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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알다 소프라노 홍혜경

c-cast+ a long journey

2014-07-21 15:04

방송, 무대…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 스타는 탄생한다. 하루아침에 뜨고 지는 반짝 스타는 많지만, 롱런하는 스타는 얼마나 될까? 소프라노 홍혜경은 지난 30년 동안 꿈의 무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주역으로 서왔다. 치열한 뉴욕 무대에서 그녀가 쌓은 내공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



쉰다섯의 소프라노는 16세의 줄리엣을 연기하는가 하면, 농염한 창부 마농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프리마돈나 홍혜경. 그녀 앞에서는 나이도, 수시로 변하는 월드 트렌드도 무색해진다. 전 세계 재능 있는 가수들이 메트 오페라를 거쳐가는 동안 그녀는 변치 않은 모습으로 매 시즌 주역으로 출연해왔다. 정상에 오르기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려울 터. 데뷔 3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그녀를 만났다.



첫 무대, 아직도 생생한 기억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메트 오페라)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 무대 중 하나다. 홍혜경은 동양인 음악가가 흔치 않던 30년 전 이 무대에 처음 섰다. 1982년 한국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2년 뒤의 일이다. 당시 그녀는 거장 제임스 레바인이 지휘봉을 든 모차르트 오페라 <티토 황제의 자비> 무대에서 티토 황제가 총애하는 세르빌리아 역을 맡았다. 

메트 오페라에 선 지 30년이나 됐어요. 데뷔 당시 그날의 무대와 그 감흥을 기억하시나요?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죠. 줄리어드 예비학교부터 대학, 그 이후의 교육과정까지 늘 항상 링컨센터(메트 오페라가 속한 곳)를 꿈꿔왔기 때문에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 데뷔하기 2년 전 다른 역으로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제게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거절한 후, 정확히 2년을 기다려 정말 제게 맞는 역할로 데뷔하게 됐죠.

오페라는 3~4년 전부터 기획을 하고 섭외를 해요. 그래서일까요. 나의 첫 데뷔 무대에서 내가 무엇을 입고, 어떤 음악을 하고, 머리는 어떻게 했는지, 그 당시의 모든 것들이 아주 생생해요. 아름답고 젊은 왕비 역할이었어요. 품위 있는 연기가 필요했죠. 너무나 즐겁게 연기했던 기억이 나요. 18세기 그림에서 튀어나온 여자와 같았다는 극찬을 <뉴욕타임스>를 통해 들었어요. 성공적인 데뷔였다고 생각해요.

노래 인생 중 가장 좋았던 날이 데뷔 날인가요?
‘가장 좋았던 날’이라기보다는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1984년 11월이었어요.

내게 어울리는 배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는 오페라 가수로서 얼마나 중요한가요?
오페라 가수로서의 삶엔 유혹이 많아요. 음악의 세계는 참 좁기 때문에 누군가가 노래를 잘하면 전 세계 어디서든 초청이 오기 마련이고, 여러 군데의 초청을 받다 보면 사실상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어려운 초청도 많아요. 예를 들면, ‘넌 동양인이니 <나비부인>을 해라’, ‘<투란도트>를 해라’ 같은. 사실 젊은 성악가들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유혹을 떨쳐내기가 참 힘들어요. 그러나 그러다 보면 내 목소리를 잃기 마련이죠. 제 목표는 오페라 가수로서 오래가는 것이었어요. 목소리를 잃지 않고, 제대로 성장시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음악 인생을 살아오며 너무나 훌륭했던 성악가들이 사라지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젊은 성악가들은 테크닉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젊은 에너지, 그 하나만으로도 소리를 낼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이것이 굉장히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의 목소리는 35살에 완전히 성장하거든요. 올바른 테크닉을 알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내 목소리의 한계를 깨닫고, 내 목소리에 꼭 맞는 곡을 골라서 연습을 해야만 정말 내 목소리를 찾는 거예요. 나는 이 사실을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깨달았어요. 그렇기에 내 목표는 35세 때 비로소 성장한 제 목소리를 55세까지 목표에 맞게 최정점에 세우는 것이었죠. 그러나 목청도 세포로 이루어졌고, 세포는 죽기 마련이에요. 55세 이후부터는 내려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55세가 되기 전까지 내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성취가 아닐 수 없고, 나는 이를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사람은 자신만의 카테고리와 형태가 있어요. 모두의 얼굴과 근육이 다르듯, 개개인의 목청도 다 다르기 마련이죠. 나에게 맞는 레퍼토리를 찾아보니 푸치니(그중에서도 무겁지 않은 가벼운 푸치니)의 벨칸토, 모차르트, 베르디 등이었어요.

마에스트로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두고, 성대의 비타민이라 말했어요. 베르디와 바그너 같은 곡은 사실 잘 질러야 하는 곡들이에요. 그러나 모차르트는 자신의 목청을 유연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야만 비로소 할 수 있는 오페라거든요. 내 목청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분명히 문제가 발생하는 곡이죠.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NO를 잘 해야
홍혜경이 메트 오페라 무대를 꾸준히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은 수양과 절제였다. 성공적인 데뷔 후에도 350회가 넘는 무대에서 40개 이상의 배역을 소화해왔지만 홍혜경은 커리어에 급급하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본인의 목소리에 맞는 작품을 찾았고 또 자신의 목소리가 배역에 맞을 때까지, 진심으로 배역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2004년이 되어서야 불렀지만, 그것은 홍혜경을 대표하는 배역 중 하나가 됐다. 

작품을 잘 선택한 것 외에도 건강 등 여러 가지 비결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같은 위치에서 오랫동안 정점을 유지하기까지 어떤 노력이 있었나요?
사실 지금까지는 테크닉과 오페라에서의 목소리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오페라라는 단체에서의 커리어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사회생활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에는 오페라 ‘디바’라는 호칭이 있어요. 굉장한 칭찬으로 알려진 호칭이에요. 그러나 미국에서는 디바라는 호칭이 ‘이기적이고, 고집 세고, 자신만 생각한다’는 의미를 많이 내포하죠. 나는 디바라는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메트에서는 여러 사람이 서로 존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함께 발을 맞춰서 자신의 일을 열심히 완벽하게 해내야만 하죠. 

소프라노에게는 많은 짐이 있어요. 노래하는 사람이 노래를 완벽하게 잘해야만 티켓이 팔리고, 메트라는 커다란 단체가 유지되겠지요. 이는 굉장히 쉽지 않은 부담이에요. 다른 사람보다 더 잘해야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악기인 내 성대에 대한 책임이 굉장히 커요.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해도 목소리가 상하는 등 여러 애로사항이 많거든요. 

우리가 만드는 환상 같은 세상 속에서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사실 그러다 보면, 너무나 자신에게 고취되고 취해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죠. 나는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해요. 그러나 나는 스스로 달라지지 않으려 노력해요. 나의 철학과 나의 믿음(신앙)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동등하고 평등해요.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 있어요. 그게 참 중요한 것 같아요. 특히 커다란 단체에서는 더더욱 말이에요. 굉장히 이기적이고 스스로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은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결국 외면당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음악적인 목적과 인간으로서의 목적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것이 내 인생에 커다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해외에서 활동하는 동양인 성악가로서의 삶은 어땠나요? 유럽에서는 특히 현지 성악가보다 동양 성악가의 실수에 더 엄격하다고 들었어요.
아직까지도 미국에서는 차별이 있어요. 동양인뿐 아니라, 흑인들에게도 상당히 가혹하죠(무대에 잘 세워주지 않는 등). 그렇기에 동양인은 더 잘해야 하고, 더 독특해야 해요. 노래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음악인으로서 존중받는 것이 중요하죠. 사실 노래를 할 때마다 모두 잘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러나 존중받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100% 다 발휘하지 못해도 어느 정도 이해받게 되죠(물론 계속 못하면 안 되지만). 1972년 당시, 전부 우리를 오리엔탈이라 말했지만 우리는 오리엔탈이 아니에요. 우리는 ‘아시안’이죠. 그때 당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노동을 했고, 일본과는 진주만 등 시대 상황으로 적대감이 강했어요. 그때 당시 굉장히 많은 차별을 당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하지만, 소니, 삼성, 기아, 현대 등 경제적으로 아시아가 힘을 가지게 되자 동양인에게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또 1980년대엔 스시가 들어왔어요. 젓가락을 사용하게 되고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긍정적으로 바뀌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무대에 동양인이 선다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어요. ‘저 아이가 해낼 수 있을까?’, ‘저 동양인이 가능할까?’ 온갖 의심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더 잘해내야 오래 기억에 남고, 더 인정받게 되죠. 저는 그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또 언어 장벽을 허무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영어로 동등하게 싸워내야만 했어요.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은 짓눌리기 마련이에요. 끊임없이 노력하고 열심히 해냈어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만, 이 순간에도 인종차별은 분명히 존재해요.

신인은 부담이 많잖아요. 이번 역을 거절하면 또 들어올 수 있을지.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나요?
기획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어요. 제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서는 ‘NO’를 잘 해야 한다고. 나는 커리어를 시작하자마자 아이가 있었어요. 내가 아이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죠. 완벽하게 모든 컨디션에 맞는 배역을 해내기는 분명 어려웠죠. 그렇기에, 첫 데뷔가 내겐 정말 중요했어요. 나의 타입 캐스트가 생기기 때문에, 나의 목소리에 맞는 레퍼토리의 아름답고 우아하고 사랑이 충만한 역할을 선택했고, 나는 그 배역들에게 열정을 가졌어요. 제가 하기 싫은 역할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죠. 또 캐스팅하는 그들이 나를 기다리게 만들고 싶었어요.

새 도시에 가면 늘 유일하게 저를 인터뷰 하고 싶어 했어요. 동양 여자가 서양 음악을 하는 것을 굉장히 신기해했죠. 많은 부담이 있었지만, 저는 늘 잘 해내고 싶었고 그들의 호기심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어요.

작품 선정에 굉장히 신중한 편이에요. <라 트라비아타>도 굉장히 늦게 도전했고요. 앞으로 또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이 나이에도 내 목청에 맞지 않는 노래를 하면 소리가 빨리 깨져요. 아시아 오페라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투란도트>(중국), <나비부인>(일본) 등이 생각나죠. 2년 전에 <나비부인> 캐스팅을 받았는데 사실 나비부인이라는 역할이 미국 남자가 와서 즐기고 버리는… 그런 역할이라서 처음에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만약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오페라에 저를 소개한다면 기꺼이 도전하고 싶어요. 좋은 이미지를 가진…. 미국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을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극적인 감정 표현과 불같은 성격으로 생각하곤 해요. 극적이고 풍부한 감정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사실 <나비부인> 캐스팅을 받은 상태인데, 진지하게 고려해보는 중이에요. 생각해보면 굉장히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성대에 많이 무리가 될 것 같아 여러 고민을 하고 있어요. 

사진제공 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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