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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이신화의 유럽 인문 여행20]세르게이의 파란만장한 30년 인생 이야기

2020-04-23 14:58

글·사진 : 이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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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보는 관점은 다 틀리게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세르게이 예세닌의 시에 더 관심이 쏠릴 수 있다. 반면 필자는 이사도라 덩컨과의 사랑이야기 더 솔깃했고 그 요상한 러브 스토리에 세르게이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그의 여성 편력은 대단했다.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한 자료를 파고파고 해서 알아낸 정보다. 그는 살아생전 많은 여성들과 러브 스토리를 만들었다.

출간 책들.JPG

*세르게이 작가 박물관
단층 초록 지붕을 가진 세르게이 예세닌 작가 박물관은 시인의 삶을 총 정리한다. 일목요연하게 시인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정리되어 있다. 시인의 인생을 통틀어 볼 수 있는 곳이다. "애나 스네기나"의 창작의 역사, 생가의 역사, 카신(Kashins) 가족과 세르게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 시의 역사적 전개 등. 또 가족 사진, 학교의 옛 사진, 교류했던 작가들이 있다. 그중 눈길을 끄는 공간은 이사도라 덩칸과의 이야기 공간. 그 둘이 결혼할 때 입었던 옷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또 그가 만났던 다른 여인들의 조각 사진들을 본다. 작가 박물관을 보고 옆으로 나가면 ‘사진 포인트’와 작은 공연장이 있다. 해마다 여름 페스티벌이 열리는 야외 공연장. 세르게이의 큰 브로마이드 사진이 서 있다. 30평생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그의 삶은 한 편의 소설이요, 영화였다. 시인의 파란만장한 삶이 영화 필름처럼 좌르르 돌아간다. 특히 그의 화려한 연애사가 솔깃한 것은 어쩔 수 없다.

1919년 사진.JPG

 

*고향에서의 첫사랑
세르게이는 푸른 눈동자에 금발을 한 귀공자같이 생긴 미남이었다. 그는 30살의 짧은 인생동안 4번이나 결혼했고 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다. 세르게이의 친구인 시인 ‘아나톨리 마리엔고프(Anatoly Marienhof)가 쓴 회고록(Novel without Lies, 1926)’에 그의 인생의 여자에 대해 잘 묘사되어 있다. 그의 첫 번째 사랑은 고향에서다. 예세닌 16세 때다. 요한 스미르노프 주교의 친척인 안나 사르다노프스키(Anna Sardanovsky)였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잘 알던 사이로 시간이 지날수록 교감이 커진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 둘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었다. 1912년, 서로의 감정을 고백했다. 하지만 예세닌은 학교를 마치고 마을을 떠나려 했고 애나는 부모님과 같은 교사가 되고 싶어했다. 둘은 서로에게 편지로 소통했다. 예세닌이 고향에 방문하는 짧은 시간동안에도 그 둘은 모든 시간을 함께 보냈다.

 

18세의 예세닌.JPG

18세의 예세닌

 

1913년 여름, 그들은 수녀에게 유치한 마음을 담는 서원도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앞으로 결혼할 것을 약속합니다. 불충실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막대기로 때려 눕히세요‘라며. 그러나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편지 횟수는 점점 줄어준다. 안나는 동료 교사인 블라디미르 올로노프스키(Vladimir Olonovsky)에 사랑에 빠져 있었다. 1918년, 그들은 결혼했지만 이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안나는 1921년 4월 8일에 출산 중 사망했다. 예세닌이 투르키스탄(Turkestan)에서 안나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된다.  예세닌은 그 소식에 충격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방을 천천히 걷고 제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친구 시인 이반 그루지노프(Ivan Gruzinov, 1893~1942(48-49))에게 말했다 ”'나의 진정한 사랑이었다(It was a true love of mine)“고. 예세닌은 친구 Grigory Panfilov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서 안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그녀와 작별을 했지만 그녀와 같은 다른 여자를 만나면 반드시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Love to a simple woman./Who lived in the village./I went to see her./I came secretly./I told her everything./No one knows about it./I loved her for a long time./It makes me desperately sad./It grieves me so much./She died./It is the deepest love I've ever had./I don't love anyone else.라고. 과연 예세닌은 평생 그녀를 가슴속으로 사랑했을까? 그의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들여다보자.

 

*모스크바에서 첫 번째 동거
세르게이는 1912년(17세) 7월말 모스크바로 상경한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일하는 정육점에서 일하다가 1913년(18세) 4월 ‘스이틴(Sytin)’ 인쇄소에 취직한다. 이 인쇄소는 당시 러시아에서 출판되는 책의 약 4분의 1 정도를 찍어내던 곳. 그는 교정보로 일했다. 이때 약 4살 연상의 ‘안나 이즈랴드노바(1891~1946)’를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곧 동거로 발전한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샤냐브스키 대학(Chanyavsky University) 역사-철학과에 입학한다. 이 대학은 성, 인종, 종파에 상관없이 16세면 입학할 수 있는 야간대학. 하지만 등록금이 없어 18개월 후에 그만둔다.

첫번째 부인과 아들.JPG

첫번째 부인과 아들

 

 1914년(20세) 5월, 직장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부로 여행을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와 돈이 다 떨어지자 고향으로 돌아가 전쟁이 선포되는 8월까지 머문다. 다시 돌아와 9월부터 체르늬쉐프-코벨코프 인쇄소의 교정자가 되었고 12월에 전적으로 결혼해서 아들 유리(1914~1937)를 낳는다. 아이가 태어난 지 2달 만에 세르게이는 아내와 아이를 버리고 행운과 부를 향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떠나 버린다(아들 유리는 스탈린 숙청시기에 체포되어 1937년(37세)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시인이 되다
1915년(20세) 3월, 상트에 도착한 그는 당시 상징주의 시의 대가인 알렉산드르 블로크(1880~1921)를 찾아갔다(블로크의 메모에는 “랴잔 출신의 농부. 19살. 신선하고 순진하고, 목청이 높은 시. 많은 단어를 사용하는 언어(?). 1915년 3월9일 나를 방문함”이라고 쓰여 있다). 블로크는 세르게이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등 도움을 주었으며 그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농민시인”으로 불렀다. 블로크를 만난 날 ‘무랴쇼브’와 ‘세르게이 고로데츠키(Gorodetsky)’라는 문인에게 추천장을 써주어서 덕분에 고로데츠키라는 문인의 집에서 몇 달간 머물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본인을 어필하기 위해서 자신의 캐릭터를 시골에서 갓 올라온 순진한 젊은 시인으로 설정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이때 시인으로서 재능을 인정받았고 나름 유명세를 타게 된다.

 

그의 성공은 아주 순탄했다. 4월에는 벌써 부유한 가정과 살롱으로부터 초대받는 존재가 되었다. 1916년 2월, 첫 시집인 『초혼제』가 출간되자, 세르게이의 명성은 순식간에 높아져 황후와 공주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황금 시계와 목걸이를 받았다. 그러나 명성이 높아지는 동안 전쟁은 계속 되었고 1916년(20세) 결국 군에 징집되게 된다. 그는 군대를 경멸했고 친구의 도움으로 좋은 보직으로 이동한다. 1917년 2월 혁명 후 황제제도가 붕괴되면서 세르게이는 3월 경에 탈영한다. 이렇게 그가 끔찍이도 싫어했던 군대 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두번째부인과 아이들.JPG

두번째부인과 아이들

 

*상트에서 새로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다
1917년(22세) 지나이다 라이흐(1894~1939)와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당시 상트의 신문사 비서이자 타이피스트였다. 두 사람은 러시아 북부를 여행하고 그해 8월, 볼로그다 근교의 한 교회에서 결혼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는 오래 지속 되지 못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부부는 부인의 고향인 오룔로 이사했다가 9월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 왔다. 딸 타티아나(1918년(23세) 출생)가 1살이었을 때 모스크바로 돌아 왔지만, 부부는 다투었다.

 

1919년(24세) 말에 세르게이는 집을 나갔었다. 1920년(25세) 2월, 아들 콘스탄틴을 낳았지만 세르게이는 검은 색 머리칼을 가진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1921년(26세) 10월 5일에 공식적으로 이혼했다(참고로 둘 사이에 난 딸 타티야나는 후에 작가가 되었고 세르게이가 본인의 자식이 아니라고 했던 두번째 아들, 콘스탄틴(1920~1986)은 축구 해설가가 되었다).

덩칸과 덩칸의 입양딸과 예세닌.JPG

덩칸과 덩칸의 입양딸과 예세닌

 

*세기의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과 결혼
세르게이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에는 미국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1877~1927)이 있었다 해도 과언 아니다. 세르게이는 이혼한 해인 1921년 11월, 이사도라를 만난다. 이사도라는 당시 43세였고 세르게이는 26세로 둘 사이는 무려 17세 차이가 났다. 그들의 15개월에 걸친 신혼여행은 악몽 그 자체였다. 세르게이는 술에 취하면 이사도라를 더러운 늙은 암캐라고 불렀고, 뛰쳐나갈 때까지 폭행했으며, 호텔 기물이 산산조각 날 정도로 파괴했다. 세르게이는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에 시달렸고 광적으로 돈, 반지, 시계, 술, 신발, 모자, 실크 셔츠, 손수건, 스카프에 탐닉했다. 이사도라가 각 도시의 박물관이나 컨서트에 데려갈 때마다 세르게이는 모든 양복점 앞에 멈춰 서서 맘에 드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바로 사버리곤 했다. 세르게이 스스로 여러 번 이사도라에게 작별의 ‘야듀’를 외쳤지만 그는 언제나 다시 이사도라에게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랬듯, 이사도라는 엄마처럼 그가 내뱉은 모든 저속한 욕설과 과격한 행동을 용서하고 다시 그를 자신의 품으로 맞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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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미국에서

 

이사도라는 모스크바에 무용학교를 건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해외 공연을 준비한다. 그녀는 세르게이와 동행하기 위해 1922년(27세) 서둘러 혼인신고를 한다. 그해 뉴욕 항에 도착한다. 처음에 세르게이는 미국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지만 이사도라가 공연투어를 시작하면서 그의 광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사사건건 이사도라와 이사도라의 조국인 미국에 대해 광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들이 미국에 도착한 때는 금주령 시기. 독한 밀주를 마셔 댄 세르게이의 건강은 회복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졌다. 파리로 돌아왔지만 결국 알코올 중독의 행패로 인해 둘은 러시아로 돌아오게 된다.

 

러시아로 돌아온 후에도 불안정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1923년(28세) 2월 이후 극도로 악화되었다. 8월 중순에 이사도라는 공연과 동시에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캅카스로 떠났다. 나중에 이사도라를 따라가겠다는 세르게이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두 사람의 실질적 관계는 끝이 났다(세르게이 자살 이후 이사도라는 프랑스 니스로 거처를 옮기고 새로 만난 애인과 데이트를 하러 가다가 자동차에 긴 스카프가 끼어 죽었다).

 

*배우 압구스타 미크라쉐프스카야와 시인 나제쥐다 볼핀
이사도라와 관계가 끝난 1923년 말, 세르게이는 압구스타 미크라쉐프스카야(1891~1977)라는 카메르 극장의 여배우와 만나고 있었다(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1976년, 85세 된 압구스타는 ‘그와는 키스조차도 나누지 않은 플라토닉 사랑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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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세르게이가 그녀에게 바친 “불한당의 사랑”이라는 7편의 시에는 그녀를 향한 사랑이 절절하다. “푸른 불꽃 나풀거리고”라는 시에는 그녀와 사랑할 수만 있다면 술도 끊고 시까지 버리겠다고 노래한다. 당시 세르게이는 여러 명의 다른 여자들과도 짧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시인 나제쥐다 볼핀(1900~1998)은 세르게이의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했다. 헤어진 후 1924년 5월, 아들 알렉산드르(1924~2016)를 출산했지만 세르게이는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후에 알렉산드르는 훌륭한 시인이 되었고 1960년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에서 시인이자 저명한 활동가가 되었다. 1972년 미국으로 이민 후 수학자이자 교사로 살았다).

마지막부인 소피아톨스토이 1925년.JPG

마지막부인 소피아톨스토이

 

*마지막 여자는 톨스토이의 손녀딸
1923년(28세) 11월20일, 세르게이는 몇몇 동료 ‘동반자’시인들과의 취중 토론에서 여러 차례 유대인을 비하하는 명칭 이드(yid)를 외쳐댔다. 이 문제로 언론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12월 중순에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1924년(29세) 3월, 요양소를 나온 그는 활동을 지속하며 새로운 시작을 계속한다. 당시 쓰여졌던 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어머니에게 부치는 편지’다.

 

9월 초에 세르게이는 캅카스의 바쿠(아제르바이젠)와 트빌리시(조지아)를 거쳐 흑해연안의 항구도시 바툼(조지아)으로 향했다. 1925년(30세) 봄, 캅카스에서 쓴 새로운 시를 갖고 모스크바로 돌아왔지만 비평가들은 예전의 시들을 더 선호했다. 3월말, 그는 재차 바쿠로 갔다. 『페르시아 모티프』와 『애나 스네기나』를 썼던 곳. 그는 휴식을 취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고자 한 여행이었지만 술에 절어 시간을 보낸다. 5월,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는 병색이 짙었다. 결핵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그의 목소리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해 6월부터 동거하고 있던 레프 톨스토이의 손녀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톨스타야(1900~1957)와 결혼한다. 법적으로는 아직 이사도라와 혼인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9월에 혼인신고를 마쳤다(그녀는 세르게이 사후에 툴라 영지에서 살다가 32살에 재혼했다).

장례식 1925년 모스크바.JPG

장례식 1925년 모스크바

 

*30세에 자살하다
당시 세르게이의 상태는 심신이 모두 피폐한 완벽한 주정뱅이의 모습이었다. 세르게이는 환각과 망상에 시달리며 끊임없는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11월26일 그는 제1모스크바 국립대학 정신과에 입원했다(당시 진료기록에는 ‘진전섬망 환각’이라고 적혀 있다). 1925년 12월24일 세르게이는 전 부인들을 찾아가 아이들을 잘 키워달라고 부탁한다. 그날 야간 열차로 상트에 도착한 세르게이는 앙글레테르(angleterre) 호텔(이사도라와 신혼 여행지)에 여장을 풀었다. 그는 우연히 같은 호텔에 머물던 몇몇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최근에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하며 시간을 보냈다.

 

12월27일 이른 시간에 세르게이는 자신의 피로 시를 썼다. 그날 아침 지인들에게 잉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상처난 팔목을 내 보였다. 12월28일 아침 10시30분 경에 엘리자베타 우스티노바는 함께 식사하기 위해 세르게이의 방을 노크했다. 방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호텔 지배인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안에서 열쇠가 꽂여 있었기에 방문 여는데 시간이 지체되었다. 문을 열었을 때 방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그는 창가에 목을 맨 채 죽어 있었다. 그의 나이 30세. 1925년 12월 31일 모스크바의 바간코프스코예(Vagankovskoye 1771년에 조성) 묘역에 묻혔다(이 묘역에는 세르게이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지나이다 라이흐가 묻혀 있다).

예세닌묘에서 자살한 친구 갈리나.JPG

예세닌묘에서 자살한 친구 갈리나

 

*비서 갈리나 베니슬라브스카야의 자살
세르게이가 죽자 많은 여성들이 모방 자살이 유행되어 방아쇠를 당겼다. 그 중에는 갈리나베니슬라브스카야(1897~1926)가 있다. 그녀는 세르게이의 비서였고 1년 정도 동거하는 중에 이사도라를 만나서 그녀 곁을 떠났다(1921년 10월 3일). 갈리나는 정신 건강 병원에 입원하느라 모스크바를 떠나 있었기에 세르게이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세르게이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평생 사랑에 올인했다. 세르게이의 묘지 옆에서 권총자살 한 그녀 나이는 당시 29세였다.


세르게이 사후에 3권의 시집이 출간되었다. 스탈린과 후르시초프 시절 세르게이 작품은 모두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를 암송했으며 전장에 나간 많은 병사들의 손에는 그의 낡은 시집이 쥐여 있었다. 1960년대에 복권이 되어 1966년에야 그의 시집은 다시 출판되면서 빛을 보게 됐다. 현재 세르게이의 시는 러시아 학생들에게 가르쳐진다. 많은 이들이 시에 음악에 붙였다. 그의 서정이 넘친 시들은 한국에서는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후에 월북한 시인 오장환에 의해 처음으로 ‘세르게이 시집’으로 소개되었다.(계속)


Data
세르게이 세르게이 묘역:바간코프스코예 묘역(Vagankovskoye Cemetery)
주소:Sergeya Makeeva Street, 15, 모스크바
전화:+7 499 252-25-41

 

글, 사진: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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