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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샹송 가수 미하일 크루그의 비극적인 이야기

2020-07-06 15:29

글·사진 : 이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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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샹송 가수 ‘미하일 크루그’의 삶은 너무나 비극적으로 드라마틱하다. 여행 당시에는 그의 노래도, 그의 이력도 전혀 몰랐다. 원고를 쓰기 위해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았고 그의 노래도 들었다. 덩치가 크고 인상은 강렬해서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은 외모지만 그의 노랫소리는 너무 매력적이라서 폭 빠지게 된다. 나라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졌어도 그의 음악은 듣기에 편안하고 마력이 있어서 자꾸만 그의 인생사를 파고 들게 된다. 그냥 동상만 본다면 무슨 의미인가? 인생사를 알고 찾으면 여행은 그 재미가 더 커진다. (이 글을 읽기 전에 꼭 그의 음악을 먼저 듣고 보길 부탁한다. 또 자료사진 일부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구글에서 가져옴. https://youtu.be/SOU8miyev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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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에 반한 소년
미하일 크루그(Mikhail Krug, 1962~2002)는 트베리 시의 근교인 모로조프스키 고로도크(Morozovskiy Gorodok)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엔지니어였고 그의 어머니는 회계사였다.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음유가수로 손꼽히는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 1938~1980)의 노래에 강렬한 인상을 받아 11세부터 기타를 집어 들었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를 모방하려 했다. 참고로 비소츠키는 필자가 아는 유일한 러시아 가수로써 영화 ‘백야’의 맨 마지막 ost를 부른 가수다. 비소츠키의 인생사도 한 편의 영화 스토리다. 그는 소련시대 배우 겸 시인이며 가수 겸 작사가였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 한 권의 시집도, 단 한 장의 음반도 내지 못하고 정보기관으로부터 늘 감시를 받았다. 본인은 스스로를 가수라고 인정하지 않았지만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그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전해져 소련은 물론 주변 국가들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배우로도 성공해 수많은 연극과 드라마에서 연기했으며 2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42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그는 아직도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배우/음유시인들 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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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사인 그는 25세 때 샹숑 대회에서 1등 받다
크루그는 14세에 첫 곡을 만들어 동급생들에게 바쳤다. 그는 군대를 다녀온 후 운전사로 일하면서 10년 동안 시내 전역에 유제품을 운송했다. 그런 다음 1987년, 호송 대장으로 승진해 연구소에 파견되었지만 그는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연구소를 그만두고 다시 운전사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노래와 기타에 대한 열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86년(24세), 스베틀라나(Svetlana Vorobyova)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크루그의 첫 번째 프로듀서였다. 그녀는 크루그에게 대중적인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스베틀라나는 크루그에게 많은 정기공연과 다양한 음악 대회에 참가하게 하고 오디오 테이프에 음악을 녹음했다. 첫 번째 성공은 1987년(25세), 노래 경연대회에서 1등을 받은 일이다. 많은 음악가들은 그가 무대에 서야 한다고 권했다. 그는 첫 앨범 트베리스카야 거리들(Tverskaya Streets)을 발표한다. 1988년(26세), 스베틀라나와 결혼을 했고 둘 사이에서 아들 드미트리(Dmitri)가 태어났다. 하지만 불행히도 1991년(29세), 스베틀라나와 헤어지게 된다. 이혼사유는 남편의 수많은 배신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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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아들드미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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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부인과 아들

 이 무렵 크루그는 "케이트(Kate)"라는 앨범과 무명의 3번째 앨범을 녹음한다. 공식적으로 이 앨범들은 발표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법적인 방법으로 배포된 "Kolshchik"(Кольщик이 노래를 들어보면 안다, 전혀 낯설지 않고 비소츠키 노래보다 부드럽다. 꼭 들어보길)가 크게 히트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1994년(32세)때였다. 그의 인기는 급물살을 탔고 1995년(33세), 음유시인 마이클 서클(Bard Michael Circle)로 개명을 하고 1년 후, 그는 "It Was Yesterday"라는 노래로 자신의 비디오를 만들었다. 1997년(35세)부터는 독일, 미국 및 이스라엘에서 해외 공연을 시작했다.

 

*재혼 1년 후 괴한에게 살해 당하다
그의 음악적 영감은 범죄 요소와 연관성을 갖는다. 그는 범죄 요소와 관련 있는 것을 좋아했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분리된 죄수들의 공허와 절망적인 감정을 노래로 묘사했다. 그의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는 악명 높은 도둑 코봇(Khobot, Alexander Ageyev 총 25년 동안 감옥에서 지내다 2018년에 석방되었다)의 선물이었다. 교도소와 식민지에서 자선 컨서트 공연을 했다. 그는 1998년(36세) 러시아 샹송 후보대회에서 오베이션 상을 수상했다. 1999년(37세), 그는 "Music Ring"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당시 상대는 유명한 세르게이 트로피모프(Sergey Trofimov)다. 2000년(38세) 4월, 장편 영화에 출연해 형사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크루그는 2002년(40세) 6월 30일 밤, 침입자에 의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했으나 사망하고 만다.


당시 집안에는 크루그의 엄마, 크루그와 두 번째 결혼한 부인 이리나(Irina), 아이들 3명(크루그 첫 번째 결혼에서 난 아들 드미트리, 이리나가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의 딸인 마리나, 크루그와 이리나 사이에서 난 1개월 반 된 아들 샤샤(Sasha))까지 총 다섯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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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그와이리나

 자정 즈음, 크루그는 침실에 들어가고, 이리나는 아이들을 침대에 눕혔다. 시어머니는 3층의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두 명의 가면을 쓴 남자가 부인 이리나를 공격했다. 그들은 권총으로 이리나의 머리를 때리고 목 졸라 죽이려 했다. 이리나가 소리를 질렀다. 크루그는 아내의 부르짖음을 듣고 침실에서 뛰쳐 나와 범인과 얼굴을 마주 쳤다. 두 명의 무장괴한들은 크루그만 총으로 쐈다. 돈과 보석은 훔치지 않았다. 총에 맞은 크루그는 구급차를 기다리지 못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의 동생의 집까지 갔다고 전한다. 그가 병원에 이송되었을 때는 중상이 심했다. 총알이 가슴의 왼쪽 절반을 뚫고 나가 폐를 손상 시켰고 위가 파손되었다. 의사는 살 수가 없다고 진단했다. 그는 결국 몇 시간 만에 죽었다. 2명의 어린 아이들은 잠들어 있었기에 부상당하지 않았고 큰아들 드미트리는 컴퓨터에서 헤드폰을 끼고 앉아 있었기에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범인은 트베리 갱단
크루그의 장례식이 있은 지 40일 후, 그를 기리는 거대한 컨서트가 모스크바 키미크(Khimik) 경기장에서 열렸다. 스탠드는 관객들로 꽉 차고 무대에는 인기 있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의 노래를 불렀다.


크루그를 죽인 범인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다. 계약 위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업 경쟁자의 살인, 보드카 마피아가 그랬다는 등. 여러 정황 중에서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도적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흘러 나왔다.


2008년, 경찰은 이 사건에 연류된 트베리 울프스 갱단을 체포했다. 특히 부인 이리나는 알렉산더 아게이예프(Alexander Ageyev)가 살인사건에 개입되었다고 했으나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다른 범죄에 대한 종신형을 받고 있었다. 사건 발생 10년 후인 2012년, 크루그의 살인자로 드미트리 베셀로프(Dmitry Veselov)로 밝혀졌으나 그도 두 달 뒤에 트베리에서 살해되었다. 2013년 하순, 이리나는 울프스 갱단의 알렉산더 오시포프(Alexander Osipov)가 살인범이라고 확인했다. 2014년 3월 7일,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Komsomolskaya Pravda)"신문에서 유명한 뮤지션의 살인 사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자세히 기사화했다.


어쨌든 40세의 짧은 삶을 살다 간 그가 죽고, 5년 후인 2007년부터 "트베리 도시의 날" 축하 행사에서 "러시아 샹송의 노래왕" 선발전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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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부인 이리나

 *크루그의 두 번째 부인 이리나는?
2000년(38세) 크루그는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첼랴빈스크(Chelyabinsk) 출신의 이리나 글라스코(Irina Glazko, 1976~)를 만나 두 번째 결혼(25세)을 한다. 그들은 1년 간 동거하고 2001년(39세)에 결혼식을 한다. 14살 어린 그녀는 이미 첫 번째 결혼 생활에서 낳은 딸이 있었다. 둘은 결혼해 아들 알렉산더(샤샤)를 낳았다. 1년 살고 남편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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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릴 때 연기자가 꿈이었지만 일찍 결혼해 꿈을 접었다. 첫 번째 남편은 직장은 괜찮았으나 딸을 출산하고 나서는 술과 마약에 빠져 들었다(첫남편은 40세에 죽었다고). 그녀는 첫 남편과 헤어지고 딸 아이를 키워야 했기에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식당에서 일하면서 크루그를 만났고 결혼해 의상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녀는 크루그가 죽고 5년 후인 2006년(30세), 모스크바의 사업가인 세르게이 벨루소프와 재혼해 안드레이(Andrei)를 낳았다. 그녀는 모든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재혼한 안드레이와는 결혼 13년만에 이혼 위기를 겪었으나 잘 극복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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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나재혼남자

 *이리나는 유명 샹숑가수로 활동중
그녀는 남편이 죽은 후 2년 후인 2004년(28세)부터 현재까지 샹송 가수로 활동 중이다. 처음에는 남편의 친한 친구인 레오니드 텔레쇼프(Leonid Teleshov)와 듀엣으로 공연했다. 그녀는 가수로 데뷔한 1년 후인 2005년에 올해의 디스커버리 오브 더 이어(Discovery of the Year)에서 샹송 상을 수상했다. 2006년, 두 번째 앨범 "To You, My Last Love"가 발표되었다. 나중에, 그녀는 샹송의 스타일로 몇 가지 더 많은 앨범을 발표했다. 2009년 빅토르 고로레프(Viktor Korolev)와 함께 앨범 "A Bouquet of White Roses"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인기 히트곡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정기적으로 크루그를 기념하는 컨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Irina Krug’로 검색하면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Alexey Bryantsev와의 듀엣(Come to me in a dream)도 멋지고 크루그와의 사이에서 난 샤샤와도 듀엣을 부른다. 아들도 가수가 되었다. 들어보면 좋을 곡들이다.


*Data
*트베리 아르바트 거리:Tryokhsvyatskaya Street
*미하일 크루그 동상 위치:Radischev Boulevard(가로수길)
*트베리 웹사이트:http://www.tver.ru//, https://en.wikipedia.org/wiki/T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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