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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림의 앤티크 스타일 09]유리공예를 꽃피운 아르누보

2017-06-22 09:28

글 : 백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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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포니즘 시대의 카메오 티캐디.
2 스털링이 오버레이된 아르누보 꽃병.
3 핑크와 그린의 조화가 아름다운 물컵(아르누보).
4 이단 트레이와 접시(아르누보).
5 그린 컬러 물컵과 커스터드 컵(아르누보).
6 에나멜 페인팅의 저그(빅토리안).
휴일이 이어지던 5월, 꽃구경에 정신을 뺏기다 보니 어느덧 성큼 여름이 다가왔다. 더운 여름철이면 시원한 음료와 함께 식탁에 세트처럼 등장하는 것이 유리와 크리스털이다. 이것은 우아한 분위기를 내는 도자기와는 달리 화려한 느낌을 주면서 시원함도 함께 선사한다. 유리가 사람들의 실생활에 밀접하게 연관된 가장 큰 계기는 아마도 유리로 된 거울의 등장일 것이다. 12세기에서 13세기경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점차 보급된 유리거울은 유리 뒤편에 얇은 주석판을 붙이는 방법으로 생산되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15세기 르네상스기에 베네치아가 부를 축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베네치아의 거울은 이전의 희미했던 금속거울과는 차원이 다른 평면거울이었기에 유럽의 귀족들은 거울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유리거울의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힘입어 거울은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거울이 사치품으로 등극하여 비싼 몸값을 지니게 되자 프랑스의 루이14세는 이탈리아에서 많은 기술자를 초청하여 대형 유리판 제조에 몰두했다. 거울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프랑스에서 직접 유리를 생산하여 자신의 궁전을 장식하고자 거울 제조법 탐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루이14세의 이러한 열정의 결과로 마침내 프랑스에서 대형거울이 생산되었다. 유리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장인들을 ‘무라노’ 섬에 유폐했던 베네치아의 혹독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거울이 드디어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베네치아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이윽고 유럽의 많은 궁궐에서 실내장식으로 내벽에 거울을 붙이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 유리거울 또한 바로크시대 유리의 귀한 몸값에 연유한 상류층의 취향을 반영한 것으로 베네치아산이 아닌 프랑스 제품이다. 당시 4㎡ 크기의 유리 한 장 가격이 유리 기술자 한 사람의 4만 시간 임금에 상당했다고 하니 그 엄청난 몸값을 짐작할 수 있다. 유리는 바로크시대를 거쳐 로코코시대의 장식미술 발달에 힘입어 가구로서 재인식되며 이후 실내공간에서 가까이 머물게 된다.
 
이러한 유리의 인기는 1676년 영국의 조지 레이븐즈 크로프트에 의해 만들어진 ‘크리스털’의 등장으로 더욱 사랑받게 되었다. 유리에 24%의 산화납을 첨가하여 만드는 크리스털은 일반 유리에 비해 투명도가 높고 더 정교한 조각을 가능케 했다. 우리가 유럽의 궁전을 관람할 때 보게 되는 화려한 샹들리에와 촛불의 아름다운 조화는 크리스털의 탄생으로 더욱 완벽함을 갖추게 되었다. 크리스털은 이후 유리와 함께 식탁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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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린 컬러 디캔터와 컵.
2 아름다운 꽃문양의 티컵(아르누보).
3 갈레의 카메오 크리스털 샐러드 볼(아르누보).

산업혁명이 유럽인들의 삶에 많은 변화를 이끌어낸 1850년대에는 유리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이즈음에 판유리 제조공정의 커다란 발전이 있었고, 이는 고가였던 판유리의 대량생산으로 이어졌다. 대량생산은 판유리의 가격을 낮추었고, 지금의 특별소비세 격으로 유리에 부과되던 유리세를 폐지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부유층의 전유물이던 유리를 끼운 찬장이 중산층에도 보급되었다. 유리가 끼워진 찬장의 대중적 보급은 이미 상류층에서 열병에 가깝게 퍼져 있었던 도자기 수집과 진열을 중산층으로까지 퍼트렸다. 각 가정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찬장이 놓이고 그 안이 찻잔과 접시로 장식되었다. 1851년에 열린 런던박람회에서는 판유리의 대량생산과 규격화에 힘입어 철근과 유리가 주재료로 쓰인 ‘수정궁’이 조셉 팩스턴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것은 유리가 건축의 부속물이 아닌 주인공으로 등장한 첫 번째 사례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항, 역사, 공공건물 등의 현대적 유리 건축물들은 이때에 기원을 두고 있다.
 
사람들의 생활과 더욱 가까워진 유리는 1890년대부터 나타난 아르누보라는 예술사조에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새로운 예술이라는 의미의 아르누보는 자연의 선을 특징으로 하며 미술을 모든 생활에 끌어들여 실용화함으로써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20여 년간 모든 장르와 나라를 초월하여 영향력 있게 번져 나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아르누보는 패션, 가구, 유리공예, 보석공예 등의 다양한 장르에서 창조적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19세기 전반의 기계문명에 대한 반성에 기반을 두고 중세시대 공예로의 복귀를 꿈꾸며 수공예의 혁신을 가져오려 했던 미술공예운동(Art&Craft Movement)과는 달리, 아르누보는 자유롭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던 움직임이었다. 아르누보는 자연 속의 유기적인 형태로부터 모티브를 찾아 이것을 양식화하여 장식미술로 사용하였다. 아르누보 양식은 식물의 형태에 기초한 자유롭게 흐르는 선을 가장 중시하였는데 꽃과 식물, 여인, 곤충이나 동물들의 유기적인 형태, 백조, 공작, 조개, 나비, 잠자리 등에 이르기까지 생동감 있는 형태들을 다채로운 유기적 곡선 위주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아르누보 예술사조는 유리공예 예술을 화려하게 꽃피웠다. 낭시파의 거장 에밀 갈레와 돔 형제는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을 강타한 자포니즘의 강한 영향 아래 유리공예의 르네상스를 이끈 위대한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특유의 상감유리 기법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갈레가 제작한 유리그릇의 특징은 고대 카메오에서 암시를 얻어 불투명 혹은 반투명 색유리에 층을 달리하여 색의 효과가 잘 나타나게 한 데 있다. 그는 대단히 많은 꽃병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당시 도자기와 함께 유리공예품이 상류층 집안의 장식품으로 상당히 각광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아는 보석사 티파니의 창업자 아들인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 역시 유리공예에 특별한 이정표를 만든 사람이다. 그는 중세 고딕 건축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영감을 받아 채색 유리창, 타일, 꽃병, 램프 등의 다양한 예술성 있는 제품을 제작했다. 또한 어떤 빛깔의 유리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파브릴(Favrile)이라는 유리 제품을 만들어냈다. 그가 특허를 낸 이 유리는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색상을 연출할 수 있었다. 루이스 컴포트의 티파니 스튜디오는 당시로서는 역사가 짧았던 미국의 예술산업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스탠드는 지금도 경매시장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낙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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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털링이 오버레이된 살구색 콤포트(아르누보).
2 스털링이 오버레이된 살구색 크리스털 센터피스(아르누보).

아르누보를 빛낸 많은 유리공예 예술가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작가는 르네 랄리크라 할 수 있다. 그는 보석 세공사로서 먼저 이름을 알렸지만 1901년부터 유리 작업에 몰두하여 1910년경에는 주얼리 제작을 중단하고 오직 유리 제품의 제작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작품세계를 전환했다. 유리공예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보여준 그의 혁신적인 행보는 1908년 랄리크가 프랑수아 코티로부터 향수병 디자인을 주문받은 해에 이루어졌다. 랄리크가 새로 고안한 유리 제조 방법은 정밀한 조각이 필요한 향수병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당시 향수병은 손으로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값이 비싸서 상류층만의 애용품이었다. 랄리크는 그의 서정성 있는 표현과 모던한 용기 형태에 힘입어 곧 세계적으로 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유리 제조 사업은 확장을 거듭했으며 특히나 크리스털은 반짝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우아한 크리스털 제품의 제작에 몰두했다. 프로스티드(Frosted) 크리스털 볼이나 오팔레슨트(Opalescent) 볼은 랄리크만의 독특한 유리공예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랄리크는 여체를 외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고혹적이고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동시대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관능적으로 여성의 이미지를 표현했던 것과는 대조가 되는 대목이다.
 
아르누보는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예술의 휴머니즘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아르누보는 20세기 말부터 유행했던 다소 따뜻함이 결여된 미니멀리즘에 싫증난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자연이 그리운 우리에게 곡선의 아르누보가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예술로 다시 한 번 자리매김해 현대의 디자인 속에서 계승되기를 바란다. 인류가 모두 전쟁의 포화 속에 내몰리는 세계대전을 겪기 직전의 착한 예술사조인 아르누보는 사람의 손맛이 따뜻하게 살아 있는 서정성을 가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서정적이라는 말 자체가 어색할 만큼 바쁘고 정신없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회용 컵이 아닌 아날로그적인 유리컵은 감칠맛 나는 여름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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