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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푸디스트 최영미의 슬로푸드 + 슬로라이프 02]늦어도 11월에는, 가평 살구재 마을

2019-11-25 15:52

글 : 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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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쓸쓸함’은 굉장히 큰 매력이다. 감싸안고 싶어서일까 오히려 따뜻하다. 11월은 시각보다는 청각에서 오는 쓸쓸함이다. 흔들리는 갈대 사이에 서서 느끼는 바람소리, 단풍도 다 지고 온통 갈색으로 변한 산길을 오르며 밟는 낙엽 소리, 타닥타닥 아궁이 불 때는 소리, 지글지글 끓는 찌개 소리, 철썩~ 보다는 더 리듬이 긴 초겨울 파도소리… 내 마음이 차분해지는 소리. 옷만 잘 챙겨 입으면 체온만으로 따뜻해 걷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11월이다. 11월에 떠났던 수많은 여행지 가운데 어디를 추천하면 좋을까 생각해보니, 그래도 가장 최근인 지난해 다녀온 가평 살구재마을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11월의 가평 축령산 잣나무길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피톤치드, 음이온, 산소 등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숲에 가는 것은 좋다. 잣 숲으로 가는 1킬로미터도 안 되는 길을 한 시간이나 걷는 아주 느린 길이다. 어떤 나무는 아직 파랗고 어떤 나무는 여전히 단풍이 예뻤으며, 또 어떤 나무는 이미 바짝 말라 있었다. 숲해설가와 함께 걷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는데, 정말 재밌고 좋은 프로그램이라 여기저기 많이 추천했다. 저마다 등에 돗자리를 하나씩 메고 숲길을 걸으며 몇 가지 프로그램을 하고, 마지막에 돗자리 깔고 도시락 까먹고 잠시 누웠다 오는 구성이었다. 숲에 사람이 많아서 좋기는 또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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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과 나
본래 직업이 화가라는 숲해설가는 각기 다른 사진을 한 장씩 나눠주고 사진을 보자마자 느낀 것과 닮은 숲의 재료를 3분 안에 가져오라고 했다. 우왕좌왕 정신없이 흩어진 사람들은 정말 무엇을 느낀 건지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내가 받은 사진은 도심 어느 골목 같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간판에 빨간색이 보여 그냥 빨간 단풍잎을 가져갔다. 해설가는 길 한가운데 천을 깔더니 자신이 받은 사진과 숲의 재료를 놓으라고 했다. 대부분 나뭇잎인데 돌, 나뭇가지가 좋게 보였다. 그리고 한 명씩 왜 이것을 가져왔는지 이야기해보자고 했고, 모두가 당황하는 분위기였다. 내 차례까지 오려면 아직 멀어서 재빨리 머릿속으로 스토리를 짜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한 공간을 보고 지금의 나를 떠올렸다. 나는  지금 빨갛게 타오르는 단풍잎처럼 ‘화양연화’를 보내는 중이다’, 대충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와~~’ 해줘서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다. 그런데 이날 프로그램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그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스토리를 찾아냈다. 혹여 나처럼 차례를 기다리며 지어낸 이야기일지라도, 이야기 마다 모두를 웃게 하거나 감동시키거나 즐겁게 하거나 행복하게 했다. 숲해설가는 이 활동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햇살 아래 서서 전리품 같은 이 사진을 찍어대던 사람들이 저마다 행복해하던 표정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일상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담으면 특별해진다는 마법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그날 이후 나는 40대 후반의 아름다운 날을 보내고 있으니, 말한 대로 마음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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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안에 숲
모두에게 아크릴 프레임이 하나씩 주어졌다. 그 위에 그림을 그릴 펜도 색색이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검정색 펜만 챙겼다. 마지막 도착지까지 10여 분, 스마트폰 카메라 대신 프레임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그리라는 미션을 받았다. 그러나 그 프레임을 스마트폰으로 찍는 재미에 빠져 걷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였다. 급하게 검정색 펜으로만 그릴 수 있는 소재를 찾으니 내 그림자, 아니면 그루터기 나이테 정도였다. 돗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나이 들고 갈라진 나이테를 따라 그렸다. 나무와 나무를 연결해 줄이 걸리고, 그 줄에 각자의 작품을 걸었다. 숲갤러리 완성, 우리 모두 오늘 하루만큼은 전시회 하는 화가다. 다들 부족한 솜씨를 부끄러워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얼마나 예쁜가. 각자의 프레임으로 본 숲 세상이 이렇게 다르다. 나처럼 클로즈업 컷이 있는가 하면 숲 전체를 담으려 한 와이드 컷도 있다.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칭찬했다. 모두가 기분 좋은 이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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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죽 한 컵
죽은 본래 정성이 가득한 음식이다. 재료가 푹 퍼지도록 계속 저으면서 지켜봐야 제대로 맛이 나는데, 요즘엔 재료를 믹서에 한데 넣고 갈아 그냥 우르르 끓이는 정도로 만들어 먹는다. 햇살 좋은 11월의 어느 날, 이름도 어여쁜 가평 살구재마을에서 마을 어르신들이 끓여준 잣죽은 오랜만에 맛본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느티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캠핑용 컵에 받아 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잣죽을 퍼주던 어머니의 표정, “어제부터 만들었어, 특별한 비결이 있으니 맛있을 거여”라고 하시던 양념 같은 멘트가 은은하지만 입안 가득한 잣 향과 함께 마음 가득 들어찼다. 잣 방망이로 잣송이를 열심히 내리친 다음이어서일까, 더욱 특별한 11월의 맛이었다. 
 
 
슬로푸디스트 최영미는
한마디로 말하면 ‘슬로푸드하는 사람’. 슬로매거진달팽이 발행인 겸 편집장, 슬로카페달팽이 대표, 슬로푸드 성북지부장, 마케팅 대행사 및 독립출판사 지안(志安) 대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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