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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깍이로 승부수 던진 당찬 여성들

설특집 인생은 마흔부터

2018-02-15 10:05

기획 : 여성조선 취재팀  |  사진(제공) : 이종수,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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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에는 잠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시기가 있다. 행복한 만큼이나 블랙홀처럼 강력한 출산과 육아의 시간이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도전에 목마른 시기가 오면 비로소 나이를 실감한다. 하지만 인생에 늦은 때란 없지 않을까. 진부하긴 해도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은 때이니까. 사람들이 이미 늦었다고 말할 때 팔을 걷어붙인 여성들을 만났다. 그녀들의 도전기와 성취기에 귀 기울여보자.
“젊게 살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어.”
-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들>

“인생은 마흔부터다. 나는 마흔 살에 천식이 있는 아들을 위해 만들기 시작한 빵으로 미국 전역에 지점을 둔 유기농 제과점 ‘페퍼리지팜’의 주인이 되었다.”
- 제과 브랜드 ‘페퍼리지팜’ 창업자 마거릿 루드킨

“마흔이라는 나이는 결코 짐을 쌀 나이가 아니다. 나는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컨트리뮤직 가수로 빛을 보기 시작했다.”
- 미국 싱어송라이터 K. T. 오슬린

“마음속으로 옳은 일을 한다고 확신한다면 그 순간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41세 미망인이던 그때가 내 노동운동의 위대한 초석이 되었다.”
- 미국 노동운동가 마더 존스

“새로운 꿈을 꾸거나 또 다른 목표를 정하는 데 늦은 나이란 없다.”
-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 S. 루이스

“스무 살이건 여든 살이건 배우기를 멈춘 사람은 늙은 사람이다. 계속해서 배우려는 사람이라면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 ‘포드자동차’ 창립자 헨리 포드

“마흔이라는 나이가 신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반드시 인생의 챔피언이 될 수 있다. 그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만류하던 45세 나이에 다시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 미국 권투선수 조지 포먼
 
 

 
교사 그만두고 영화감독 된 신수원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니까

10년 넘게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영화감독이 됐다. 나이 서른 여덟에 사표를 내고 나오며 그녀가 외친 말, “Don’t look back!(뒤돌아보지 말자!)”

취재 황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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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정적인 직업이라 꼽히는 교사를 그만두고 가장 불안정한 직업으로 꼽히는 영화감독의 길로 들어선 사람. 신수원(51)은 칸 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를 석권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감독이다. 영화 <마돈나> <명왕성> <레인보우> <순환선> 등으로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거머쥐었고, 배우 문근영과 함께 작업한 <유리정원>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교사로 일하던 30대 중반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들어갔어요. 학교생활 한 지 7년 정도 됐을 무렵, 그만두고 전업 소설가가 될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학기 중에는 바빠서 아무것도 못 하니 방학을 이용해 글을 썼거든요. 경제적인 문제가 걸려 학교를 당장 그만두지는 못 하고, 휴직을 하고 문예창작과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한예종 영화과에 광고가 뜬 걸 봤죠. 글을 쓸 수 있는 시나리오 전공도 있고, 국공립이라 다른 대학원보다 등록금도 쌌어요. 매체는 다르지만 창작하는 곳이라 저기다 싶었죠.

어릴 때 꿈이 화가였다고요. 교직에 있는 동안 청소년 소설도 출간했고요. 창작하는 일에 늘 목이 말랐나 봅니다. 초등학교 때는 컷 만화를 그려서 친구들한테 돌리고 그랬어요. 화가가 되고 싶어 미술학원에 갔는데 집안 형편 때문에 딱 한 달 다니고 못 다녔죠. 그림 그리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는, 가족들의 협박 아닌 협박에 점차 현실적으로 변했던 것 같아요. 점수 맞춰서 전공 선택하고 교사 발령을 받았죠. 천직은 아니어도 재미있었어요. 아이들한테 세계사를 어떻게 하면 쉽게 가르칠 수 있을까 싶어 교재를 만화로 그리고, 컴퓨터가 보급된 후에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도 했죠. 다른 학교 선생님들도 제가 만든 교재를 쓰고 그랬어요. 창조적인 작업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영상원에 들어가보니 소설보다 영화가 더 재미있던가요? 당시에는 시나리오도 쓰고 16㎜ 촬영까지 다 해야 했어요. 영화라는 매체가 매력적이더라고요. 비주얼로 보여주는 방식이니까 어릴 때 도화지에 색칠하던 것처럼 스크린에 무언가를 그리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 같아요. 영상원 졸업하고 결국 사표를 냈죠. 마흔이 넘었다면 못 했을 것 같아요. 용기도 있었고 무모함도 있었죠. 그때는 지금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았으니까요. 부자도 아니고 물려받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조금 덜 먹고 덜 쓰면서 배고프게 살자 그랬죠.

아내이자 엄마이기 때문에 내 길을 가는 게 더 어려웠을 것 같아요. 사실 겁이 나서 바로 사표를 내지 못하고 복직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영화를 찍겠다고 월급의 일부를 모으고 있더라고요. 결국 그걸로 단편을 찍었어요. 아! 나는 영화를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죠. 가족들한테 돈을 벌어다주지는 못해도 빚을 지진 않겠다고 했어요. 영화 찍는 동안은 마이너스 통장이 있기도 했는데 나중에 상금 받으니까 또 메워지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가족들한테 미안한 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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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유리정원>이 선정됐다. 기자회견장에서 강수연 집행위원장 및 배우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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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문근영 배우와 함께 작업했던 영화 <유리정원> 촬영 현장에서. (오른쪽)제65회 칸국제영화제에 영화 <순환선>으로 비평가 주간에 초청받아 카날플러스상을 수상했다.

어릴 때 일찌감치 영화를 시작하는 사람도 많은데 나이가 걸림돌이되진 않았나요? 동기들이 대부분 저보다 어렸어요. 1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친구도 있으니까요. 두려웠죠. 영화판에 가니까 정말 일이 안 들어오더라고요. 여자에다 나이도 많으니까 감독으로는 물론이고 작가로도 안 써줬어요. 20대 중반 여성들한테 많이 밀려났죠. ‘여자 감독 사십 넘으면 아무도 안 써줘’라는 얘기도 들었어요. 젊은 사람들 볼 때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패배감, 자괴감도 생기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 탓만은 아닌데 주눅이 들곤 했죠.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제가 선택한 건데 어떡해요. 사람들은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 편견 때문에 내가 죽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숨을 쉬어야 하니까, 도 닦는 기분으로 견디는 거죠.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두세 배는 더 노력했어요.

그럼에도 그전에 10년간 다른 일을 한 것이 도움이 됐을 것 같아요. 물론 처음부터 영화판에 들어와서 잘 찍는 시네키드 같은 친구들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다른 삶을 살다 왔잖아요. 아무래도 10년간 선생을 하면서 만난 아이들, 사람들, 느낀 것들이 영화 속 어딘가에 배어 있지 않을까요. 영화는 사람 이야기니까요.

영화 일을 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어요. 잘 선택했다고 생각하나요? 주변에 아파트 평수 늘려가며 풍족하게 사는 친구들 보면 부러울 때도 있죠. 분명 사표 내고 후회한 순간들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잊어버렸어요. 의식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죠. 사표 내고 학교를 나서면서 운동장을 배경으로 셀카 하나를 찍었거든요. “Don’t look back!(뒤돌아보지 말자!)” 하고 혼자 결심했던 기억이 나요. 그 셀카 어디 있나 몰라요.(웃음)

남들이 늦었다고 말하는 나이에 도전해서 목표한 바를 성취한 인물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더니 ‘내가 성취했나’라고 반문했어요. 제 첫 장편영화 <레인보우>에 그런 대사가 있어요. 아들이 엄마한테 “루저는 뭐야?” “위너는 뭐야?” 묻다가 “그럼 엄마는?” 그래요. “엄마는 행인. 걸어가는 사람이야”라고 답하거든요. 영화는 올해 찍을 수 있을지 내년에 또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지 내일을 알 수가 없어요. 영화제 가서 상 받고 그 정도 했으면 괜찮지 않느냐고 하는 분도 있는데 저한테 중요한 건 이 일을 계속하는 거예요. 성취라는 말이 낯설죠. 저한테 성취는 영화를 죽을 때까지 계속 찍는 거니까요.

하고 싶은 일을 마음속에 품고만 있는 분들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면요. 항상 이기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내 삶은 내가 없으면 끝나잖아요.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레인보우>를 찍기 전까지 큰 결심이 필요했어요. 어떤 감독님이 “당신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누군가의 허락을 기다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이 말을 저 자신에게 주입시켰어요.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니까요.
 
 
 

 
‘한국의 파브르’ 곤충학 박사 정부희
내 운명이었으니까

어느 날 운명처럼 다가왔다. 당장 곤충학을 공부하지 않곤 못 배길 것 같았다. 마흔, 주변의 만류를 뒤로한 채 대학원에 들어갔고, 소심하던 ‘아줌마’는 어느덧 ‘한국의 파브르’가 됐다.

취재 서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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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한국곤충연구소 연구교수인 정부희 박사는 사실 곤충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나고 자라 그저 거부감이 없었을 뿐. 그런 그가 문화유적 답사를 다니다가 곤충의 매력을 알고, 마흔 살에 이끌리듯 곤충학을 공부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지금은 <정부희 곤충기> 시리즈로 유명한 ‘한국의 파브르’가 되어 한국 곤충학에 한 획을 긋는 중이다.

‘한국의 파브르’로 유명하시던데요. 영광이죠. 그런 걸 의식하진 않았는데 닮은 점이 있더라고요. 파브르도 열정이 있었을 거예요. 주변에 있는 곤충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집을 연구소 삼아서 연구를 했더라고요. 명예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닌 거죠.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곤충을 어떻게 더 세심하게 관찰할까 고민했을 뿐이니까요. 프랑스 사람인 파브르나 한국 사람인 저나 곤충을 대하는 마음이 같다 보니 작업하는 방식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어요.(웃음)

어릴 때부터 곤충에 관심이 많았나요? 아니요.(웃음) 그런데 돌이켜보면 제가 살던 곳이 곤충이 사는 곳이었어요. ‘물아일체’란 말이 있잖아요. 1970~80년대만 해도 마당에 나가면 곤충이 뛰어놀았어요. 그런 생활을 하다 보니 곤충과 저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던 거죠. 늘 접하고 사니까 징그럽다거나 무섭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곤충을 좋아해서 늘 들여다보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저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곤충과 저를 나누지 않고 공존한 것 같아요.

마흔 살에 곤충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곤충학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팔자인 것 같아요.(웃음) 30대 후반까지는 곤충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어요. 스스로도 영문학을 전공한 인문학 골수분자라고 생각할 정도였죠. 그런데 30대 초반부터 문화유적 답사를 다니면서 생태계를 접했어요. 곤충이 눈에 들어왔고, 김춘수의 ‘꽃’이란 시처럼 이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더라고요. 곤충의 매력에 푹 빠진 거죠. 곤충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커졌는데, 속 시원히 답해줄 사람도 없었고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는 책도 없더라고요. 일반인도 쉽게 볼 수 있는 책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해보기로 마음먹었어요.

말 그대로 운명적인 만남이네요. 맞아요. 주변에서도 제가 학부 때 영문학을 공부한 것마저 곤충학자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할 정도예요. 자연과학은 번역서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논문도 영어로 쓰잖아요. 영어 실력이 공부하는 데 밑거름이 됐죠. 강연할 땐 저한테 ‘곤충신’이 내렸다고 표현하기도 해요. 예순 살 정도면 학문적으로 통달하는, 소위 작두를 탈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마흔 살에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요. 처음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열흘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어요. 설렘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됐죠. 제일 두려웠던 건 제가 ‘아줌마’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진 않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대학원 인터뷰 때도 남편을 잘 둬서 늦은 나이에 고급 취미 활동을 하러 온 건 아닌지 묻더라고요. 제가 그런 편견을 더욱 고정시키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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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수의 주 전공은 ‘버섯에 사는 곤충’. 채집을 나가면 나무에서 버섯을 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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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채집을 나가 사진을 찍고 있는 정부희 교수. 그의 올해 목표는 그림을 배워 곤충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이다. (오른쪽)정 교수는 “실제 채집을 나가서 곤충 사진을 찍고 프레임을 확대해 보면 너무 예쁘다”며 곤충을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공부보다 ‘나이’를 극복하는 게 더 힘들었어요. 학회를 가도 지도 교수들과 제 연배가 비슷한 거예요. 당시에는 당당하지 못하고 위축됐죠. 이명박 정부 시절에 서울시에서 이공계 학생 장학금을 준 적이 있는데, 제가 뽑혔거든요. 그런데 저랑 같이 면접을 본 학생들이 제가 심사위원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게다가 저는 ‘컴맹’이었어요. 대학원에 가면 논문 작업을 할 때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돌려야 하는데, 그게 익숙지 않아서 1년을 고생했죠. 20~30대 친구들이 1시간 준비할 때 2~3시간은 더 준비했어요.

곤충학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요? 남편은 처음에 말이 없더라고요. 아이들 중요한 시기가 끝나고 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죠. 당시 큰애가 고1, 작은애가 초1이어서 저도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마음이 급했고, 곤충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더라고요. 결심하고 나니 접을 수가 없었죠. 그나마 다행히 아이들은 대찬성이었어요. 원래 아이들 꿈이 곤충학자였거든요.(웃음)

자녀들도 도전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영향을 받았을 것 같아요. 시련이 있긴 했어요. 두 아이가 뒤늦게 사춘기를 호되게 겪었거든요.(웃음) 첫아이가 대학입시에 실패하면서 고난이 시작됐죠. 작은애는 갑자기 셰프를 하겠다고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잠시 가출도 하고요.(웃음) 박사과정 3년 내내 마음이 지옥이었어요. 그만두려고 보따리도 여러 번 쌌죠. 그런데 쉽게 그만둘 수 없더라고요. 큰애는 적성에 맞지 않은 과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저 몰래 스물 여덟에 수능을 다시 봤어요. 지금은 수의대에 다니고 있어요. 이제 와서 아이들이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엄마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큰애도 나이 때문에 다시 수능을 볼 때 심적 부담이 있었지만 ‘엄마는 나보다 더했는데 난 그거에 비하면 빠르다’고 생각했대요. 작은애는 셰프의 꿈을 접고 어릴 때 꿈이던 곤충학자의 길을 걷기로 했어요. 맘고생을 하긴 했지만, 이런 과정이 저를 더 낮은 곳으로 임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교수님을 롤 모델로 생각하는 여성도 많아요. 조언 좀 해주세요. 아이들한테 매어있는 마음을 조금 덜어서 자신에게 돌렸으면 좋겠어요. 마흔인 사람은 여든을, 쉰인 사람은 그 이상을 보고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행복하게 썼으면 좋겠어요. 

<정부희 곤충기> 시리즈는 계속 나오나요. 네, 계속할 거예요. 10권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걸 마무리하는 게 단기 목표예요. 저의 주 전공이 버섯에 사는 곤충을 연구하는 거거든요. 국내에서 저밖에 없죠. 혼자 일하는 게 버겁지만 그동안 성과를 집대성해서 일반인도 볼 수 있는 학술서를 완성하고 싶어요. 그럼 그런대로 곤충계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관광통역안내사 신애경
재미있으니까

지루한 직장 생활을 견디려 살사댄스를 췄다. 살사 음악에 반해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미’를 최고 가치로 살다 보니 10년 후, 관광통역안내사가 되어 있었다.

취재 서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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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전까지 스페인어를 해본 적 없는 평범한 직장인. 관광통역안내사 신애경 씨 10년 전 모습이다. 지루한 일상을 탈피하려 살사댄스를 추기 시작하면서 스페인어와 인연이 시작됐다. 비록 수익이 일정치 않아 가끔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지만, 안정적이고 지루하던 과거 삶보다 다이내믹하고 즐거운 지금의 삶이 더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서른 살에 스페인어를 시작했다고요. 네, 10년 됐어요.(웃음) 처음부터 스페인어를 하려고 한 건 아니고 살사댄스를 추면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죠. 당시엔 학원도 별로 없었어요. 구글 들어가서 영어로 된 스페인어 교재를 사서 공부했죠.

살사 음악에 매료되어 스페인어를 시작했군요. 공부하다가 지겨워지면 살사댄스를 추고, 음악을 계속 들었어요. 그럼 다시 공부할 마음이 생기더라고요.(웃음)

남미나 스페인에서 살다 온 경험도 있나요. 3년 전쯤 남미에 6개월 정도 있었어요. 남편이 회계사인데 프로젝트 때문에 브라질 상파울루에 가야 했거든요. 다녀와서 스페인어가 확 는 건 아니지만, 현지인을 접하며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다녀와서 바로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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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관광객과의 관계 속에서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신애경 씨가 느끼는 관광통역안내사의 가장 큰 매력이다. (오른쪽)단체 관광객과 함께. 신애경 씨는 관광통역안내사 일을 하는 ‘지금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관광통역안내사는 어떤 일을 하나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을 가이드해주죠. 주로 서울을 소개하지만 경주나 부산, 제주도를 방문할 때도 있고요.

준비 과정도 궁금해요. 일단 스페인어 인증시험 점수가 있어야 해요. 필기시험, 스피킹 면접도 보고요. 제가 시험을 본 해엔 네 명이 면접을 봤어요. 스페인어 가이드 수요가 많지 않고, 어려워서 그런 것 같아요.

그전에 10년간 회사에서 회계일을 하셨다고요. 그만둘 때 서른다섯이었어요. 전공도 그쪽이고,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었어요. 그런데 재미가 없더라고요. 미래가 보이질 않았죠.

지금 일엔 만족하시나요? 재미있으니까 수입이 적어도 하는 것 같아요. 일당은 높은 편이지만, 정기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특히 요즘 같은 겨울철은 비수기고요. 매달 일정한 수입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서 힘들 때가 있어요. 비수기엔 가끔씩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해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에 도전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요. 어떻게 하면 용기가 날까요?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도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인 것 같아요. 저는 가치 있는 게 재미있거든요. 그전에는 삶이 지루했는데, 지금은 다이내믹하고 재미있어요.
 
 
 

 
아마추어 수영 선수 여금선
나이 생각할 겨를 없이 설레었으니까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느라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느지막이 시작한 수영으로 건강과 삶의 활력, 딸과의 추억까지 세 마리 토끼를 잡았다.

취재 황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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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딸과 중1 아들을 둔 여금선(42) 씨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S전자에서 22년째 일하고 있는 워킹맘이다. 초등학교 때 육상 선수로 활동한 것을 제외하고는 직장에 다니고 아이들 키우느라 운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30대 중반, 몸이 좋지 않아 수영을 시작한 뒤 흠뻑 빠져 아마추어 수영 선수가 됐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입상은 따놓은 당상이라 메달 부자다.

새로운 운동을 배우기에 늦은 나이라는 생각은 없었나요? 저는 나이 먹는 걸 즐기는 사람이거든요. 늦은 나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 했어요. 다만 주변에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언제 시작했느냐고 물으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라고 답하는 경우는 많았죠. 나도 좀 더 어릴 때 시작했더라면 지금 더 잘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된 편이었고,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수영을 생각하면 매일 심장이 뛰고 설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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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중학생 딸과 바다수영대회에 나가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서였는지 사춘기도 알아채지 못하게 지나갔다. (오른쪽)각종 수영대회에서 메달과 상패를 휩쓸었다. 입상보다는 기록 단축에 더 의의를 둔다.

수영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요?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육상부 활동을 했어요. 맞기도 많이 맞고, 타이어에 줄을 달아 어깨에 멘 채  달리기도 하고 혹독하게 훈련했어요. 힘든 순간을 극복했을 때  희열 같은 게 있잖아요. 그 경험이 나도 모르게 몸에 남아있었나 봐요. 열심히 헉헉거린 다음에 얻는 성취감이요. 수영은 부상당할 위험이 가장 적은 생활 스포츠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권해요. 물이 온몸을 터치해주니까 몸매도 예쁘게 잡히거든요. 볼록볼록하던 근육이나 살들이 예쁘게 깎이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딸과 함께 수영대회에 나가 입상도 했다고요. 저희 아이는 그 무섭다는 중2 시기도 사춘기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잘 지나쳤어요. 취미가 같으니 함께하는 시간이 많고, 엄마 동호회에 따라와서 수영하는 이모 삼촌들이랑 대화 나누고 하면서 사회성도 길렀죠. 작년에 딸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수영 배우게 길을 터줘서 고맙대요. 엄마랑 친구처럼 지낼 수 있어 감사하다고 적었더라고요.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요. 내년에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열려요. 박태환 같은 기존 선수들이 먼저 경기를 치르고 아마추어들이 뛰는 경기인데요. 일반 마스터즈 대회는 선수 등록한 기록이 있는 사람은 아마추어들과 같이 뛸 수 없지만 이 대회는 그렇지 않아요. 실력이 정말 좋지 않고서는 예선에서 탈락하게 되어 있어요. 이 대회에 도전하는 것이 목표고요. 쿠바 해협을 횡단하는 대회도 버킷리스트 중 하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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