐준다. 그런데 남편도 마음처럼 되지 않나 보다. 집안일에 참여하라고 말해도 그때뿐이다. 결국 시간이 더 많은 지윤 씨가 집안일도, 육아도 더 하고 있다.

이런 현실이 답답하지만 지윤 씨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여유를 찾고 있다. 아이들 등원시킨 다음 출근할 때까지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엄마들은 안다.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혼자 카페도 가고, 책도 읽는다. 결혼 전에는 일상이던 일이 소중한 줄을 그땐 몰랐다.

“한 달에 한두 번 휴가를 낼 수 있어요. 그때는 저만을 위한 시간을 많이 보내요. 정말 열심히 살거든요. 그 시간을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카페에 가거나 독서만 했는데 이제 운동도 시작해볼까 해요. 무슨 운동을 할지 정하진 않았지만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하니 괜히 설레요.”
 

전업주부 김유진 씨
“외국인 시어머니와 갈등 해결? 대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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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씨는 요즘 인터넷 강의로 웹 개발을 배우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여유가 생긴 덕분이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아닌 학생이 된다.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 홈페이지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배운 내용을 토대로 남편 회사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었다. 지금도 꾸준히 업데이트하거나 보수 작업을 한다. 한번 공부를 시작하니 욕심이 생겨서 지금은 웹 개발을 배우는 중이다.

아이가 학교에 가기 전에도 여유 있는 편이었다. 근처에 사는 시부모님이 시간 여유가 있어 매주 1~2회씩 아이를 돌봐줬다. 손녀를 끔찍이 생각하는 시어른들은 아이를 데리러 직접 학교에 가서 아이를 만나 데이트를 즐긴다. 남편은 뭐하냐고? 사업체를 2개 운영하는 남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집에 있는 시간이 짧다. 하지만 가정적인 사람이라 틈날 때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 한다.

“남편은 미국인이에요. 미국은 패밀리십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지 일반적인 한국인보다 좀 더 다정한 것 같아요. 시부모님도 그렇고요. 전업주부이지만 독박육아로 스트레스를 받진 않아요. 온 가족이 서로에게 충분히 배려하고 애정을 쏟고 있어서 크게 불만은 없어요.”

갈등이 없는 건 아니다. 한국인과 미국인 간 문화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피할 순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 한국은 단 음식을 권장하는 문화가 아닌데 미국은 단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유진 씨 시어머니도 그렇다. 아이에게 자꾸 단 걸 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처음에는 듣지 않았다. 아이 건강과 직결된 문제라 유진 씨도 물러설 수 없었다. 왜 단 것을 아이에게 주면 안 되는지 몇 번을 설명했다. 다행히 시어머니가 유진 씨 의견을 받아들여 이제 아이에게 단 음식을 주지 않는다.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사이에 왜 마찰이 없겠어요. 그걸 어떻게 푸느냐가 관건이죠. 저는 우리 가족이 외국인이라 더 깨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함께 살려면 갈등을 풀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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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성경 씨, 아이린 씨, 은주씨

85년생 지혜에게 전하는 지영 언니의 현실 조언
“내 남자 하나 바꾸지 못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
‘김지영’ 때문에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뭔가 바뀌는 것 같지만 여전히 힘들다. 우리 집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집을 바꾸고 싶다면 이 언니들 이야기를 들어보자. <82년생 김지영>을 계기로 ‘나부터 변하겠다’고 마음먹고 가정의 변화를 이끈 엄마 모임 ‘부너미’다.

결혼하면 여성은 ‘을’이 된다. 결혼 전 세상 누구보다 당당하던 나라는 사람은 사라지고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만 남는다. 시어머니한테 전화를 자주 안 해도 죄인, 남편 아침밥을 안 챙겨도 죄인, 아이가 아파도 죄인이다. 가족에게 일어난 소소한 일의 화살이 다 주부에게 돌아오니 김지영도 병이 났다.

소설은 김지영이 정신의학과에 다니는 걸로 끝난다. 이후에는 어떻게 됐을까. 엄마 페미니스트 ‘부너미’는 소설이 전하는 문제의식을 주부 스스로 바꿔보려고 만든 모임이다. 사회가 바뀌길 기다리는 것보다 주부가 주도적으로 가정을 바꾸자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가정을 바꾼 그간의 경험을 담아 <페미니스트도 결혼을 하나요?>란 책도 냈다. 책에는 부너미 회원들이 가정을 바꾸는 고군분투기가 담겼다.

“<82년생 김지영>은 사회에 문제를 던지는 걸로 역할을 다했어요. 책이 나온 후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잖아요. 하지만 사회가 바뀌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우리가 원하는 건 남편, 양가 어른, 아이의 변화인데. 내 삶이 바뀌려면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이 바뀌어야죠. 그래서 정치나 사회를 바꾸기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바꿔보자고 한 거예요.”
 

어머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획기적인 노하우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말’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시어른에게 매일 전화하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고, 남편에게 쓰레기는 직접 치우라고 말한다. 물론 한 번에 고쳐지는 사람은 없다. 꾸준하게, 어쩌면 지칠 때까지 해야 한다. 부너미 회원 은주 씨는 그 과정이 육아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아이가 스스로 밥 먹는 과정을 생각해봐요. 스스로 먹으라고 숟가락을 쥐어주면 바로 쥐는 애는 없어요.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음식은 다 흘리고. 그 과정을 반복하다 두세 달만 지나면 아이가 알아서 밥을 먹어요. 이걸 못 견디면 계속 밥을 먹여야 하잖아요. 시댁이나 남편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똑같아요. 계속 꾸준히 반복해야 겨우 듣기 시작해요.”

아이린 씨가 경험담을 풀어놨다. 아이린 씨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안부전화를 자주 하길 바랐다. 당신 아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다. 아이린 씨는 시어머니의 바람처럼 자주 전화하고 싶지 않았다. 불편했다. 그도 처음에는 대부분의 며느리처럼 참고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 행동하지 않으면 시어머니는 내가 전화하는 걸 불편해한다는 걸 영영 알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서 어느 순간 시어머니란 글자가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로 남으면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전화가 오면 부재중 전화를 쌓아뒀다. 일 년 정도 지나면 안 하겠지 싶었다. 반응은 어땠냐고? 좋을 리 있겠는가. 명절에 만난 시어머니는 “전화가 효도야. 누구 집 며느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한다더라” 하며 은근히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그럴 때마다 아이린 씨는 “어머니, 전화는 남편이 해야죠” 하고 답했다.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저렇게까지 어른 심기를 거슬러도 되나 싶다. 실제로 아이린 씨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엄청난 악플을 받기도 했다. 아직 사회가 본인의 의사를 분명히 하는 며느리를 수용하기엔 버거운 걸까. 그 정도로 꾸준히 뜻을 전달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성경 씨가 여기에 희망적인 말을 보탰다.

“젊은 주부들도 시어른이나 남편과의 관계가 개선되길 바라면서 상대방에게 말하지 않아요.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꺼내면 걱정하던 것보다 괜찮아요. 심지어 시어른들도요. 요즘 <아궁이> <황금알> 같은 프로그램에서 어른들의 부당한 요구를 꼬집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학습이 돼서인지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아요. 주변을 바꾸는 건 의외로 쉬울 수 있어요.”
 

가부장제에서 벗어나면 가족 모두 행복해진다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주부 스스로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희생하는 엄마이길 거부하지만 가부장제의 틀을 깨려고 하지는 않는다. 늘 그래왔다는 분위기가 주부를 스스로 을로 만든다. 이 틀을 깨고 가족과 대화를 시작하면 주부만 행복한 게 아니라 가족 모두가 행복해진다.

“가부장제 틀에 갇혀 있을 때만 해도 남편을 내조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어요. 나는 독박육아 때문에 힘들어도 참아야 한다고. 그게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길인 줄 알았죠. 그런데 남편도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요. 서로 부담만 잔뜩 지고 있는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가둔 틀을 내려놓으니 이전에는 별개이던 남편의 짐이 보이더라고요. 남편에게 당신도 일이 힘들면 쉴 수 있어. 대신 당신이 힘들기 전에 나도 내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배려해달라고 했어요. 아이들 키우려면 누군가는 벌어야 하니까요. 지금은 남편도 저도 서로 대체 가능한 인력이 되려고 노력해요. 남편은 집안일을, 저는 경제활동 능력을 키우고 있어요. 아이 교육에도 좋아요. 청소기는 엄마가 돌려야 한다더니 요즘은 아빠를 불러요. 아들이 달라진 걸 보면 말하기 잘했구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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