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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림의 앤티크 스타일 8]식탁문화를 꽃피운 도자기 이야기

2017-05-20 13:52

글 : 백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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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려한 곡선의 티포트, 찻잔, 트레이 세트(19세기)
2 드레스덴 티포트(18세기)
3 나비 손잡이가 아름다운 찻잔과 디저트접시 트리오(아르누보)
4 핑크색 크리스털 물잔(아르누보)
5 스털링 티포트(빅토리안)
6 오버레이 저그(아르누보)
7 스털링 2단 트레이와 접시(빅토리안)
8 스털링 마개의 크리스털 상감 티 캐디(자포니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일 꼭 만나게 되는 몇몇 아이템 중 하나가 식기이고, 그 식기의 대부분이 도자기이다. 도자기의 영어 이름이 ‘China’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도자기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전형적인 특산품이다. 차와 더불어 도자기만큼 인류 역사에 깊이 관여한 품목은 없을 것이다. 15세기부터 중국의 차, 비단은 이슬람을 거쳐 꾸준하게 유럽시장으로 유입되었다. 이전까지 이슬람 지역에 대량 수출된 중국 도자기 역시 육상, 해상으로 연결되는 이슬람 교역로를 통해 이탈리아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유럽사회에 등장하게 되었다. 중국 도자기가 유럽사회를 휩쓸게 된 데에는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사치품으로서 중국 도자기가 지녔던 사회·경제적 가치가 초기 중국 도자기 열풍의 주된 요인이었다. 유럽에 도착한 고품질의 온전한 중국 도자기는 원거리 교역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특성이 더해져 18세기 대량 유입 시기 전까지 유럽사회에서 최상품의 사치재로 통용되었다.
 
17세기 이후부터 활발한 무역활동으로 중국 도자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물건들이 유입되면서 유럽에서는 이국적인 중국풍 정서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초기 왕후와 귀족들의 수집 대상이었던 중국의 도자기와 공예품들이 적극적으로 유럽인들의 생활 깊숙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많은 유럽인들은 중국을 동경의 대상으로 여겼고 상당한 문명국으로 인식했다. 특히 당시로부터 몇 세기 전 마르코 폴로가 아시아, 인도 등지를 여행한 후 집필한 <동방견문록>의 표현을 보면 중국은 황금과 온갖 신기한 물건으로 가득한 세상이며 자기, 화약, 종이, 화폐 등의 이국적 물건들로 가득 찬 나라로 묘사되었다. <동방견문록>의 내용은 콜럼버스 등의 여러 모험가들을 설레게 하였고 대항해시대를 여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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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털링이 오버레이된 본차이나 찻잔(아르데코)
2 로열 우스터사의 디너 접시(아르누보)
 
 
중국 미술품에 대한 각별한 호기심과 동경을 갖게 된 유럽의 여러 왕가들은 중국 도자기뿐만 아니라 사치스러운 중국의 옻칠 가구, 비단을 바른 벽면 등으로 그들의 권력 과시욕을 충족시켰다. 16세기 이후 유럽사회 내에서의 사치품 소비 증가와 소유를 통한 지위 과시라는 두 가지 사회풍조는 중국 도자기의 유입과 결부되어 고가의 중국 도자기를 소유하는 것이 소장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유함을 보여주는 행위로 연결되었다. 실제로 귀족들은 ‘자기 진열실’을 만들어 자신이 소유한 중국 도자기를 전시함으로써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과시했다. 유럽사회 내에서 중국 도자기는 사회·경제적인 요소를 지닌 상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비롭고 이국적인 중국’을 상징하는 문화적 소재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사람들이 이국적인 중국문화를 향유하는 방법 중 하나는 도자기로 실내를 장식하고 전시하는 것이었다. 훗날 마이센 자기를 만들게 한 독일 작센의 아우구스투스 왕도 중국의 도자기를 열렬히 사모하던 수집가 중 한 명이었다. 현재도 그가 만든 드레스덴 츠빙거 궁전의 백자 박물관에는 5만여 점의 자기 수집품들이 소장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 당시 유럽에서의 도자기 열풍과 아우구스투스 왕의 도자기에 대한 광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좋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은 작센의 아우구스투스 왕을 궁전에 초대하여 자신이 모은 중국산 도자기를 자랑했다. 프로이센의 왕은 작센의 왕도 열광적인 중국산 도자기 수집광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작센 왕에게 그가 거느리고 온 기마병과 자신의 도자기를 맞교환하자고 제안한다. 어이없게도 작센의 아우구스투스 왕은 이 제안을 수락한다. 갑자기 도자기와 운명이 바뀐 기마병들은 자신들을 버린 작센 왕에게 분노하고, 이후 작센 왕국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은 결국 작센 왕이 모아놓은 도자기와 유럽 최초의 도자기를 만들고 있던 마이센 지방까지 프로이센 왕에게 가져다준다. 자기들을 버린 작센 왕에게 복수한 기마병들 덕분에 프로이센 왕국은 군비를 확장하여 통일 독일이 된다. 도자기에 대한 열망이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놓은 사건이다.
 
동양의 도자기에 서양인들이 그토록 열광하게 된 계기는 차문화 수입과 무관하지 않다. 동양의 차문화를 서양인들이 알게 된 것은 15세기 후반 무역이 본격화된 ‘대항해시대’였다. 서양 사람들에게 차는 미지의 음료였으며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장수 요인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차를 따르는 다기에도 크게 주목했다. 먼 동양의 차를 즐기는 것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궁중 사람들은 차와 찻잔에 열광했다. 영국에서 차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7세기 후반부터 중국에서 많은 찻잔이 수입되었다. 17세기의 중국은 해마다 약 20만 개의 도자기를 수출하였고 18세기에 와서는 연간 100만 개를 수출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도자기 한 점이 유럽 중산층들이 거주하는 좋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니 중국 도자기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다. 왕족과 귀족들은 도자기 수집에 열중하여 저마다 ‘도자기 방’을 꾸미고 이를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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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브르 디너 접시(19세기 초)
2 콜포트사의 디너 접시(빅토리안)
3 마이센 디저트 접시(1900년대)
4 세브르 사이드 접시(19세기 초)
5 마이센 찻잔(18세기)
6 세브르 잉크병(18세기)
 
 
유럽의 폭발적인 도자기 수요로 인해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 유출되었고, 이는 국가의 부를 상징하는 은 보유량이 심각하게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 이유로 유럽의 여러 왕은 물론 각 지역의 권력자들도 ‘백색의 금’이라 불리던 백색 자기를 스스로 개발하기 위한 노력과 투자를 경쟁적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의 아우구스투스 2세도 화려한 생활로 바닥난 금고를 채울 욕심으로 당대에 유명했던 연금술사인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를 연금시킨 채 백색 자기를 개발하도록 명령했다. 오랜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1710년 유럽 최초의 백색 자기가 작센의 마이센 지방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면 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그들이 그토록 필요로 했던 경질자기를 18세기 초가 되어서야 만들 수 있었을까? 18세기 이전까지 중국에서 고품질의 자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인 도자기를 만드는 흙과 도자기를 굽는 온도에 대한 비밀을 중국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이외에도 활발하게 도자기가 생산되었던 지역으로는 이슬람 지역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잘 깨지고 무른 연질자기만을 생산할 수 있었다. 비밀의 열쇠는 카오린(Kaolin)이라고 불리는 고령토에 있었다. 잘 깨지지 않는 견고한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1350℃에 이르는 높은 온도에서도 견딜 수 있는 흙이 필요했다. 고령토를 제외한 흙은 모두 800℃ 이상 온도가 올라가면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거나 깨져버린다. 고령토와 도자기 소성온도의 비밀을 알지 못했던 유럽인들과 이슬람인들은 17세기까지 도자기를 꽤 많이 생산했지만 마조리카, 파이앙스, 델프트와 같은 연질자기만을 생산해낼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은 징더전이나 덕화요 등지에 자기 제작에 적합한 다량의 고령토가 매장되어 있어 이를 바탕으로 고품질의 자기를 제작하는 것이 가능했다. 고령토와 더불어 그릇을 굽는 소성온도 또한 자기 제작에 중요한 요소이다. 나무만을 지펴 1300℃ 이상으로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불을 가두는 장치가 필요했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가마를 이용하여 고온을 가두고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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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가 없는 중국풍 찻잔(18세기)
 
 
유럽은 18세기 초까지도 우리의 항아리와 같은 옹기 수준의 그릇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도자기는 17세기경부터 유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도 역시 예술성 높은 자기문화를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통해서 우리 도자가 일본으로 전파된다. 이 전쟁을 통해 끌려간 우리의 도공들이 420명에 이르고 이들은 일본 자기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임진왜란을 ‘Ceramic War’라고 하는데, 임진왜란이 궁극적으로는 도자기와 관련된 전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7세기 이후 일본은 네덜란드와의 교역으로 수많은 자기를 유럽으로 수출하게 된다. 더욱이 명나라는 국내 반란으로 1600년대 후반에 자기 수출이 불가능해져서 일본이 거의 독점으로 공급했다. 100년 동안 무려 수천만 점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유럽의 부가 상당 부분 자기를 매체로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음을 알 수 있다.
 
1710년 유럽 모든 나라의 열망이었던 경질자기가 독일 마이센에서 탄생하면서 유럽 도자기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마이센에 이어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당대 문화계의 리더였던 마담 퐁파두르가 로코코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인 세브르 도자기를 만들었다. 또한 1740년경 영국에서는 고령토에 동물 뼈의 재를 혼합하여 만든 본차이나가 등장한다. 이는 영국이 전 세계 도자기 시장을 주도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영국의 도자기 산업은 화려한 장식과 색깔이 더해진 콜포트(Coalport)사의 제품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빅토리아 여왕이 특히 좋아했던 민턴(Minton)사의 꽃무늬 찻잔은 당시 모든 주부들이 갖고 싶어 하던 것이었고 그 명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핸드페인팅으로 만들어진 고가의 도자기는 ‘전사요법’이라는 문양 복제기술의 개발 덕분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도자기는 영국의 주요 산업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발로 부를 쌓은 많은 중산층들은 재산목록 중 하나로 도자기를 집집마다 소유하였다. 마침내 도자기는 서민들의 식탁에도 오르는 대중적인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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