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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림의 앤티크 스타일 07]인류 역사를 바꾼 향신료와 설탕

부와 권위의 상징 아이템

2017-04-19 14:56

글 : 백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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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털링 마개의 발사믹 비네거 병(빅토리안)
2 핑크빛이 아름다운 크리스털 와인 잔(아르데코)
3 스털링 홀더와 크리스털 볼의 센터피스(빅토리안)
4 크리스털 꽃병(바카라사, 1950년대)
세계 모든 사람들이 모두 예외 없이 소비하는 상품을 ‘세계상품’이라고 한다. 기후가 추운 유럽에서 인기 있는 모직물은 무더운 아프리카나 인도에서는 팔리지 않는다. 반면 얇으면서 선명한 색상으로 염색이 가능하며 세탁하기도 쉬운 면직물은 원산지인 인도를 떠나서도 세계 각국에서 선호하는 세계상품이 되었다. 면화와 함께 세계상품의 반열에 등장하는 것으로 커피와 차, 설탕 그리고 향신료가 있다. 이들 품목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작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상품들은 지금은 누구나 손쉽게 소비하는 상품이지만 실제 그들이 없는 우리의 일상은 상상할 수 없다. 그 상품들이 인류의 역사를 바꿔왔다는 사실에 수긍이 간다.
 
 
동양의 향신료가 유럽에 수입된 것은 고대부터이다. 로마의 요리책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조리하는 요리의 80% 정도에 후추를 사용하였고 그 양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고대부터 유럽에 수입되기 시작한 향신료는 중세 들어 수요가 더 늘어났다. 향신료에 대한 유럽인들의 열망과 욕구는 그것의 원산지를 찾아가는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으로 이어졌다. 1519년에서 1522년에 걸쳐 있었던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 또한 새로운 인도로 가는 항로의 개척이 목적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향신료를 향한 열망이 있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이슬람 세력을 거치지 않는 바다항로의 개척을 통해 당시 블루칩으로 여겨졌던 향신료를 안정되게 공급받고 싶어 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이슬람교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동방과 교역을 하려면 위험과 더불어 비싼 경비를 지불해야 했다. 향신료가 원산지에서 유럽시장에 도착하기까지 열 단계 이상의 유통과정을 거쳐야 했으므로, 후추의 경우 베네치아에서의 가격이 생산지 인도에서의 가격보다 30배에서 40배 높았다. 확고한 향신료 수입루트를 확보하는 것은 곧 막대한 부를 거머쥐는 것이었기에 무모하게 생각되었던 1492년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향해도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후추처럼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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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리스털에 스털링을 오버레이한 디저트 접시(아르누보)
2 스털링으로 윗부분을 마감한 닭 모양 크리스털 솔트 디시(빅토리안)
3 크리스털 솔트 디시(빅토리안)

1498년 7월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 선단은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고, 해안에 상륙한 다 가마 일행은 이슬람 상인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도대체 무엇이 당신들로 하여금 이곳으로 오게 하였소?” 일행의 대답은 간단하게 “우리들은 기독교인들과 향신료를 찾아 이곳에 왔소”였다. 동방의 기독교 왕국과 향신료가 새로운 땅을 찾아 위험한 항해를 시도하게 한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향신료에 대한 욕구가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는 틀림이 없다. 유럽의 상업활동 전체를 향신료와 사치품에 대한 욕구와 열망으로 설명하는 것은 분명한 과장이지만, 향신료 무역이 중세 후반 유럽의 경제활동을 활성화시킨 주요 동력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향신료는 이것이 풍기는 이국적인 향취과 희소성으로 인해 실질적인 용도 이상으로 중세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쉽게 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비싸서 일반 대중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사치품으로서의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양념이 많이 첨가된 음식은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고 그래서 과다한 양념 사용은 맛을 좋게 하기보다 음식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 되었다. 상류계급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인도제도로부터 아라비아를 건너 수입된 값비싼 향신료들은 ‘후추처럼 비싸다’라는 프랑스 속담에서 보듯이 그들의 부유함과 권위를 보여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아이템이었다.
 
중세시대 향신료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부자들의 식탁에서 향신료는 모든 요리는 물론이고 음료와 후식에도 양념으로 첨가되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식후에 먹는 과자, 잼, 푸딩 등을 만드는 데도 향신료가 폭넓게 사용되었고 와인에도 첨가되었다. 향신료를 가미한 포도주는 후식으로 제공되었고 많은 요리와 소스에도 향신료가 사용되었다. 향신료로 만든 달콤한 후식은 부자들의 식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되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은식기와 크리스털 앤티크 제품 중에는 특히 조미료와 관련된 화려한 것이 많이 있다. 이것은 유럽의 상류층들이 식탁에서 과시적으로 조미료를 사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당시의 설탕통이나 소금통은 지나치게 커 보인다. 귀족들은 향신료를 풍부하게 쓰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평민들에게 자신들의 신분과 부유함을 과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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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일 비네거 병(빅토리안)
2 유려한 곡선의 스털링 홀더 크랜베리 솔트 디시(빅토리안)

중세시대의 양념은 신분의 상징이었기에 보석처럼 서로 선물하고 마치 귀중품처럼 수집했다. 이런 양념들은 은으로 된 조미료 쟁반에 담겨 나와 손님들이 직접 요리에 첨가하게 했다. 양념은 손님들에게 후식으로도 제공되었는데, 오늘날 우리가 커피를 마시듯 후추, 계피, 육두구를 즐겼다고 한다. 이 때문에 15세기 부유한 유럽인들은 동양에서 들여온 후추, 정향, 육두구, 계피 등의 향신료를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앞다투어 구입했다. 정향과 육두구 등은 당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쌌기 때문에 유럽시장에서 향신료는 은화가 아닌 금화로 매매되었다.
 
향신료는 맛과 향을 가미하는 높은 부가가치의 미각식품인 것은 물론이고 병을 치료하는 약으로도 쓰였다. 또한 종교의식에 사용하는 향을 만드는 데도 사용되었고 화장품의 원료로도 사용되었다. 향신료는 중세의 단조로운 음식과 생활에 활력을 주는 신비롭고 매력적인 동양의 선물이었다. 고대부터 시작된 향신료에 대한 유럽인들의 열정은 그것이 대량 유통되어 더 이상 사치품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설탕이 유럽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먼 옛날 그리스의 알렉산드로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부터이다. 인더스 강 유역에서 원주민이 사탕수수를 끓여 갈색의 가루를 얻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 설탕은 유럽 왕과 귀족들만의 특별한 향유품이 되었다. 그 후 이슬람제국이 서아시아를 지배하게 되면서 사탕수수를 본격적으로 재배해 유럽에 수출했고, 11세기 말 시작된 십자군전쟁으로 인해 설탕의 존재는 유럽인들에게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단맛을 내는 감미료라고는 꿀밖에 없던 유럽인들에게 설탕의 맛은 신천지를 발견한 것과 같은 놀라움이었다. 또한 고결해 보일 정도로 곱디고운 설탕의 흰색은 값비싼 몸값과 더불어 상류층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설탕을 가진 자’와 ‘설탕을 향유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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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리스털 솔트 디시(빅토리안)
2 스털링 홀더의 크랜베리 솔트 디시(빅토리안)

르네상스 이전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설탕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그 시대 설탕은 음식에 넣는 조미료라기보다는 약물로 여겨져서, 결핵 치료 등 10여 가지 효능을 가진 약재로 쓰일 정도로 신비한 존재였다. 당시 설탕은 아시아에서 수입된 후추나 향료처럼 고급스러운 조미료였고 왕족이나 귀족의 파티나 결혼식 등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즉 ‘설탕을 가진 자’와 ‘설탕을 향유하는 자’는 곧 왕족과 귀족 등의 지배계급을 의미했다. 이렇듯 대중화되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몸값이었던 설탕은 지리상의 발견 시대를 거쳐 17세기 열강들의 식민지 각축전과 함께 대량생산의 길을 맞이하게 되었다. 모든 이들에게 거부감이 없는 단맛을 주는 설탕은 매우 인기가 많아서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가공하는 일은 유럽인들에게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매달려야 하는 일이 되었다. 유럽 강국들은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것처럼 너도나도 설탕사업에 뛰어들었다. 사탕수수에서 설탕이 되기까지는 많은 수공을 필요로 하는 탓에 수십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끌려왔다. 그들은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이라는 커다란 수레바퀴 아래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며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달콤한 설탕의 역사 이면에는 쓰디쓴 흑인노예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인들은 처음부터 설탕을 좋아했다.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유함과 사치스러움을 보여주기 위해 이가 까맣게 썩어들어 갈 때까지 설탕을 가까이했다. 영국의 헨리 8세 시대에는 채소와 감자, 달걀, 고기, 심지어 와인에도 설탕을 넣어 마셨다. 만찬 테이블의 중앙을 차지하던 설탕을 담는 용기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점점 커져만 갔다. 설탕을 식탁에 올리기 위해서 제과상인이라는 직업까지 등장했다. 제과상인은 다양한 종류의 사탕과자를 만들고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사탕으로 갖가지 형태의 모형을 만들어 식탁을 장식했다. 크리스털과 스털링으로 만들어진 설탕을 담는 센터피스는 놀라울 정도로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제작되었다.
 
유럽에 전해진 외래 음료인 커피, 초콜릿, 홍차는 그 자체가 쓴맛을 내지만 처음 전해질 때는 설탕을 넣지 않는 상태로 전해졌다. 17세기 초반 유럽의 왕실들을 비롯한 상류층의 사치는 정점에 달했고,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부유한 상공인들이 그 사치의 대열에 합류했다. 부유한 상공인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생겨나자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신분에 따라 소비생활을 달리하던 규제를 폐지했다. 신분에 따른 소비규제가 풀리자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과 귀족의 문화를 따라 하고자 하는 문화의 사대사상 그리고 부의 과시욕이 어우러져 차, 설탕, 도자기, 향신료 등과 같은 이국적 물건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비로소 설탕은 귀한 몸값에도 불구하고 약재를 넘어 식탁으로, 귀족을 넘어 부유한 중산층의 식탁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대중에게 다가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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