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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이경미가 말하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또 다른 얼굴

2019-03-15 10:00

취재 : 이근하 기자  |  사진(제공) : 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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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명의 남자를 선택했다. 그중 어느 하나 ‘평범한’ 사랑을 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택했다. 자신의 사랑 이야기와 맞닿은 구석이 많아서. 피아니스트 이경미(경남대 교수)가 작곡가 스무 명을 이야기한다. 그가 이번에 펴낸 <위대한 작곡가들의 숨은 얼굴>은 제목 그대로 위대한 작곡가들의 숨은 이야기를 열어젖힌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이경미는?
계이름으로 숫자를 배웠다. 무언가 사달라고 엄마를 조를 때면, 엄마는 “몇 개?”라고 되물었다. 한 개는 ‘도’, 두 개는 ‘레’. “도 주세요.” “레 주세요.”

말이 트이기 전부터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음악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피아노, 음악은 그에게 연인이자 친구였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찾아낸 건 엄마였다. 가르친 적도 없거늘 어린아이가 홀로 피아노 앞에서 노래하고 떠들었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한 엄마에게 어린 딸은 또 다른 꿈이 됐다. 이경미의 나이 네 살 때다.

아홉 살 이후 7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어린 그에게 그곳 삶의 방식, 문화는 세상의 전부였다. 더불어 피아노도. 이와사키 슈쿠 선생님 문하로 들어갔다. 모든 곡을 일주일 만에 암기해야 하는 스파르타식 교육이 이어졌다. 피아노 연습을 하다 열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흐른 적도 있다. 그럼에도 생애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
 

피아노가 내 ‘밥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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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이경미가 쓴 <위대한 작곡가들의 숨은 얼굴>
중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밟은 한국 땅은 매섭게 다가왔다. 군사정권 때였다. 긴 머리는 귀 밑 1㎝까지 잘렸고 교련 시간은 내내 공포스러웠다.

“매일 집 밖에서 최루탄 냄새 나지, 학교 가면 교련 시키지… 이전과 너무 달라진 환경에 혼란스러웠어요. 햇볕 알레르기가 있어서 교련 시간에 혼자만 얼굴 빨개지는 것도 너무 싫었고요.”

그런 그를 엄마는 이해했다. 미국 유학길은 그렇게 결정됐다.

“엄마가 그랬어요. 외할머니, 엄마가 펼치지 못한 꿈을 제가 대신할 수 있으면 기쁠 것 같다고. 그래도 미국이 싫으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고 했어요. 꼭 피아니스트가 돼야 했죠.”

미국인의 눈에 비친 그는 못사는 나라에서 온 불쌍한 애였다.

“그때 한국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진 거예요. 군인이 시민을 죽이고 때리는 모습이 미국 CNN에 계속 보도됐어요. 저도 놀랐는데 미국 친구들은 오죽했겠어요.”

한국에 있는 가족과 연락 닿기도 쉽지 않았다. 몰두할 수 있는 건 피아노뿐이었다.

“교수님이 학교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수 있는 콩쿠르에 나가보라고 했어요. 정말 열심히 했죠. 오케스트라와 협연은 당연하고, 장학금도 받았어요. 그때부터인 것 같아요. 내 밥줄은 이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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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피아노 앞에 앉다

그의 연주는 세대와 나라를 초월했다. 수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위안을 안겼다. 러시아 문인 아카데미에서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최고예술가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돌보지 못했다. 대가는 혹독했다.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방사선 치료를 받을수록 더욱 예민해졌다. 갱년기 후유증까지 더해지면서 ‘나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어요. 피아노만 치면서 살아온 지난 시간이 억울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가족이 있었고, 제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어요.”

그의 부모님은 딸의 투병 소식에 담담했다. 아니 담담한 척했다. 그가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도록 더욱 단단해졌다. 의사인 남동생이 도우미를 자처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정각 9시면 누나를 태우고 병원을 오갔다.

“투병하면서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고, 무기력해졌어요. 종일 침대에 있었죠. 그렇게 음악과 결별하려 했던 저를 다시 일으킨 사람이 동생이에요. 동생이 ‘누나는 피아노 칠 때가 제일 예쁘다’면서 본인이 좋아하는 곡, 제가 칠 수 있는 곡을 일부러 틀어놓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저를 지켜보면서 동생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건 2011년 10월 어느 날, 일본 도쿄 산토리홀 무대였다. 산토리홀은 그가 데뷔 무대를 연 곳이자 한국인 최초로 연주한 곳이었다. 신일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공연을 앞두고 갑작스레 빈 협연자 자리를 그로 채우고 싶어 했다. 공연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을뿐더러 2년 동안 연주하지 않은 터라 두려웠다.

“가족들이 애원했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을 위해 연주해줄 수 없느냐고요. 그 말을 듣는데 머릿속에 불꽃 하나 켜진 듯한 기분, 이전에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 들었어요.”

그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자신을 조종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미친 듯이 2개월을 피아노 앞에 머물렀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피아노를 ‘밥줄’이라고 여겨온 그가 음악을 더욱 사랑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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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사랑과 닮다

돌이켜보면 그는 자신과 모차르트의 삶이 맞닿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사랑’은 더욱 그렇다. 그의 새 책 <위대한 작곡가들의 숨은 얼굴>(조선뉴스프레스) 중 모차르트 이야기에 가장 애착을 갖는 건 그래서다.

모차르트는 소프라노 가수 알로이지아 베버를 사랑했다. 알로이지아를 위한 아리아를 작곡해 청혼까지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지독하게 차가운 냉대였다. 모차르트는 평생 알로이지아를 그리워하며 산 것으로 전해진다. 알로이지아의 여동생과 결혼한 것 또한 그리움의 표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모차르트는 행복하면서 슬픈 사람이에요. 사랑스럽고 우아한 곡을 쓰고 연주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랑받지 못했잖아요. 제게도 사랑은 슬픈 기억이에요.”

열일곱 살, 영어 선생님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선생님은 하얗고 큰 집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선생님이 자주 가는 게이바에 일부러 저를 데려갔어요. 두 눈으로 봐야 정신 차린다고요. 간신히 선생님을 잊고 좋아하는 남자가 또 생겼는데, 이번엔 제 게이 친구가 그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한 남자를 두고 여자와 남자가 좋아한 거죠. 그 남자에게 선택을 맡겼는데 결과적으로 저는 아니었어요.”

그 후 대학 생활 중 유고슬라비아 출신 피아니스트를 사랑하게 됐다. 그 남자도 게이였다.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들어갈 수 없는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참 이상한 게 상대방이 나를 안 좋아하면 그 사람이 더 좋아지는 거예요. 오기인지, 미련인지 어쨌든 그 감정에 빠져서 오랫동안 헤맸어요.”

그가 작곡가 스무 명의 사랑을 풀어내며 느낀 감정은 일종의 공감이었다.

“그 사람들의 아픔을 너무 이해해요. 다른 사람들이 읽으면 ‘어머 정상 아냐, 하여튼 딴따라는 알아줘야 해’라고 할 순 있겠지만 나는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는 이번 책이 그들을 이해하는 또 다른 통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테면 ‘다다다 단!’ 하는 소리, 흐트러진 머리칼이 베토벤과 함께 연상할 수 있는 모든 이미지였다면 그가 사랑한 여인의 집에서 연주하는 모습, 구구절절 사랑편지를 쓰는 모습까지 더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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