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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이신화의 유럽 인문 여행24]차이콥스키의 삶과 사적인 이야기들

2020-05-25 11:30

글·사진 : 이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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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을 다 몇 장의 글로 요약한다고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은 단지 그 기록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생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차이콥스키는 당대에 잘 나가던 음악인이었다. 그의 조력자들도 있었다. 돈에 크게 구애 받지 않을 정도로 ‘누리고’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의 죽음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래서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박물관 여행이 더 즐거운 것이다. 그는 이곳 뿐 아니라 주변에 별장을 만들어 두고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왔다갔다했다.

폰 메크 부인.JPG

폰 메크 부인

 

 차이콥스키의 영지들
박물관 밖으로 나오면 창고에 작은 전시관이 또 있다. 허름한 창고에는 빛바랜 사진들이 걸려 있다. 그 사진들은 차이콥스키의 영지 사진들이다. 차이콥스키는 당대에 잘 나가던 작곡가였고 부호의 미망인이던 나제시다 폰 메크 부인(Nadjeshda von Meck,  1831년~1894년) 부인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사랑해 1876년부터 14년 간에 걸쳐 그를 경제적으로 지원했으니 돈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데미야노보 영지.JPG

데미야노보 영지.

 

 그는 도시 생활보다 전원 생활을 더 좋아했다. 그는 클린 인근에서 생애 마지막 8년을 보내면서 창작의 꽃이 피었다. 그는 데미야노보(Demyanovo)에 있는 영지를 자주 찾았다. 18세기 황제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모스크바의 사회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타네예프(Bradimir Ivanovich Taneyev, 1840~1921)의 영지였다. 그의 동생인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타네예프(Sergey Taneev)는 차이콥스키가 가장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이 영지는 여름별장으로 재건되었다. 교수, 음악가, 시인 등 많은 예술가들이 찾아들었다. 휴식 공간이자 독창적인 실험실이 되었던 이 곳은 당시 일종의 문화 중심지였다.

 

1918년,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의 자료실과 도서관이 이곳으로 옮겨져 데미야노보 영지 박물관(Demyanovo Estate Museum)이 되었다. 젊은 알렉산더 푸쉬킨(Alexander Pushkin)도 1811년에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e Selo)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 머물렀다. 현재 이 영지에는 가정 성당(Church of the Assumption)과 공동 묘지가 있다.

차이콥스키 사진.JPG

차이콥스키 사진

 

 차이콥스키는 생애 후반(1891년 5월~1893년 10월까지)에 클린으로 왔다. 모스크바에서  90㎞ 떨어진 시골마을, 클린에는 기차역이 있었기에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접근이 용이했다. 클린 인근의 작은 마을인 마이다노보(Maydanovo)와 프롤로스코에(Frolovskoe)에 영지를 얻어 작업을 했다. 많은 작곡을 했다. 마이다노보에서는 두 번(1885년~1887년, 1891년~1892년)에 걸쳐 영지를 임대해 4년간 살았다. 영지는 세스트라 강(Sestra River)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아름다운 입지였다. 16세기에 건립된 집은 18세기 후반에 고급스러운 2층 목조주택으로 재건축한다.

 

강가에 댐을 만들어 방앗간을 만들고 공원과 작은 섬을 가진 연못을 만들었다. 주변에는 골동품, 조각, 벤치, 꽃밭 등으로 치장했다. 영지의 북부쪽으로는 마이다노보 마을과 화훼 재배지였던 "빅토리(Victory)"가 인접하고  서쪽에는 세스트라 강둑과 접해 있었다. 현재는 저택은 사라지고 오래된 연못만 남아 있다.  교회는 300번째 생일을 맞아 최근에 복원되었으며, 내부에 정보 패널이 있다.


또 프롤로스코에(Frolovskoe)는 1888년 4월~1891년 5월까지(3년) 살았다. 1625년의 건물을 사서 별장으로 이용했다. 클린의 남동쪽으로 5km 떨어진, 숲이 우거진 언덕의 아름다운 장소다. 영지는 세스트라 강의 지류인 지르노프카(Zhernovka) 강의 오른쪽 강둑 위에 위치한다. 영지를 둘러싼 울창한 숲, 너른 들판, 길게 이어지는 강줄기가 어우러져 한없이 매혹적인 곳이었다. 그는 이 곳을 "천국"이라고 불렀다. 레크리에이션 캠프인 "Resounding Voices"가 남쪽 숲으로 이어진다. 현재 저택은 전쟁 때 파손되어 없다.


그리고 1892년(52세) 5월에 클린으로 이사 온다. 그는 이 집에서 호두까기 인형 18곡, 피아노 18곡, 마지막 주요 작품인 6번 교향곡인 비창 등을 작곡하고 편집했다. 1893년(53세) 10월 28일에 그의 제6번 교향곡인《비창(悲愴)》을 자신이 지휘해 초연한 뒤 11월 6일 오전 3시 경에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묘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역에 묻혀 있다.

 

*차이콥스키 생애
차이콥스키는 러시아의 우랄 지방인 보트킨스크(현재는 차이콥스키 기념관)에서 광산 기사인 아버지 일리아 페트로비치 차이콥스키와 두번째 아내인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와 사이에서 차남 표트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37년에 보트킨스크에 부임하였고, 1848년에 육군소장 대우의 지위로 퇴직하였다. 아버지는 연극과 음악을 좋아해 스스로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프랑스계 어머니의 영향으로 프랑스 식 교육을 받았으며 피아노도 배웠다. 하지만 가족 중에는 음악과 인연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1848년(8세), 온 집안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으나 성격이 착한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1850년(10세) 상트 법률학교에서 수학한다. 2년 뒤인 1852년(12세)에 어머니가 사망한다.

 
차이콥스키는 특히 이 어머니를 끔찍이 생각했다. 어머니를 잃은 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더 버리지 못해 1861년(18세) 안톤 루빈슈타인이 주재하는 러시아음악협회 음악교실(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으로 개편)에 입학한다.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1862년(19세)부터 사법성의 관리로 일한다. 1863년(20세)에 그는 생활이 안정된 관리 생활을 포기하고 음악원에서 교수 잘렘바에게서 대위법(對位法)을 배웠다. 그리고 1863년에 정식으로 법무성을 그만두고 안톤 루빈슈타인의 교실에서 배웠다. 이 음악원이 현재의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서 전통이 있는 러시아 최고의 음악학교가 되어 있다. 1866년(23세) 1등으로 졸업한다. 안톤 루빈슈타인은 이 천재를 감화와 격려로써 지도하였으며, 차이콥스키는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에 임명(1866~77)되었다. 당시 루빈슈타인은 1865년에 개교한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이었다. 최초의 교향곡이 작곡되어 그의 지위를 확립했고, 그리고 얼마 후 이상적인 후원자 메크 부인의 도움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어 오로지 작곡에 매진할 수가 있었다. 그는 유럽을 편력하고, 미국에 가게 됨으로써 크나큰 명성과 영예를 얻었다. 모스크바 근교의 그가 숨어 살던 집은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많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차이콥스키는 1878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직을 사임할 때까지 주옥같은 걸작들을 양산하게 된다. 특히 1875년을 기점으로 해서 그의 주요 오케스트라 작품들, 피아노 협주곡 제1번(1874~75), 교향곡 제3번(1875), 〈백조의 호수〉(1875~76), 교향적 환상곡 〈프란체스카 라 리미니〉(1876),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코코 풍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1876), 교향곡 제4번(1877~78),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1877~78), 바이올린 협주곡(1878) 등을 홍수처럼 쏟아낸다. 이 시기는 그의 전생애를 통틀어 걸작이 가장 풍성하게 양산된 때였다. 차이콥스키는 종교음악, 오페라와 무용곡, 교향곡과 교향시 또는 서곡을 비롯한 관현악곡, 실내악과 독주곡, 가곡과 피아노 음악 등의 전 장르에서 모든 형식을 구사하며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러시아의 후배 작곡가들, 특히 그의 제자인 타네예프 혹은 쇼스타코비치나 스트라빈스키에 끼친 그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1893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자신의 대표적 교향곡 제6번의 초연을 직접 지휘하고 난 9일 후 갑자기 죽는다. 그의 작품들은 그가 존경하던 바흐와 모차르트의 작품과 함께 전 세계에서 연주되고 있다.

부인 안토니나 밀류코바.JPG

부인 안토니나 밀류코바

 

 *차이콥스키의 여자들과 동성애
당대에 차이콥스키는 동성애하고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다. 그의 첫 번째 여자는 벨기에 오페라 가수인 데지레 아르토(Desirée Artot, 1835-1907)가 있다. 1868년, 그녀가 모스크바에 연주여행을 왔을 때 차이콥스키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을 하려고 했었으나, 그녀는 이듬해에 바리톤 가수 파디라와 결혼하고 말았다. 그녀는 투르게네프의 영원한 뮤즈인 폴린 비아르도(Pauline Viardot)와 함께 공부한 여성이다.


차이콥스키는 1877년(37세) 7월 6일, 당시 28세인 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Ivanovna Milakova)의 목숨을 건 열렬한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하지만, 결혼생활은 몇 주 만에 파탄에 이르고 만다.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의 차이콥스키는 오직 음악에만 정열을 쏟았으며, 그녀는 남편의 생활에 대해 이해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동성애적 성향 역시 이 파탄에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리며 한때 자살까지 기도한 차이콥스키는 결혼생활 3개월이 채 못 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도망치고, 이어 심신의 요양을 위해 유럽으로 향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차이콥스키를 쫓아다니면서 괴롭혔고, 1881년에 그녀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자 차이콥스키는 겨우 그녀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또 나제시다 폰 메크(Nadjeshda von Meck) 부인이 있다. 1876년(36세), 파리를 방문한 차이콥스키는 비제의 〈카르멘〉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으며, 이어서 제1회 ‘바이로이트 축제’를 참관해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초연을 듣게 되었다. 이즈음에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원장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소개를 통해 평소부터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경도되어 있던 부유한 철도 경영인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과의 이상한 교제를 시작하게 된다.

폰 메크 부인 (2).JPG

폰 메크 부인

 

 이 두 사람은 이후 서로 신뢰하는 벗으로서 편지만을 주고받으며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는다. 이것은 폰 메크 부인의 요구조건이자 차이콥스키의 입장에서도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묘한 관계는 약 14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콥스키에게 매년 6천 루블을 연금 형식으로 지급했다. 이러한 경제적 후원에 힘입어 차이콥스키는 1878년부터는 교수직을 사임하고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차이콥스키와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는 1890년까지 자그만치 1204통에 이르는 서신 교환을 하다가 갑자기 끝을 맺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로써 폰 메크 부인의 경제적 후원은 중단되었지만, 차이콥스키는 그 사이에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기 때문에 생활에 별다른 지장은 받지 않았다. 작곡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점차 증가했으며, 1887년부터는 지휘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차이콥스키는 오히려 경제적으로 곤란한 그의 친구, 친척 및 음악인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죽음에 대해
차이콥스키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았다. 그는 1893년(53세) 10월 28일에 그의 제6번 교향곡인《비창(悲愴)》을 자신이 지휘해 초연한 뒤 11월 6일 오전 3시 경에 갑자기 사망했다. “1893년 11월 1일 차이콥스키는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생과 조카 그리고 음악가 그라즈노프와 함께〈열정적 마음〉이라는 연극을 본 다음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가 생수를 주문하자 식당 주인은 콜레라가 유행해서 제공하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그래도 그는 재차 고집을 부렸고, 결국 식당 주인은 끓이지 않은 생수를 내왔다. 그 후 그는 콜레라에 감염되어 앓다가 닷새 뒤인 1893년 11월 6일 새벽 세 시에 숨을 거두었다”가 공식 기록이다.


근데 그가 죽 은지 120년이 넘은 이 시점에서도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제시된다. 공식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콜레라 말고도 한 귀족의 조카와의 동성애 관계가 알려지면서 비소를 마시고 자살했다고 한다. 또 한 설은 동성애 사실이 알려지면서 '자살 강요' 설을 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후원자였던 폰 메크 부인이 일방적으로 절교를 선언하자 그 충격으로 3년 뒤 자살했다고도 한다. 그는 '쌀뜨물 같은 설사'를 했다는데 콜레라나 비소 독극물을 마셨을 때도 생겨나는 증세란다. 차이코프스키는 '비소'가 들어간 독극물을 먹고, 콜레라와 같은 증상을 보이며 사망했다라며 추정한다. 근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이콥스키는 어느 누구나 죽는 길을 갔고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을 뿐이다.


지금에서 자살이든, 동성애든, 그게 무어 중요한 일일까? 그것 논할 시간에 그의 흔적을 찾아 ‘클린’을 여행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 일일 게다.(계속)


*Data
차이콥스키 박물관 주소:Ulitsa Chaykovskogo, 48, Klin
개관시간:10~18/월요일 휴관/전화:+7 496 245-81-96/이메일:gdmch@mail.ru
웹사이트:https://tchaikovsky.house/
 http://www.museum.ru/MscReg/e5_hist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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