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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선 기자의 더 늦기 전에 떠나는 여행 07]체 게바라의 흔적들을 찾는 쿠바여행

아바나의 아르마스 광장 만물상 노점에서 골목 담벼락까지

2017-04-14 13:09

글·사진 : 김보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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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헤밍웨이 루트에 이은 쿠바 여행의 또 다른 테마, 체 게바라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쿠바혁명이 한참 지난 지금도 쿠바는 여전히 체 게바라를 추억하고 있다.
체 게바라가 떠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쿠바를 ‘지탱하고’ 있다.
쿠바 어디에서든 체 게바라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열정을 바친 그의 모습은 쿠바를 넘어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어 영원한 혁명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검은 베레모와 길게 기른 머리칼, 덥수룩한 콧수염, 오뚝한 콧날에 강렬한 눈빛…. 피델 카스트로의 전속 사진작가였던 알베르토 코르다가 쿠바 혁명광장에서 우연히 찍은 이 사진은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이미지를 나타나는 대표 사진이다. 체 게바라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은 보았을 만큼 유명한 이 사진은 코르다가 저작권 없이 무료로 배포해 지금도 상업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사진이 아니더라도 쿠바를 여행하다 보면 어디에서든 체 게바라를 만날 수 있다.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아바나의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만물상 노점에서도, 골목 담벼락에서도, 기념품 가게에서도 체 게바라는 빠지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쿠바 사람들이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가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난 체 게바라를 영웅으로 떠받들며 지금까지 그리워하고 있다.

헤밍웨이와 같이 체 게바라의 고향은 쿠바가 아니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부유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과대학에 다니는 평범한 청년이었던 그는 친구(알베르토 그라나다)와 함께 오토바이 여행을 하던 중 라틴아메리카의 가난과 고통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들을 돕기로 결심한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는 이런 실화를 배경으로 했다. 이후 1956년 멕시코에서 망명 중이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반정부 혁명군에 들어간다.

혁명이 성공하며 쿠바 국민들의 지지를 받게 된 체 게바라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 등 쿠바의 핵심 지도층이 된다. 쿠바혁명 6년 후, 그는 집권자 카스트로에 다음가는 지위를 가졌음에도 콩고, 볼리비아 등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쿠바를 떠난다. 그리고 1967년 볼리비아에서 정부군에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나이 39살, 젊은 나이에 불꽃같은 생을 마감한다.

쿠바 곳곳에 체 게바라의 흔적들이 남아 있지만 공식적으로 체 게바라의 기념관이 있는 곳은 쿠바 중부의 작은 도시 산타클라라(Santa Clara)이다. 이 외에도 아바나의 혁명광장, 혁명박물관을 돌아보거나 그가 살았던 아바나 카사블랑카의 집을 찾아가보는 게 일반적인 체 게바라 루트이다. 쿠바혁명에 좀 더 관심이 있다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바 망명 세력이 다시 쿠바를 공격했던 피그만(The Bay of Pigs, La bahia de Cochinos)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쿠바 중남부인 그곳 해변은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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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유명한 ‘피그만 침공사건’이 일어난 쿠바 중남부의 코치노스만 인근에도 작은 전쟁기념관이 있다. 이곳 해안가는 어디에서든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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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왼쪽)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오른쪽) 부조 초상을 배경으로 한 아바나 혁명광장은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스폿 중 하나다.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아바나 혁명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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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광장에 위치한 내무부 건물 외벽의 체 게바라 초상. 쿠바 여행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초상화 아래 문구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라는 체 게바라의 말이다.

아바나 베다도(Vedado)에 있는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은 각종 매체와 영상에서 쿠바를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익숙한 곳이다. 쿠바혁명 이후 수많은 혁명 시위와 퍼레이드 등이 이곳에서 열려 역사적으로도 유명하다. 원래는 스페인에 저항한 19세기 쿠바의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Jose Marti)의 기념비가 있는 시민광장이었는데 1959년 혁명 이후 혁명광장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널따란 광장(7만2,000㎡)이다. 광장 중심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체 게바라 얼굴 초상이 부조로 커다랗게 새겨진 내무부 건물이다. 철근구조물로 만든 체 게바라의 초상은 쿠바 여행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초상화 아래에 새겨진 문구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라는 체 게바라의 말이다. 오른쪽의 정보통신부 건물에도 비슷한 초상화가 부조로 설치되어 있다. 쿠바혁명의 또 다른 영웅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의 얼굴 조각상이다. 그 밑에 쓰여 있는 말은 ‘잘하고 있어 피델’(Vas Bien Fidel)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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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광장의 호세 마르티 기념탑. 쿠바 독립영웅인 그는 쿠바인들에게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를 능가하는 존경의 대상이다. 정치,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서 현대 쿠바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쿠바 아바나의 국제공항 이름도 호세마르티 공항이다.

반대편으로 돌아서면 광장을 지나 큰 탑과 동상이 있는데, 이곳은 쿠바의 독립영웅인 호세 마르티를 기념하는 동상과 기념탑이다. 기념탑은 약 109m 높이로 아바나 시내에서 가장 높다. 이 탑의 1층은 호세 마르티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통해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꼭대기 층은 아바나의 전경을 다 볼 수 있도록 유리 창문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항상’ 공사중이다.  기념탑 바깥에는 18m 높이의 호세 마르티상이 있다. 우리의 광화문 광장처럼 쿠바에 역사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때면 어김없이 이곳 광장에 사람들이 대규모로 모여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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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끝은 여행자들의 거리인 오비스포(Obispo)로 연결된다.

혁명광장 주변에는 1950년대 올드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올드카 뒷자리에 앉아 아바나 도심을 누빌 수 있다며 호객행위가 한창이다. 쿠바혁명 전 아바나를 누비던 올드카들은 이제 아바나를 상징하는 또 다른 아이콘이 됐다. 올드카라는 이름답게 온갖 차 부품을 어떻게든 고쳐 쓰는지라 차가 온전히 달리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렇다고 너무 낭만을 기대하면 안 된다. 에어컨도 없는 올드카에 오르면 금세 오래된 기름 냄새와 앞차의 엄청난 매연으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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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요새에서 바라본 아바나 구시가지. 멀리 돔 형식의 옛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혁명 전 미국의 국회의사당을 본떠 만들었다.


아바나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 혁명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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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는 실제 탱크와 비행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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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가봐야 할 박물관인 혁명박물관.

쿠바의 박물관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수준은 아니다. 쿠바 여행에서 박물관을 찾는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도 몇 곳은 빼놓을 수 없다. ‘혁명박물관’(Museum of the Revolution)은 쿠바에서 가장 그럴싸한 박물관이다. 커다란 돔이 있고 여러 가지 건축양식이 혼합되어 아바나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이다. 아바나 구시가지에 있는 이곳은 원래 대통령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라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다. 지금은 1953년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의 어용정권이던 바티스타 정권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쿠바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 되었다. 이곳은 쿠바인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역사의 흔적들이 38개의 전시관에 나뉘어 보존되고 있다. 주로 신문기사와 사진 위주로 전시하고 있고 혁명 당시 군복이나 재래식 총 같은 유품들도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미니어처나 밀랍인형으로 만들어져 전시하고 있다.

콜럼버스에 의해 1492년 발견된 쿠바는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로서 남미로 가는 관문이자 카리브 해의 중요 거점 역할을 했지만, 멕시코와 남미가 식민지로 개발되면서 점차 소외돼갔다. 산업도 척박한 지형 때문인지 현지 원주민을 노예처럼 부리는 사탕수수농장 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다른 나라들이 속속 독립해가는 와중에도 최후까지 스페인 식민지로 남아 있던 쿠바였으나 마침내 1868년 제1차 독립전쟁과 1895년 제2차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이때 등장하는 독립영웅이 혁명광장에 동상으로 자리 잡은 호세 마르티이다. 결국 미국이 개입해 쿠바는 미국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고, 1902년 명목상 독립을 했지만 미국의 충실한 설탕기지와 경제적 식민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미국은 싼값에 쿠바 동쪽의 ‘관타나모’ 지역을 사들여 해군기지를 만든다. 최근에 고문 논란으로 뉴스에 자주 등장한 ‘관타나모 수용소’가 바로 이곳에 있다.

1993년 이른바 ‘중사의 반란’으로 불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바티스타 군사정권은 무능과 부패, 폭정이 극에 달했다. 이에 피델 카스트로가 1955년 체 게바라 등을 포함한 82명의 무장 군사조직을 만들어 조그만 보트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입성한다. 변호사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당시 바티스타 군대 내 봉기에 가담한 후 체포돼 재판을 받고 가석방되어 멕시코로 망명한 상태였다. 하지만 상륙지점에서 바티스타군의 공격을 받아 60명을 잃고 12명만이 남는다. 이후 산타클라라를 중심으로 한 동부 산간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 게릴라전을 펼친다. 사실상 전멸 위기의 게릴라군이 다시 성장한 것은 지역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패한 정권에 허덕이던 민중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주고 농사일을 도와준다. 특히 의학도였던 체 게바라는 의료활동을 하는 등 대민봉사활동을 하면서 점차 세력을 확대했다. 혁명군은 산타클라라에서 정부군의 군사물자 호송열차 습격사건 이후 군사적으로도 반전의 승기를 잡는다. 게릴라전을 성공시켜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혁명군은 마침내 1959년 1월 바티스타 정권을 추방하고 쿠바의 권력을 잡는다. 혁명박물관은 이런 쿠바혁명의 역사적인 장면들이 신문기사와 사진들, 당시의 군복, 총 등의 유품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또 멕시코에서 쿠바로 올 때 82명이 탔던 당시 보트(그린마호)를 재현해놓았다.

혁명박물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세 개의 조각상이 있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조각상이다. 쿠바혁명의 주역인 이들은 이제 모두 세상을 떠났다.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 이후 볼리비아 무장혁명에 나섰다가 총살당했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쿠바혁명 이후 9개월 만에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실종됐다. 최장 장기집권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피델 카스트로는 지난해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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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스(Armas) 광장은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광장이다. 이곳에서는 헌책, 그림, 우표, 카메라 등 온갖 골동품들이 거래되는 거리 시장이 매일 열린다.
 

혁명 이후 그가 살았던 체 게바라의 집

아바나의 카사블랑카에는 혁명 이후 체 게바라가 머물렀던 집이 있다. 올드 아바나의 대성당 광장에서 아바나 항구 쪽으로 걷다 보면 바다 건너편 멀리서 보면 대형 예수상과 아담한 집 하나가 눈에 띄는데, 바로 이곳이 체 게바라가 살았고 집무실로도 쓰던 그의 집이다. 벽에는 크게 ‘Che’라고 쓰여 있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그를 기리는 작은 박물관이 되어 그가 사용하던 책상과 집기, 체 게바라의 유해를 옮긴 관과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체의 도시, 산타클라라

산타클라라(Santa Clara)는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약 4시간 정도 가면 나오는 도시이다. 이 평범한 마을에 체 게바라가 잠들어 있다. 체 게바라의 유해는 볼리비아에서 총살당한 지 30년 후인 1997년 발견돼 산타클라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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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동상 크기만 봐도 쿠바 국민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다. 동상 옆에는 혁명을 이끈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석조구조물이 있다.(체 게바라 기념관 앞 동상)
 
산타클라라엔 체 게바라 기념관(Che Guevara Monument)이 있다. 기념관은 산타클라라의 중심인 비달 공원에서 서쪽으로 2㎞ 거리에 위치해 있다. 축구경기장만 한 광장을 배경으로 높이가 25m에 달하는 거대한 체 게바라의 청동 동상이 세워져 있어 멀리서도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체 게바라의 최후는 영화처럼 흥미롭다.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 콩고에 이어 남미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그는 마침내 이리저리 밀려 볼리비아의 밀림 속으로 숨어든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생포될 당시 그의 몸에서는 소총과 권총 한 자루, 단도, 롤렉스 시계와 담배 파이프 두 개, 1만5천 달러가 나왔다고 한다. 이질에 시달린 영양실조 상태에다 이발과 면도를 하지 않아 매우 지저분한 모습이었으며 모카신이라는 인디언 전통 신발을 신고 있었다. 혁명 쿠바의 2인자로 소련과 미국에 모두 대항했던 체 게바라의 당당했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체포될 당시 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쏘지 마라, 나를 살려두는 게 더 가치가 있다”라는 말은 나중에 그 실체를 두고 논란이 많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체포된 다음 날, 미국 CIA의 지령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총살되었다. 그를 살려두면 훗날 큰 화가 생길 거라고 판단한 결과였다. 당시 볼리비아에는 사형제도가 없어 대외적으로는 전투 중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 체 게바라의 죽음에 대한 증거로 그의 두 손이 쿠바와 아르헨티나로 보내졌다. 공동묘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997년 발굴단에 의해 유전자 감식을 거친 다음 쿠바로 반환되어 산타클라라 기념관에 안장되었다.

산타클라라의 체 게바라 기념관 안에는 그의 생애에 관한 사진과 신문자료 위주의 전시 공간과 그가 실제로 썼던 물건들을 전시해놓은 공간들이 있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활동했던 볼리비아의 전투지를 상상으로 재연한 공간도 마련됐다. 기념관의 또 다른 쪽은 체 게바라와 전사한 그의 동지들이 안장되어 있는 별도의 추모공간이다.

산타클라라는 체 게바라가 가장 치열하게 전투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시내 광장의 주변 건물에는 당시의 총탄 흔적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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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부대는 혁명에서 분수령이 된 전투인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백여 명에 불과한 체의 게릴라부대가 수천 명의정부군이 탄 장갑열차를 탈선시키고 화염병을 투척해서 전원 항복을 받아냈다. 사진은 산타클라라 전투 기념 공원.

산타클라라 시내 외곽 철길 근처에서 또 다른 기념 조형물을 만날 수 있다. 산타클라라 전투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장갑열차 점령 기념물이다. 1958년 1백여 명에 불과한 체의 게릴라부대가 수천 명의 정부군이 탄 장갑열차를 탈선시키고 화염병을 투척해서 전원 항복을 받아낸 전투를 기념한 곳이다. 이 산타클라라 전투는 혁명의 전세를 역전시킨 역사적인 것이었다. 여전히 철길이 놓여 있고, 탈선된 열차와 당시의 상황이 묘사된 기념물들이 야외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자본주의에 저항했던 그가 자본주의 상품으로

체 게바라는 어찌 보면 실패하고 단명한 비운의 혁명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었으며 혁명의 아이콘이 되었다. 체 게바라의 전기는 할리우드 영화가 되었고, 볼리비아에는 그가 최후의 게릴라전을 펼쳤던 곳들을 찾아가는 관광프로그램까지 있다. 저항의 상징이자 젊은 순교자 이미지로 상업화해 전 세계 회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얼굴을 광고에 이용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저항했던 그가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상품이 되어버린 상황인 셈이다.

체 게바라를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상론자이고 과대포장된 영웅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 그는 쿠바 국립은행장이나 산업부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 무리한 정책을 강행하다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경제정책 실패뿐 아니라 지원을 바랐던 소련과 불화를 일으키는 등 외교에서도 갈등을 빚었다. 그런 실패를 거듭해 사면초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쿠바에서 물러나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콩고와 볼리비아에서의 게릴라전 실패도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과의 갈등이 하나의 원인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쿠바인들에겐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혁명 동료이던 피델 카스트로에게 ‘혁명이여 영원하라’라는 편지를 남긴 채 아프리카로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는 산타클라라에 있는 그의 기념관 건물에 부조로 새겨졌다.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분명한 건 있다. 체 게바라의 흔적을 찾아 쿠바를 찾는 여행자들이 그의 실체를 만나기 위해서 찾는 것은 아닐 거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음에도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저항정신에 공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쉽고 편안한 인생을 마다하고 총을 잡고 혁명에 나섰으며,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마지막까지 혁명의 최일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고결함만으로도 체 게바라의 인기 비결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다.

2017년은 쿠바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게릴라전 중에도 매일 일기를 썼다는 그는 많은 명언들을 남겼다. 대표적인 말이 “네 자유와 권리는 딱 네가 투쟁한 만큼 주어진다!”이다. 어쩌면 우리 현실에 딱 어울리는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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