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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아빠 송종국의 인생 후반전

2013-05-14 14:40

2002년만 해도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의 주인공 송종국이 일곱 살 딸에게 하트를 발사하는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과묵한 미드필더’에서 ‘국민 딸바보’가 된 송종국의 반전카드를 뒤집어봤다.

아빠의 눈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아들 같고 딸 같다. 더구나 ‘국민 딸바보’의 눈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뭇 아이들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코이카의 꿈> 촬영차 엘살바도르에 갔던 송종국은, 그때 만난 아이들을 잊지 못해 코이카(KOICA, 국제협력재단) 홍보대사가 됐다. 중미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이 나라에는 열대성 기후에서만 자라는 맹그로브 숲이 있다. 학교나 유치원에 다녀야 할 나이의 아이들이 이 숲에 나와 조개를 캔다. 생계를 위해서다. 송종국은 아이들을 돌봐줄 곳도, 공부할 곳도 없는 이곳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보육원을 짓고 왔다.

만약 아빠가 아니었다면

엘살바도르에 다녀온 지 1년이 지났는데, 잊히지 않던가요, 그 아이들이? 제가 만약 아빠가 되기 전에, 결혼하기 전에 그곳(엘살바도르)에 갔으면 그렇게까지 마음에 남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우리 아이들은 엄마 아빠 사랑을 받으면서 풍요롭게 자라는데, 지아, 지욱이 또래의 아이들이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자라는 걸 보니까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아빠! 어디 가?>에서도 앞에 나서는 일이 잘 없어 쑥스러움이 많아 보였는데, 홍보대사를 한다니 좀 의외긴 했어요.(웃음) 다녀온 뒤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홍보대사라는 게 ‘이런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자랑하는 거 같아 좀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렇게라도 많은 분들이 알게 돼서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니까요. 멀리멀리 돌아서라도 그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지아와 지욱이는 이제 아빠 송종국만큼이나 유명한 아이들이 됐다. 특히 지아의 인기가 높아서 요즘은 그도 ‘지아 아빠’ 혹은 ‘국민 딸바보’라 불리는 일이 더 많다. 하지만 송종국의 어린 시절은 지아나 지욱이보다는 엘살바도르 아이들에 가깝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은 마을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이었다. 아버지는 중동에서 일을 하며 가족들의 생활비를 보내왔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어머니는 알뜰하게 절약해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가세가 기운 건 한국에 돌아온 아버지가 시작했던 사업이 잇달아 어려움을 겪으면서다. 어두워진 집안 분위기에 예민하던 사춘기 소년은 엇나가기 시작했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큰 아이들과도 곧잘 싸움이 붙었다. 그런 그를 붙잡아준 게, 바로 축구였다.

코이카를 통해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한 축구교실을 열었죠. 추운 날이었는데도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더라고요. 송종국 선수에게도 이런 키다리 아저씨 같은 분이 있었나요? 계…셨죠. 저는 중학교 때 축구를 시작했어요. 다른 선수에 비해 늦은 편이었죠. 어릴 적에 저희 형편이 무척 어려웠거든요. 축구 같은 운동은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근데 그때 감독님이 회비나 다른 비용을 받지 않고 축구를 할 수 있게 배려해주셨어요.

지난 가을 SBS 토크 프로그램 <강심장>에 출연한 송종국은 “중학교 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근처 고등학교에 찾아가 구멍 나고 해진 축구화를 몰래 주워신었다”고 했다. 오기와 끈기로 공을 찬 끝에 체육특기생으로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다. 훈련이 끝나면 매일 혼자 헬스를 했다.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키가 자라고 몸도 더 좋아졌다. 이 준비된 선수를 알아본 사람이 바로 히딩크 감독, 바야흐로 2002년이었다.

히딩크 감독의 ‘황태자’로 알려진 터라 축구를 하면서 어려움이 있었던 줄은 몰랐어요. 대학교 때 집안 전 재산이 3백만원이었을 정도니까요. 발목 부상이 잦아서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불운한 선수’였죠.

월드컵 전 경기를 지치지 않고 뛰던 ‘강철 미드필더’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네요. 국민들이 공격이나 수비가 아닌 ‘미드필더’라는 포지션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죠. 미드필더가 공격과 수비를 겸하는 역할을 하다보니까, 많은 분들이 물어봐요. 공격이 더 어렵냐, 수비가 더 어렵냐.(웃음) 제 대답은 둘 다 어려워요. 근데 수비가 좀 더 어려워요. 공격은 골을 못 넣을 수도 있지만, 수비는 골을 못 막는 순간 바로 승부와 연결되니까요.



어느 멀티플레이어의 고백

2002년 월드컵에 혜성처럼 나타나 세계인의 마음을 누비던 국민 미드필더가 이제는 ‘국민 딸바보’가 되어 전국을 누비고 있다. 스물셋의 푸릇푸릇하던 선수는 이제 서른넷의 가장이 됐다.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 축구해설위원으로 방송인으로 또 ‘송종국 FC’의 대표로 그리고 무엇보다 ‘지아 아빠’로 1인 다역을 하는 중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멀티플레이‘를 하는 건 그대로네요.(웃음) 축구선수 송종국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았는데요. 지난해 2월, 해외 원정경기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한국에서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임종을 지키지도, 바로 가서 뵙지도 못했죠. 제가 축구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어머니예요. 제가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워준 분도 어머니고요. 그런 어머니가 안 계신 지금, 더 이상 축구를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더라고요. 더구나 경기 때문에 어머니 곁을 못 지켰다는 괴로움이 컸어요. 그때 은퇴를 결심했죠.

아내 박잎선은 남편의 은퇴시기를 생각할 때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전 국민에게 기적 같은 행복을 선사해준 월드컵 영웅이, 은퇴경기도 간다는 인사도 없이 그라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마음의 문도 닫았다. 말수도 적어졌다. 아이들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 되어갔다.

그 슬픔에서 빠져나오게 된 계기가, <댄싱 위드 더 스타>였나요? 평소의 저라면 절대 나가지 않았을 거예요. 방송도 어려운데, 춤을 추라니요.(웃음) 근데 그때는 워낙 절박할 때라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의지가 강했어요. ‘못 할 게 뭐가 있나!’라는 생각이었어요. 그게 뭐였더라도 나갔을 거예요. 그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안 했겠지만.

그 도전의 여파가 자연스럽게 축구해설위원으로 이어지게 된 건가요?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해설위원 제의가 왔어요. 그때도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있었죠. 동료들의 경기를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발음도 부정확하지 않을까 싶었고요. 연습을 많이 했어요. 막상 하고 보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내 박잎선 씨도 해설할 때 ‘저 사람이 내 남편이라고 생각하면 설렌다’고 하더라고요. 선수가 아닌 해설위원의 눈으로 보면 경기가 달리 보이나요? 달라요.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경기장 안에 있으면 경기 전체에 대한 판단을 하기 어려워요. 지금 내 앞의 선수, 공을 봐야 하니까요. 은퇴하고 나니까 전체를 보는 눈, 선수를 보는 안목이 생기거든요. 전에 선수 생활할 때는 스카우터 분들이 선수를 뽑을 때 ‘대단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떻게 저렇게 잘 알지?’ 싶어서요. 이제는 알 거 같아요. 각 선수들의 장점이나 기량을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송종국 FC’ 축구교실, 주말에는 축구해설, 2주에 한 번은 <아빠! 어디 가?> 촬영. 쉴 틈 없는 일정을 소화하는 요즘이지만, 그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는 존재가 있다. 캥거루처럼 아빠 품에 쏙 안기는 딸, 지아다. 지아를 품에서 내려놓지 않는 건 집에서든, 밖에서든, 카메라 앞이든 아니든 그대로다. 부녀에게는 화제가 되는 게 이상할 정도다.

지아를 보는 아빠의 눈에서 하트가 뿅뿅 나오는 거 같습니다. 원래도 아이를 좋아했나요? 아이는 원래 좋아했어요. 조카들이나 동네 아이들을 많이 좋아했죠. 지아는 일단, 정말 예쁘잖아요.(웃음) 오늘 이 넥타이도 지아가 골라준 거예요.

<아빠! 어디 가?>는 아빠 송종국의 성장기 같기도 해요. 딸과는 워낙 다정했지만 다른 분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처음이랑 많이 달라졌거든요. 아무래도 처음에는 낯을 가렸죠. 저는 운동선수였으니까, 방송하는 분들을 자주 접할 기회가 없었잖아요. 그나마 지아랑 같이 있다보니까 평소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온 거 같아요. 지금은 여행 다니면서 많이 친해져서 편해요.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도 놀랍지만, 서로 음식을 만들어서 옆집에 나눠주는 모습은 뭉클하기까지 하더라고요. 아, 그랬어요? 그 장면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찍은 건데. <아빠! 어디 가?> 하면서부터 정말 뭘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게 되는 거 같아요.

송종국 대표나 위원보다, ‘지아 아빠’라고 불릴 때 더 행복해 보여요. 한편 너무 유명해진 터라 아이가 의식하지 않을까, 자라는 데 괜찮을까 싶기도 하고요. 다행히 지아가 많이 면역이 되어 있어요. 방송 전에도 저랑 같이 나가면 사인 공세를 받고 같이 사진 찍고 하는 일이 많았거든요. 그런 일에는 익숙해진 거 같아요. 지아는 아직 유치원에 다녀서 또래들도 전과 다르게 대하는 것 같지는 않고요. 다만 이제 학교에 들어가면 학년도 6학년까지 있고 하니까 알아보는 사람도, 웅성대는 사람도 많을 텐데 좀 걱정이 되긴 하죠. 얼마 전에 (윤후) 입학식장이 마비됐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긴 했어요.

아이들이 카메라 앞에서도 자연스러운 이유는, 방송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아무래도 자기가 TV에 나오는 걸 보면 의식하게 되니까 안 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재밌는 건 지욱이도 절대 안 본다는 거예요. 언젠가 자기도 갈지 모른다는 대비를 늘 하고 있는 거 같아요.(웃음) 제가 지아한테 “방송 보면 이제 여행 못 간다”라고 말하는 걸 듣고는 그다음부터는 자기도 절대 안 봐요.



다문화 가정 아이들과 함께하는 축구교실에서 송종국.

난 행복합니다, 그대를 만나서

이날 축구장에서는 지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송종국 홍보대사의 품에는 더 많은 아이들이 안겨 있었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한 축구교실’에 참여한 아이들은, 꽃샘추위에 반팔 유니폼을 입고도 추운 줄 몰랐다. 낡은 운동화는 코이카와 송종국 FC에서 준비한 새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아직 새싹이 채 움트지 않은, 초봄의 운동장을 누비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린 송종국 선수의 모습이 겹쳤다. 집도, 부모님도, 가난도 잊고 오직 공 하나만 쫓아 달릴 수 있었던 충청도 어느 산골의 한 아이. 지금 그의 고향에는 ‘송종국 도로’, ‘송종국 기념관’이 생길 정도로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하지만 송종국은 영웅이나, 한때의 스포츠 스타로 머물지 않을 생각이다.

‘송종국 FC’에서는 엄한 대표님으로 유명하던데요? 한국에는 유소년 축구교실이 아직 자리 잡기 전이잖아요. 시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코치진을 뽑을 때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때 엄격하게 관리했어요. FC 바르셀로나나 유럽 프로리그를 보면, ‘유소년 축구교실’ 출신 선수들이 대부분이에요. 내공이 다르죠.

하지만 유소년부터 시작하는 건 정말 긴 과정이잖아요. 저희 축구교실에서는 5학년 이상은 받지 않아요. 지금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면 중등부를, 고등학생이 되면 고등부를 만들 생각이에요. 나중에는 송종국 FC를 통해 국가대표를 배출하는 게 목표고요.

인내의 과정이기도 하겠네요. ‘좋은 선수가 좋은 감독이 되기 힘들다’는 말을 조금씩 이해하는 중이죠. 사실 세계무대에서 뛴 선수들은 다른 선수를 가르치지가 쉽지 않거든요. ‘이게 왜 안 되지?’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지금은 백지 같은 아이들에게 1부터 가르치니까, 정말 자기와의 싸움일 때가 있죠. 주변에서는 코치나 지도자의 길을 바로 가지, 왜 어려운 길을 택했느냐고도 하세요.

왜 택했나요? 네덜란드에서 뛸 때 다짐했거든요. 그 나라는 유럽에서도 유소년 축구교실이 굉장히 잘된 나라예요. 히딩크 감독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고요. 그곳 선수들을 보면서, 어릴 적에 체계적으로 배우는 게 이렇게 중요한 거구나 알았어요.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제가 느낀 거죠.

여러모로 의미 있는 나라였네요. 그렇다면 송종국 선수의 롤 모델은 아무래도…. 히딩크 감독님이죠.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 중 한 분이세요.

아빠는 여기에 있을 거야
“저희 지아랑 지욱이도 여기 와서 축구를 같이 배워요.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려고 해요”라고 말하는 그에게는 아빠의 얼굴과 축구지도자의 모습이, 공을 차고 싶었던 어린 소년과 축구로 일가를 이룬 스타플레이어의 모습이 함께 보였다. 밖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그가 왜 느닷없이 은퇴를 결정했는지, 숫기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능에 나오게 됐는지,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누가 봐도 험난한 길인 ‘유소년 축구교실’에 떡 하니 ‘송종국 FC’라는 이름을 건 연유는 무엇인지. 언뜻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결정들에, 오직 축구로 버텨온 한 남자의 인생이 있었다. 그가 축구교실을 선택한 큰 이유 중 하나는 가족이다. 코치나 지도자의 길을 가면 가족들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다. 훈련과 경기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멀리서 떠나보낸 그는 ‘지금, 여기’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남았다. 화려한 경기보다 소박한 축구 곁에 남는 걸 택했다. 그 덕분에 지아가 “아빠! 어디 가?”라고 물어도 그는 한결같이 말해줄 수 있다. “아빠, 어디 안 가.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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