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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이신화의 유럽 인문 여행27]인도를 최초로 탐험한 러시아인 아파나시 니키틴의 여정

2020-06-18 17:29

글·사진 : 이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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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베리의 관광 안내소의 스태프가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고 알려준 ‘아파나시 니키틴’. 인간이란 ‘아는 만큼만 보고 느끼는 것’. 필자는 트베리 여행 당시에 니키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주마간산 ‘점’만 찍었을 뿐이다. 귀국해서 그에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니 니키틴은 유럽 최초의 인도 여행자로 “3개의 바다를 넘어서”라는 여행서를 남긴 여행작가다. 그의 탐험 이야기는 파고들수록 재미가 있다. 미리 알고 가야 훨씬 여행이 재미있게 된다.(자료사진 일부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구글에서 가져옴)


니키틴책.JPG
니키틴책

*3개의 바다를 넘어서라는 여행서 기록
필자가 트베리 여행 당시에는 아파나시 니키틴(Afanasy Nikitin, 1433?∼1472)에 아는 바  없었다. 여행 안내소의 ‘알요나’가 설명한대로 ‘인도를 여행한 위대한 인물’로만 알았다. 귀국해 원고를 정리하면서 니키틴을 검색해보니 한국판 자료는 거의 전무했다. 간략한 인물 정보와 "3개의 바다를 넘어서(Khozhdeniye za tri morya, 혹은 '세 바다로의 항해')"라는 여행서를 남겼다는 것. 그 책은 고대 러시아 문학의 중요한 고전으로서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쓰여 있는 게 전부다. 단지 그것만으로 니키틴의 족적을 묻히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남았다. 거기에 그가 유럽 최초의 여행 작가였다는 것이 솔깃해서 많은 자료를 검색했다. 그가 남긴 여행서에서 보여준 4년 간의 탐험기는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일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트베리 상인이었던 니키틴은 1466년(혹은 1468년, 33세 혹은 35세)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도 여행을 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인도에서 3년간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보낸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니키틴은 분명 철학자나 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글은 분명한 관찰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분석하고 러시아와 비교했다. 그의 책은 사실에 입각해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들이 기록되어 있어서 인도에 대한 귀중한 정보원(情報源)이 되었다. 인도 인구, 사회 시스템, 정부, 군대(전쟁 코끼리가 등장하는 전쟁 게임을 목격했다), 경제, 종교, 생활 양식 및 천연 자원등을 연구하는 지침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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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틴 동상

*러시아의 위대한 여행(탐험)가 니키틴
니키틴은 이탈리아 상인이자 탐험가였던 니콜로 데 콘티(Niccolò de' Conti, 1395~1469) 이후로 인도를 방문한 첫 러시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도의 촐(Chaul) 지역을 식민지화 했던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보다 니키틴이 더 앞섰다. 현재 인도 뭄바이 주의 촐에 그의 동상이 있다.
또 로마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Mikhail Nikolayevich Romadin, 1940~2012)는 그의 항해에 대한 그림을 남겼다. 또 그는 러시아 우표(2005년)나 동전(1997년)의 인물이 되었다. 1958년에는 영화(The Journey Beyond Three Seas)가 제작 상영되었다. 2000년, 인도 뭄바이에서 남쪽으로 120km 떨어진 레이가드(Raigad)에는 니키틴의 명예의 검은 오벨리스크 기념비를 세웠다. 2006년, 인도-러시아 대사관과 트베리 지역협회의 지원으로 14명의 여행자가 2006년 11월 12일~2007년 1월 16일까지 니키틴의 여행행로를 따라 트베리에서 러시아, 중동 및 중앙 아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원정을 했다. 어떤 록밴드는 노래도 만들었다. 니키틴은 트베리는 물론 러시아에서 위대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페르시아에서 1년 보내고 인도로 항해
그에 관련된 것은 모두 책을 근거한다. 책 이전의 그의 기록은 전무하다. 1466년, 니코틴과 여러 상인들은 당시 페르시아의 시르반(Shirvan, 현재 아제르바이잔)으로 호송선 4척에 물품을 싣고 항해에 나선다. 그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에서는 코카서스 마을로 대사를 보냈다. 트베리에서 볼가 강을 따라 길고 긴 3,690km를 항해한다. 그렇게 볼가 강 하류의 저지대인 아스트라한(Astrakhan)에 도착했는데, 타타르 인들에게 물건들을 약탈당하고 만다.

 

당시 아스트라한은 동서방 교역로 사이에 위치한 도시로 중개 무역이 성행하던 곳. 호송선 4척 중 2척이 도난 당하고 1척은 파괴되었다. 물건을 다 약탈 당한 상황에서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도 없는 상황. 카스피해로 뱃길을 따라 갔지만 설상가상으로 폭풍우를 만나게 된다. 풍랑에 나머지 1척의 배조차 다 부셔지고 남은 물품까지도 사라져 버렸다. 그는 돈 한푼 없이 데르벤트(Derbent, 현재 러시아 다게스탄 공화국)에 도착한 뒤 바쿠, 페르시아(현재 이란)에서 1년을 머문다. 그런 후 1467년(혹은 1469년), 아라비아 해를 가로 지르는 약탈 선을 타고 6주간 항해를 시작한다. 그는 인도 서부인 구자라트(Gujarat)의 캄바트만(Gulf of Khambhat, 혹은 캄베이 만(Gulf of Cambay))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인디고(콩과 염료식물)를 구입하면서 인도 땅에 첫발을 내 딛게 된다. 며칠 후 인도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 주의 레이가드(Raigad) 지구의 ‘촐(Chaul)’ 마을에 도착한다. 촐은 마하라슈트라 주의 수도였던 뭄바이를 기준해 남쪽 60km 지점의 작은 바닷가 마을로 16세기에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은 지역이다.


아파나시 니키틴의 여정.JPG
아파나시 니키틴의 여정

 *인도 바흐마니 술탄국에서의 종교 갈등 기록
그가 인도에 머문 시기는 인도 중세기인 바흐마니 술탄국(Bahmani Sultanate)의 쇠퇴기와 일치한다. 바흐마니 술탄국은 이슬람 국가이자 주요 중세 인도 왕국 중 하나로 남인도 최초의 독립 무슬림 왕국이었다. 그가 ‘촐’에 도착했을 때의 기록을 보면 “이곳은 인도 땅이며 모두가 알몸으로 다닌다. 여자들은 맨발로 다니면서 가슴을 드러냈고 머리는 한 갈래로 묶었다”라고 썼다. 또 현지민들이 유럽인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놀라는지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니키틴은 종교개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흔적을 기록에 남겼다.


니키틴은 다이아몬드에 관심이 많았지만 무슬림만이 구입이 가능했다. 지역 통치자들은 니키틴에게 무슬림으로 개종하면 실질적인 혜택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는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도여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려는 여러 시도에 저항해야만 했다. 개종을 거부했기에 감옥에 갇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말한다. 그는 인도에서 “Khoja Yusuf Khorasani”라는 이슬람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또 그는 라마단(Ramzan) 기도(한 달)기간에 무슬림들과 함께 금식한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난 일이기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 번은 준나르(Junnar, 현재 Pune지역)에 갔을 때 종마를 뺏긴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은 니키틴에게 제안을 한다.


‘네가 무슬림으로 개종을 한다면 너의 종마를 돌려주고 금 천개도 주겠다. 단 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반대로 되갚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다행히 그는 호라산(Khorasan, 이란 북동부)에 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도 비다르에서 몇 달 동안 살다
니키틴은 인도 카르나타카(Karnataka) 주의 북동부에 있는 언덕의 도시 비다르(Bidar)를 방문해 몇 달 동안 산 기록을 남긴다. 당시 데칸 지역의 바흐마니 술탄국은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Vijayanagara) 제국과 서로 대항해 몇 차례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술탄국의 지배 계급자들의 사치로 인해 시민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술탄의 궁전은 화려한 프렛워크(fretwork)와 금박으로 매우 아름답고, 모든 돌은 프렛(fretted) 장식이 되어 금색으로 매우 아름답게 칠해져 있다. 궁전 안에는 잡다한 용기들이 많다”.


니키틴은 비다르에서 힌두교인들과 대화를 나눈 후 러시아 정교회와의 유사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힌두교 인들은 무슬림들보다 그에게는 더 편안해 보인다.


“힌두인들은 식사, 거래, 기도 또는 다른 일을 할 때 나에게 숨기지 않았다.”


또 종교에도 많은 종파가 있음을 언급한다. “인도에는 84개의 신앙이 있으며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함께 먹고 마시지 않으며 결혼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양고기, 닭, 생선, 계란은 먹지만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힌두교도(Hinders)와 함께 하이데라바드(Hyderabad)에서 남동쪽으로 173km 떨어진 크리슈나(Krishna) 강의 오른쪽 강둑에 있는 히말라야 힌두교 사원인 옴파르밧(Om Parvat)에도 순례한 기록이 있다. 그는 성전의 조각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또한 힌두교 여성들은 겸손한 전통의상인 도티(Dhoti)를 입는 동시에 진주 목걸이, 사파이어 반지, 금 팔찌와 반지 등을 장식했다‘라는 기록도 있다.


또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 주의 라트나기리(Ratnagiri) 지구에 있는 작은 항구 도시인 답홀(Dabhol)에서 25일 동안 머물면서 캘리컷(Calicut, 현재 코지코드Kozhikode)으로 여행을 했다. 캘리컷은 포르투갈인 바스쿠 다 가마의 첫 기항지이며 옛날부터 이름난 무역항이다.


“캘리컷은 인도양의 큰 항구이며, 신은 어떤 배도 지나가는 것을 금한다. 과거를 항해하는 사람은 바다를 가로 지르지 않는다. 이곳은 고추, 생강, 육두구, 계피, 정향, 향료 및 여러 종류의 허브를 생산한다. 모든 것이 저렴하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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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틴 기념비

 *실론도 여행
그는 실론(Ceylon, 현재 스리랑카,  1972년 전까지는 실론으로 불렸다)으로 가는 데 15일이 걸렸다. 실론에서는 불교, 무슬림, 기독교인 및 힌두교 인들에게 신성한 산인 아담의 피크(Adam's Peak, 2,243m)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실론은 인도양의 큰 항구이며 ‘아담 피크’라는 높은 산이 서 있다”고 기록했다. 
당시 초고층 빌딩이 없었기에 아담스 피크(Adam's Peak, Sri Pada라고 부른다)는 콜롬보 시내(Colombo, 옛 스리랑카 수도)의 어느 곳에서나 보였을 것이다. 스리 파다(Sri Pada), 즉 정상 근처에 가파르게 올라온 1.8m(5피트 11인치) 암봉을 "신성한 발자국"으로 칭한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발자국, 힌두교에서는 우먼 또는 시바로, 일부 이슬람 및 기독교에서는 아담 또는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는 또 세계에서 귀중한 원석의 원천지역인 라트나푸라(Ratnapura)에 대해서도 말한다.
“실론 근처에는 보석, 루비, 암석 결정, 마노, 호박색, 베릴(녹주석) 및 에머랄드가 발견된다”고 기록했다. 현재 스리랑카는 보석의 산지로 아담의 봉우리의 남쪽과 동쪽 섬에서는 유명한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고양이 눈 등 귀중한 돌이 만들어 진다. 그는 분명히 상인이라서 무역에 큰 관심을 보였을 듯 짐작이 된다.


*고국으로 오던 중 사망
긴 세월동안 그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고향 러시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1471년(38세 혹은 1474년), 인도 답홀(Dabhol)항에서 출발한다.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해협을 항해한 다음 오만의 무스카트(Muscat) 이란의 호르무즈(Hormuz), 이란 남서부의 전설적인 도시인 시라즈(Shiraz, Syrah) 및 크림반도(Crimea)로 항해하면서 중앙 러시아로 향한다. 흑해를 건너 카파(Kaffa, 현재 크림 반도의 페오도시야Feodosia) 항에 도착해 그동안의 여행 기록을 썼다. 1472년(39세, 또는 1475년) 그는 고향 트베리로 돌아오다가 스몰렌스크에서 병들어 죽고 만다. 그해 모스크바 연대기(Moscow Chronicle)에 트베리 상인에 대한 기록이 남는다. 그의 여정 이야기는 지도를 찾아보면서 보면 훨씬 생생하게 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교회
아파나시 기념비 맞은 편에는 그리스도 부활교회(Church of the Resurrection(of the Three Confessors)가 있다. 1731년, 트베리의 상인 가브리일 세도프(Gavriil Sedov)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사비로 건축되었다. 19세기의 유명한 건축가인 카르티에르 로시(Cartier Rossi)가 재건했다. 바로크, 고전주의 및 제국의 세 가지 건축 양식을 결합한 트베리 사원 중 유일하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체스 클럽과 나중에 건강 박물관이 되었다. 이 건물에는 측면 골목, 복도 및 종루가 있다. "세 명의 고백자(Guriy, Samson and Aviv)"를 기리기 위한 통로로 만들었다. 또 인근 강변의 구다리 밑에는 잠수함 기념탑이 있다. 애국 전쟁 동안 잠수함 사망을 기리는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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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릴로프 기념비

 *우화 작가 이반 크릴로프 동상
이어서 구다리를 건너 우측 강변 쪽으로 가면 이반 크릴로프(Ivan Krylov, 1769~1844) 기념비 공원을 만난다. 이반 크릴로프의 동상, 오벨리스크, 성 미하일 교회 등을 볼 수 있다.  공원에 있는 이반 크릴로프 동상은 1944년, 크릴로프의 사후 100주년에 세워졌다. 동상 측면에는 4개의 비석이 있는데, 각각 크릴로프의 우화의 유명한 캐릭터가 새겨져 있다. "늑대와 양고기", "참나무 밑의 돼지", "뻐꾸기와 수탉", "까마귀와 여우 등. 이반은 러시아의 아주 유명한 우화 작가다. 그의 동상이  트베리에 세워진 것은 1774~1783년(5살~14세)까지 9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반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지만 오렌부르크(Orenburg)와 트베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 육군사관이던 그의 아버지는 1775년에 사임하고 1779년에 사망을 했다. 아버지 사후인 1783년(14세), 정부 연금을 받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뒤 평생을 그 곳에서 보냈다. 이반은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 시절 고생을 많이 했다.


크릴로프.JPG
크릴로프

 

1789년(20세)부터 풍자 잡지의 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수편의 희극 및 희가극을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게다가 농노제에 대한 풍자를 이유로 잡지는 정간처분을 당했다. 그 뒤 수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1805년(36세)에 우화시 “떡갈나무와 갈대”를 발표해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이솝이나 라퐁텐의 우화를 모방했으나 차츰 독창적인 러시아의 우화를 창작했다. 1809년(40세)에 최초의 “우화시집”을 발간해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부터 명성이 높아져, 우화시 창조를 천직으로 해 평생을 통해 205편을 써서 우화시를 민중생활에 도입했다.(계속)


*Data
아파나시 니키틴 동상 주소:Naberezhnaya Afanasiya Nikitina, 38
이반 크릴로프:Naberezhnaya Reki T'maki, 31, 구다리의 서쪽에 위치.
트베리 웹사이트:http://www.tver.ru//, https://en.wikipedia.org/wiki/T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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