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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성일이다

무서울 것 없다

2011-12-29 09:47

prologue 인사동 거리
EXT - 낮
인사동 네거리를 걷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마주 오는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수군거린다. 남자, 오랫동안 익숙한 일이지만 어깨를 펴고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영하의 날씨에도 손은 주머니에 넣지 않는다. 비둘기색 중절모를 쓴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중절모 사이로 보이는 흰머리와 굵은 주름, 신성일(75)이다.

*  시나리오에 삽입된 ‘EXT’는 ‘external’의 약자로 ‘야외촬영’이라는 뜻, ‘INT’는 ‘internal’의 약자로  ‘실내’ 혹은 ‘스튜디오  촬영’이라는 뜻, ‘NA’는 ‘narration(내레이션)’의 약자다.


S#1. 만남
화랑 INT - 오후 2시

화랑에 도착한 남자, 3층 전시실로 발길을 돌린다. 손에는 캐주얼 카디건 한 벌, 정장 느낌의 롱코트가 한 벌 들려 있다. 전시실 탁자에 앉아 있던 기자, 일어난다. 갤러리 안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남성용 향수 냄새가 그보다 먼저 도착한다.

기자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 뵙기로 한 기자입니다.
신성일 (선글라스 벗으며) 어, 그래요. 앉아요. 앉으라고. 그래, 지금부터 이야기 시작하면 되나요?
기자 네. 요즘 인터뷰가 많으시죠. 같은 이야기가 반복될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신성일 그래도 괜찮아요. 내가 같은 대답을 안 하거든요. 앵무새처럼 똑같은 이야기하는 게 싫어서. 오늘 하는 이야기도 아마 다른 데선 안 한 얘기가 될 거요.
기자 다행이네요. 그럼 시작할까요?

S#2. 세 번의 기회

남자(NA)_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께선 내가 어린 시절부터 ‘기회는 앞머리 털밖에 없다. 오면 정면으로 움켜잡아야 한다’는 일본 속담을 들려주셨다. 나는 그 속담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59년 신필름(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부부가 운영하던 영화사) 입사에 이어 1962년 두 번째 기회(영화 <아낌없이 주련다>)가 찾아왔다. -신성일, 《청춘은 맨발이다》, 37쪽

기자 세 번째 기회는 언제였나요?
신성일 지금이요. 전에 한 권 내긴 했지만 그건 인터뷰 모음집이었고, 제대로 내 이야기가 담긴 책은 처음이에요. 스포츠지 연재로 시작했다가 일간지에도 같이 실리게 됐고, 그게 모여 책이 됐어요. 오랫동안 생각했던 일인데 이뤄진 거지. 제일 많이 묻는 게 “이게 다 사실이냐?”는 거예요. 그럼. 여기 이야기는 다 팩트(fact)라고. 불명예스러워도 사실이라는 게 중요해요. 나의 실패도, 나의 실수도 하나도 가감 없이 담았어요. 치부까지도요. 
기자 주변분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신성일 조영남 씨가 그럽디다. 이 형은 안 해도 될 이야기도 다 한다고.
기자 혹시 인터넷, 하십니까?
신성일 아니, 전혀. 

S#3. 엄앵란 그리고 김영애
과거 - 대한상공회의소 출간기자간담회장 INT - 낮

신성일, “이건 아내 엄앵란도 모르는 이야기다”라며 운을 뗀다. ‘1970년 동아방송 아나운서였던 김영애와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사랑을 나눴고 3년 후 그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다. 책 속 밀봉 부분에는 고인이 신성일의 아이를 가졌다가 지운 사연도 실려 있다. 간담회 후 인터넷에서는 그의 발언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다. 대부분 불편하다는 반응이다. 불륜 사실을 이렇게 당당히 밝히다니 부인(엄앵란)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그가 광고모델로 활동 중인 외식업체에서는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며 항의 공문을 보내왔다. 

기자 한 누리꾼은 엄앵란 씨와 신성일 씨가 성별만 바꿔 다시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올렸습니다.
신성일 다시 결혼한다면… 다른 사람이랑 해야 하지 않겠소?
기자 혹시 스스로 결혼과 안 맞는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신성일 철학자가 그런 말을 했다지. 결혼은 해도 후회, 하지 않아도 후회라고 말이에요. 만약 기회가 있다면 다음번엔 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 아무리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고 해도, 각자의 독립된 공간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알기론 부부가 한 침대를 쓰는 게 숙면에 방해가 된다는 연구결과도 있었어요. 엄앵란 씨와 나는 오래 전부터 1㎞ 거리를 두고 따로 생활해왔어요. 나는 술, 담배를 안 하는데 다른 식구들은 그렇질 않으니 내가 자리를 피할밖에. 지금은 국회의원 시절 형님이 마련해준 대구의 아파트와 영천에 있는 한옥을 옮겨 다니며 살고 있어요.
기자 부인의 지원이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신성일 아니라고는 못해요.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죠.
기자 광고모델 활동에도 타격을 입으실 듯 보입니다.
신성일 난 모델이 아니에요. 영화인이지. 그걸(모델) 못 하게 된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안 하는 건 아니란 말이요.

   

S#4. 나의 맨발
화랑 INT - 해질녘

사진촬영이 시작됐다. 신성일, 재킷을 벗고 카디건으로 갈아입는다. 갤러리에 어울릴 만한 것으로 직접 고른 옷이다. 의상 준비부터 전시장 소품의 위치까지 직접 세팅한다. 마음에 드는 포즈가 나오면 “지금 찍으라”며 주문을 하기도 한다. 급기야 전시실 바닥에 앉은 신성일 앞으로 조명이 설치된다.

기자 (촬영을 지켜보다) 혹시 신발과 양말을 벗어주실 수 있으세요? 맨발이면 좋을 거 같아요.
신성일 책이 나온 후론 왜들 그렇게 내 발을 보고 싶어 하는지. (라고 하면서도 신발의 끈을 푸는 신성일. 그의 발은 옆이 툭 튀어나와 있다. 무지외반증이다.)
기자 발 모양이 꼭 오래 하이힐을 신은 여자 같네요.
신성일 단거리 마라톤을 오래 했더니 이렇게 됐어요. 단거리는 발꿈치를 들고 뛰거든, 그럼 여자들이 하이힐 신는 것처럼 발모양이 바뀌어요. 수술을 하란 얘기도 들었는데 그럼 2개월 동안 꼼짝 못한다고 해서 말았어요. 두 달 동안 운동을 못 하면, 난 안 돼요.
기자 자기관리인가요?
신성일 그럼요. 배우는 항상 몸을 준비해놔야 됩니다. 나 혼자만의 몸이 아니잖아요.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모르니까요. 어떤 의상을 입게 될지도 모르고.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배가 나오면 옷 태가 안나요. 영천 집에는 샌드백을 달아놨어요. 아, 지난달엔 홀인원(골프에서 티샷을 한 공이 단번에 홀로 들어가는 일)도 했다고. 

S#5. 어머니 그리고 호떡장사
과거 - 대구 한옥집 INT - 새벽

추운 겨울 초등학생 신영(신성일의 본명, 강신영)이 학교 갈 준비에 한창이다. 할머니는 밤새 알전구를 넣어 기운 양말을 건넨다. 양말을 신고 집을 나선 신영은 양말을 벗어 담장 안에 던져놓고 맨발로 학교에 간다. 기운 양말을 신고 학교에 가는 게 자존심이 상한다.

기자 자존심은 원래 그렇게 셌나요?
신성일 어릴 적부터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들으면 안 된다”는 거랑 “잘생긴 만큼 인물값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할머니와 어머니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저흴 키우셨는데 고등학교 때 빚쟁이들이 집에 몰려온 적이 있어요. 흠씬 두들겨 맞고 빈손으로 서울에 올라왔죠.
기자 배우가 될 생각으로 온 건가요?
신성일 전혀요. 명문대 들어가 의사나 판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내가 다니던 학교가 명문(경북중·고)이었어요. 공부도 못하질 않았고요. 그땐 배우가 대접받는 시대도 아니었고, 딴따라 취급받던 때니까요. 근데 빈털터리가 되고 보니 대학에 갈 엄두도 못 내겠더라고요.
기자 어머니와는 어떻게 다시 만나셨나요?
신성일 어머니가 저를 찾으셨죠. 청계천에 오물이 둥둥 떠내려가는 한쪽 구석에서 어머니랑 호떡 장사를 했어요. 잘 안 됐죠. 바로 앞에 정말 잘되는 호떡집이 있었거든요. 나중에 배우가 돼서 판자촌이나 해방촌 같은 델 가면 유난히 눈에 띄는 애들이 있었어요. 집이 갑자기 망해 이쪽으로 온 아이들. 딱 보면 알겠더라고.
기자 배우로 성공한 후에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나요?
신성일 그럼. 영화제작할 때는 어려웠던 적이 많았죠. 빚쟁이, 협잡꾼들이 몰려와 난동을 부릴 때도 있었고. 그런 일들은 다 애들 학교 보내놓고 당했어요. 애들은 험한 꼴 안 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얼마 전에 우리 애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나더니 그런 소리를 하더라고. 생각해보면 친구들은 아버지 사업이 망하면 달동네로 가기도 하던데 우리는 그런 일 한 번도 안 겪고 왔다고. 부모가 다 막아줬구나, 하는 걸 이제야 알겠다고.    

S#6. 교도소에 핀 장미꽃 한 송이
과거 - 대구 화원교도소 면회소 INT - 아침

엄앵란(NA)_ 2005년 10월 무렵 대구 화원교도소에서의 일이다. 무사같이 어깨에 힘주던 신성일이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 아닌가. 엄앵란에게 전해줘.”라면서 교도관을 통해 내게 장미 한 송이를 전달해왔다. 남편은 10월의 교도소 추위 속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장미를 내게 선물하기 위해 꺾은 것이다. 난 철창 앞에서 “앞으로 선물 안 줘도 돼. 난 이 장미 한 송이로 일생을 갈 거야. 고마워.”라고 외쳤다. 그이가 내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을 일평생 처음 보았다. -엄앵란, 《청춘은 맨발이다》, 342쪽

기자 10월에, 장미가 피어 있었네요.
신성일 교도소에는 특별 면회랑 일반 면회라는 게 있어요. 아내가 면회신청을 했는데 일반 면회였어요. 일반 면회는 여러 사람이 줄지어 서서 차례로 기다려야 되는데, 그 시간이 고역이었어요.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고, 말 거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있을 즈음이라 대기줄에 서 있는데 의무실 담장 옆에 작은 화단이 있었다고. 거기에 장미가 세 송이 피어 있는 거예요. 옆에 있는 교도관한테 말하고 제일 싱싱해 보이는 한 송이를 꺾었지.
기자 (교도소에서) 나와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뭔가요?
신성일 머리를 이렇게 하얗게 하고 파마를 했어요. 베토벤처럼. 이렇게 하고 다니면 아무도 나한테 정치하자 하지 않고, 나 스스로도 그런 마음을 차단할 수 있으니까. 이제 그쪽엔 유혹당하지 않겠다는 결단이었죠, 내 나름대로는. 국회의원은 머리 하나, 넥타이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기자 책을 보면 분야를 초월해 많은 분들과 친분을 나누셨습니다. 김종필 전 총재(JP), 고 박태준 회장, 고 이주일 씨, 나훈아 씨까지 어떻게 이런 인맥이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신성일 1960년대 중반부터는 매년 3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어요. 당시 문화·예술계 납세 1위는 항상 내 차지였지요. 6개월 동안 세금만 190만 원을 냈어요.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한 채 값이죠. 성실납세자로 표창을 받으러 가면, (그 행사는 늘 시민회관(現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는데) 거기에 정·재계 인사들은 다 모였어요. 각 분야 사람들이 다 모이다 보니 아무래도 서로 잘 알게 되죠. 



S#7. 휴일 그리고 자유
인사동 감자탕집 INT - 저녁

화랑 옆으로 10m 정도 걸으면 해물파전, 감자탕, 순두부 등을 파는 식당이 있다. 점심을 거르고 기자를 만난 신성일은 ‘깨끗하게 잘하는 집’이라며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간다. 감자탕 소(小)자와 동태전, 사이다 한 병을 주문하고 기다리던 중, 한 무리의 중년이 식당에 들어온다. 표정이 변하는 신성일, 벌떡 일어나더니 한 신사와 덥석 손을 잡고 말없이 악수를 나눈다. <휴일>(이만희 감독, 신성일 주연의 1968년 작. 검열문제로 당시에는 상영되지 못했다)의 시나리오 작가 백결이다.

작가 아니, 어떻게 여기서 다.
신성일 백 선생 그대로구만. 하나도 안 변했어.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영상자료원에서 CD 구해서 <휴일>을 봤거든. 생각이 나던 차였는데 여기서 다 보네.
작가 그 영상이 있던가요?
신성일 나도 처음 봤지. <휴일>은 정말 영화야. 영화더라고.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까지 열심히 했나 싶어서 내가 다 놀랐어. 그때 내가 하루에 영화를 4~5편씩 찍을 땐데. 아, 지금은 인터뷰 중이에요. 얼마 전에 책이 나왔거든.  
작가 (웃으며) 봤습니다, 저도. 거, 시끄럽던데요. 그럼 제가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작가, 함께 온 무리 속으로 사라지고, 이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낸 손님 몇이 신성일과 사진을 찍겠다고 다가온다. 그는, 여러 컷 사진을 찍어준다. 인터뷰, 잠시 중단된다.

기자 ‘정말 영화’는 어떤 건가요?
신성일 그 시대를 담고 있어야죠. 그 시대에 사는 사람을 담고 있어야 하고. <휴일>은 그런 작품이에요. 60년대의 암울한 분위기가 그대로 담겨 있죠. 당국은 영화 내용을 주인공이 취직을 하거나 군대에 가는 내용으로 바꾸면 상영허가를 내준다고 했지만, 영화사 대표는 차라리 상영을 포기하겠다고 했어요. 그 대표가 전옥숙 여사예요. 홍상수 감독 어머니지.
기자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살아왔습니다. 어떤 삶이었나요?
신성일 실제로 강원도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하다가 내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근데 한 사람이 얘기를 못 알아듣는 거라. 그래 다른 한 사람이 이상하다 싶어 신고를 했지. 북에서 온 간첩이었다고 하더군. ‘누구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그때 생긴 거라고.
기자 전 국민이 다 아는 분이었군요. 간첩만 빼고.
신성일 어디에 가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요. 보여서도 안 되고. 한번은 엄앵란 씨가 방송에서 그럽디다. 불쌍한 사람이라고, 평생을 편하게 한번 못 살아 봤다고요. 배우라는 직업이 개인으로서는 행복하기가 힘들어요. 나는 내가 재능이 있어서 배우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없는 편이지. 1960년대라는 시대가 나를 최고의 배우로 만들어줬다고 생각해요. 운명이었던 거죠.
기자 책에 ‘자유인을 꿈꾼다’는 대목이 그런 의미군요.
신성일 이제야 비로소 자유인으로 살 수 있겠구나 싶어요. 늘 자유가 그리웠죠. 이제 정치인도 아니고 나한테 작품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니까. 책을 낸 것도 그래서예요. 한 번은 훌훌 털고 가고 싶었어요.
기자 김영애 씨와의 기억은 혼자 간직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신성일 일생 빚진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감추고 싶지도 덮어두고 싶지도 않습니다. 무서울 것도 없고요.
기자 ‘만약 배우가 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신성일 아마, 의사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 대통령이 됐으려나.

신성일, 얼굴에 깊은 주름을 내며 싱긋 웃는다. 카메라,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가 점점 멀어지면서 줌아웃. 





25년간 두 사람과 인연 쌓은 작가가 보내온
      
‘신성일·엄앵란 부부를 위한 변명’

박영(극작가)

최고의 배우 커플을 25년간 지켜본 여류작가 박영 씨가 본지 편집부에 글을 보내왔다. 작가와 신성일·엄앵란 부부의 인연은, 박 작가가 25년 전 한 여성잡지의 연재 꼭지 ‘베스트맨 in 코리아’의 첫 번째 게스트로 배우 신성일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곧바로 엄앵란과도 인연이 이어져 이후 부부와 작가는 긴 인연을 통해 허물이 없는 사이가 되었다. 박영 작가가 글을 쓰고자 한 이유는, 신성일 씨의 자전에세이 《청춘은 맨발이다》의 출간과 그 후의 파동 때문이다. 거침없이 써내려간 에세이와 거침없이 질주하는 인터뷰 내용에 여론이 들끓고 네티즌이 요동하고 있다. 특히 K씨와의 결혼 후 로맨스가 화제. 문제는 ‘75세의 청춘남’ 신성일을 향한 너무 일방적인 비난과 매도다. 박 작가는 조심스레, 그러나 자신 있게 그와 그 아내를 웅변하기로 했다. 작가는 당대 최고의 스타 배우 커플인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연민과 존경심을 표한다. 글을 통해 우리는 신성일·엄앵란 부부의 진솔한 모습을 좀 더 느낄 수 있다. 책 출간 직후 두문불출했던 엄앵란 씨의 동정은 덤이다. 기획 이상문 기자



새벽 5시. 잠에서 깨어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창문을 열어젖힌다. 상쾌한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든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새벽안개 속으로 산책을 간다. 마치 짧은 여행을 떠나듯이. 매일 똑같은 하루의 시작인데 평화롭지만 뭔가 스산한 감정이 피부를 살짝 적신다. 그의 감성이 스르르 빗장을 연다.
“이젠, 이 시점에선 미래의 시간들을, 그 속의 나를 가늠할 수 없다…. 많은 것이 지나갔다…. 흘러갔다….”
신성일 씨의 아침산책은 이렇게 자기 자신과 속삭이는 시간이다.
숲속에서 ‘성일가’의 마당으로 돌아오면 그를 기다리는 현실이 있다. 말들과 개들. 그들에게 밥을 주고 똥을 치우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이 찾아온다. 적게는 몇십 명에서 많게는 몇백 명까지. 그는 그들에게 일일이 차를 대접하고 사진을 찍고 기념엽서에 사인을 해주고 대화를 나눈다. 그의 나이 75세. 여전히 그는 그에게 호감과 관심을 가진 불특정다수, 대중들 속에 있다. 평생을 그래 왔던 것처럼. 이렇게 앞에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이 둘러싸고 있는 아늑한 공간에다 여인네처럼 단아하고 곱기만 한 기와집을 지어 전원생활을 시작했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 건강한, 부럽기만 한 말년의 생활이다.
그랬는데 이게 웬일. 인터넷 세대들이 그를 내동댕이쳤다. 선정적인 기사와 악성 댓글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그야말로 폭풍비난을 쏟아붓고 있다. “내가 신성일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언제나 자부심에 차 있고 명예심과 공명심은 둘째가라면 서운해할 그, 대한민국 최고 거장배우인 그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걱정이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엄앵란 씨와 신성일 씨를 믿기 때문이다. 그들을 믿는 것과 이 상황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절대로 관계가 있다.
신성일 씨는 ‘남자-배우-아버지-남편’의 순으로 살아왔다. 엄앵란 씨는 그를 자신의 입장에서 ‘남편-아버지-배우-남자’의 순으로 살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애당초 알아챘고, 신성일 씨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과 ‘남자-배우-아버지-남편’의 순서를 인정하며 살아왔다. 바로 이것이 이번 사태(?)를 유발시킨 원인이다. 그러니까 ‘수컷의 마지막 해프닝’이랄까.
애절한 사랑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지금도 애인이 있는 남자이고 싶은 신성일. 그가 TV에 출연한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미소가 아니라 그야말로 깔깔깔 웃었다. 도대체 누가 진행자이고 누가 게스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진행자의 질문을 치고 들어오면서 묻지도 않은 해명(?)까지 다 하고 있었다. 두 명의 남녀 진행자 중 여자 진행자는 기가 막혀서 웃다가 아예 질문도 접어버렸다. 남자 진행자가 “최근 자서전을 출간하신 영화배우 신성일 씨의 열정적인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하고 겨우겨우 인터뷰를 끝냈다. 그 시간 이후 인터넷에는 악성 댓글이 마구마구 더 늘어났다. 나는 엄앵란 씨가 빈정이 상해 있을 걸 뻔히 알면서 운을 뗐다.
“신 선생님 TV에서 귀여우시던데요. 요즘 남자들 다 고개 숙이고 살잖아요. 명퇴한 50대 남자도 마누라 눈치만 본다는데 감히 과거든 현재진행형이든 애인 얘기를 어떻게 해요? 신성일 씨니까 하지. 게다가 엄 여사님은 하실 말씀 없으시잖아요. 엄 여사님이 먼저 시작하셨잖아요. 방송에서, 자서전에서 만날 신 선생님 바람피운 얘기 세세하게 다 하셨잖아요.”
“그래. 그래. 누가 뭐래. 대포는 내가 먼저 쐈지. 나도 할 말 없어. 근데 어제 그 방송 생방이지?”
“물론이죠.(킬킬킬)”
“웃음이 나와?”
“아, 그러니까, 귀여우시다니까요.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계산도 없고 겁도 없고 기죽지도 않고. 요즘 저런 남자 없어요. 통쾌했어요. 한술 더 떠서 ‘난 거짓말은 안 해! 그래서 다 말했어!’라는 식이니…. 사람들이 뭐래요?”
“다들 전화해서는 이혼하라더라. 용서해주지 말래.”
“그래서요?”
“난  내 자리를 지킬 뿐이야.”
“당연하죠. 지나온 세월도 아깝고, 너무 늦었죠.”
물론 이렇게 간단하게 할 말은 아니다. 어느 부부나 남이 모르는 역사가 있는 법. 반세기에 담긴 그 많은 사연들, 그 소중한 삶을 무엇과 바꾸리.
“근데 인터넷에도 나오던데, 진짜 50대 애인이 있대요?”
“없어. 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지. 동부이촌동 뻔한 동네인걸.”
“그보다 연애를 골백번 해도 딴살림 차릴 분은 아니죠.”
“그보다 어떤 여자도 오래 못 가.”
“그렇죠. 돈이 많아 펑펑 쓰길 하시나, 여자한테 알뜰살뜰 친절하길 하시나, 입에 발린 찬사 같은 것과는 아예 담 쌓은 분이고.”
나는 한참 동안 신성일 씨가 친절하거나 다정한 남자가 아니라는 둥 여자에게 헌신적인 스타일이 아니라는 둥 하며 흉을 봤다. 엄앵란 씨가 신성일 씨의 ‘애인’이라는 존재를 허구라 단정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설사 지금 만나는 여성이 있다 해도 이 나이에 새롭게 가정을 이루어 살 것도 아닐 것이고, 정염에 휩싸여 목숨을 걸지도 않을 것이며, 일생일대의 사랑도 아닐 것인 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가치는 없다는 뜻일 게다. 그깟 감정의 유희쯤이야 “흥!” 해버리고 말 것이다. 엄앵란 씨의 이 “흥!”에 담긴 자긍심(?)은 남편 신성일 씨가 어떤 여인과 데이트를 하든 말든, 그 여인이 박사학위를 가진 최고의 지성인이며 교양인이든 말든, 어떤 형태로 함께 지내든 말든, 그다지 문제될 게 없다는 확신의 의미다.
“전부터 따로 사신다는데, 내쫓았어요?”
“누가 내쫓니? 자기가 공부해야 된다고, 책 읽어야 된다고 독립하겠다며 나가서 지내겠대.”
“엄 여사님 사시는 아파트랑 100m 떨어진 데라고 하시던걸요. 몇 평 아파트예요?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분인데 불편하실걸요.”
“35평. 이젠 집안일도 잘해. 아침식사하러는 집에 오시고 그러지.”
“요즘도요?”
“아니. 요즘은 안 오지.”
“전화는요?”
“전화도 없지.”
“어쩌실 거예요?”
“어쩌긴.”
“근데요. 신 선생님은 어떤 여자든 그 여자랑 엄 여사님이랑 동시에 물에 빠지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엄 여사님 먼저 구하실 거예요. 제가 장담해요.(후후훗)”
“누구 약올리니?”
“자제분들은 뭐래요?”
“암말 안 해. 우리 집 식구들은 무서워서 아무도 뭐라고 말 못 하고 살잖아.”
신성일 씨는 방송에 출연해 아내와의 별거에 대해 “어차피 우린 같이 못 살아요. 엄 여사는 쌀밥 좋아하고 나는 잡곡밥 좋아하고, 또 그 사람은 담배를 피우니까 함께 못 있지. 이 나이에 부부가 뭐 꼭 함께 살아야합니까? 각각 좋아하는 거 하고 한 가족 두 살림이면 어때요. 미래형 부부지.” 했다. 참내. 엄 여사는 담배를 피우지만 남들 앞에선 거의 안 피운다. 엄청 조심하는 편이다. 그런데 방송에서 발표를 하다니.
“그 양반은 내가 엄만 줄 아나 봐.”
“당신 어머니보다 엄 여사님이 신 선생님에 대해서는 더 잘 아실걸요.”
“그야 그렇지.”
어머니 같은 아내. 그렇다. ‘같은’일 뿐이지 아내는 어머니가 아닌 거다.
1989년 신성일 씨는 ‘성일시네마’라는 영화사를 차렸다. 한번은 스태프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엄 여사가 기분이 꽤 좋아보이길래 물었더랬다.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나는 저 남자를 더 멋있게 만들고 싶어. 더 근사하게 만들어서 남들 앞에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서게 하고 싶어.”
‘쳇, 지금도 충분히 멋있구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다른 회식 자리에서 단둘이 있을 때 정색을 하고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엄 여사님은 신 선생님이 그리도 좋으세요? 30년 넘게 같이 살았는데도요?” 했더니, 그야말로 ‘키기긱’ 웃으면서 하는 말이, “누가 아니라니. 난 왜 그 남자가 좋을까? 아직도 좋아. 미쳤나 봐.” 하곤 또 “칼칼칼” 웃는다. 나는 웃지도 않고 엄 여사를 그냥 바라봤다. 하도 신기해서. ‘내 남편이 최고!’ 그런 차원이 아니고 정말로 남편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50대 중반의 아줌마를 나는 보고 있었다.

신성일 씨는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를 출간하면서 도덕심의 아무런 제어도 받지 않았고 반려자와 가족에 대한 예의나 그들이 받을 상처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지도 않았다. 아내가 있는 사람이 애인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37년 전 옛사랑을 정말 사랑했다며 숨겨진 그 연인의 사진을 공개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그녀의 낙태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매스컴과의 인터뷰 등으로 이런 내용들을 직접 퍼트렸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한평생 기록을, 자신을 사랑해준 대중 앞에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털어놓고 자신의 진실을 토로하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책 속지에 별도로 밀봉돼 있는 그 부분의 제목은 ‘마음에 간직한 사랑’이다. 로맨틱하기도 하지. 그런데 이 러브스토리는 인터뷰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었다.
어쨌든 그로 인해 ‘완전 몰지각하고 비윤리적이며 부도덕하다’, ‘책을 팔기 위한 노이즈마케팅에 정신이 나갔다’ 등 네티즌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고 있다. 인터넷 세대를 경험하지 못한 그는 겁도 없이 “이제 이미 고인이 되었고 40여 년이 지난 옛일이니까 괜찮아. 아내도 다 아는 일인데, 뭐.” 하고 떳떳하게 공표한 셈이다. 그는 인터넷 세대들의 자유분방한 발언대에서 이런 봉변(?)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랬다. ‘이 할아버지 얄미워’, ‘이 할아버지 무섭네’라는 댓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아!’ 하고 낮게 신음했다. ‘할아버지라니… 그렇지, 할아버지지….’ 인터넷 세대들은 그의 영화를 흑백필름에서조차 본 적이 없거나 봤음 직한 나이라 해도 초등학생일 때쯤의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나 있을 것이다. 신성일이라는 배우와 친하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에게 그는 그냥 할아버지인 거다. 이 갭(gap)을 신성일 씨는 인식하고 있을까? 그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다수의 낯선 파워에 마음을 적잖이 다친 듯하다.
그런데 그는 이 사태(?)를 겪으면서 당황하기보다 오히려 화를 내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12월 16일 MBN <뉴스M>에 출연했을 때 내내 격앙된 표정이었다. 정치와 관련된 어떤 질문을 하자마자 곧바로 손을 내저으며 “아, 그런 거 나한테 묻지 마. 내가 정치인인가? 나는 영화하는 사람이오.” 했다. 보는 사람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전의 어떤 방송에서도 80년대에 영화계 상황이 나빠지지 않았으면 정치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마지막에 일어나면서는 “할 말이 많은데 또 불러주시오.”라며 휙 나갔다.
12월 5일 출판기념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그날 이후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이 와중에서도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절대 참지 않았다. 전혀 위축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끝까지 자신을 바꾸지 않았다. 참으로 신성일다운 모습이어서 감탄했다. 이 글을 쓰기 전, 방송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에 나는 안도했다. 여전히 그가 씩씩한 기상을 뿜어내고 있어서, 그의 건재한 모습이 기뻐서였다. 도대체 요즘 세상에 이다지도 꾸밈없이 처세부리지 않고 용감한 남자가 또 있냐 말이다. 뭇매를 맞든 말든 “나는 나다!” 하고 외치고 있잖은가 말이다. 자기가 무슨 이 시대의 마지막 사나이라도 되나?
기쁘다니? 지금이 그럴 때야? 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따지고 보면 뭐 또 그리 대수인가 싶다. 네티즌들이 질타하는 부도덕, 비윤리, 불편한 진실, 비겁함, 무개념 등등은 뒤집어보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의 옛사랑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미풍양식을 해치기라도 했느냐 말이지. 그 모든 사실을 진즉에 다 알고 있던 그의 아내 엄앵란 씨는 이미 오래전에 충분히 아프고 난 후라 이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단지 그 일로 남편이 욕을 먹고 있으니 화가 날 뿐이다. 신성일 씨는 억울하기까지 한 모양이다. 당사자끼리는 이미 끝난 일이고, 더 이상 문제 삼거나 새삼스레 상처를 들쑤시는 것도 아닌데,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들의 참견(?) 때문에 부부가 함께 확인사살을 당하고 있는 형국이 됐으니까 말이다.
엄앵란 씨가 남편의 자서전에서 “괴로운 세월이었지만 일흔이 넘으니 그 시절도 그립고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는다. 마음의 매듭, 남편에게 가졌던 오해와 미움을 모두 풀어버렸다. 이렇게 홀가분한 세상이 있다는 것이 새삼 고맙다. 남편이 요즘 너무 부드러운 남자로 변해서 측은한 마음이 든다. 나는 나머지 세월은 측은지심으로 끝마칠 것이다. 세월이 선생이다.”라고 했으니 신성일 씨의 입장에서도 자신이 책에다 뭐라고 쓰든 방송에서 뭐라고 하든 아내를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배려가 없다’는 비판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지금 제일 억울한 사람은 엄앵란 씨다. 그녀는 “으이구. 이제 와서 스타일 다 구기고 가만히 있는 나까지 욕을 먹이고, 이 무슨….” 하며 한탄하고 있다.
《청춘은 맨발이다》는 매스컴 플레이가 없었더라도 사볼 만한 책이고 읽을 만한 책이다. 한데 엉뚱하게도 책의 내용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스캔들성 화제만 떠 있어 안타깝다. 그는 자신이 바람둥이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사랑을 갈망하는 로맨티스트라고 주장(?)한다. 20년 넘게 그를 보아온 나는 그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 오히려 나는 세상이나 사람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그의 순수성과 고집을 귀하게 여기며 좋아한다. 그와 오랜 세월 친분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그런 점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나이에 참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할 문제는 아니다. 그건 그의 본질이니까. 이 풍진 세상에서 본질을 앞세우고 산다는 건 발가벗고 산다는 건데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이 일어 날 수밖에.
아직도 이렇게 소년처럼 열정만 앞서는 신성일이라는 사람을 엄앵란 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해한다’라는 차원은 이미 머나먼 전설이 돼버렸다. 엄 여사에게는 그렇다. 이해를 넘어선 수준이 아니면 이런 남자와 50여 년을 살아내지 못할 테니까. 이 정도가 되면 엄앵란 여사는 이 신성일이라는 남자를 영원히 놓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긴, 도대체 더 남은 게 있어야 말이지.
현실적이고 바른생활 사모님인 엄앵란 여사는 서울 토박이 깍쟁이 또순이다. 흔들림이 없고, 따라서 변함이 없다. 나는 그녀가 20대에 샀다는 시계를 지금도 지니고 있는 걸 보았다. 차를 타고 지나치다가 “저 집이 내가 스물네 살에 처음 산 집이야. 아직도 있네.”라고 해서 “그 나이에 집은 왜 샀어요?” 했더니, “몰라. 그냥 집이 사고 싶더라고.” 했다. 신성일 씨가 1년에 30편씩 겹치기 출연을 하면서 돈을 엄청나게 벌 때도 돈관리는 100% 엄 여사가 했다고 한다. 신성일 씨는 자신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몰랐다고 한다. 경제권을 아내에게 완전히 넘긴 남편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어린왕자였던 것이다.
“머릿속 시끌시끌하실 텐데 뭐하고 계세요?”
“뭘 하긴. 김치공장에서 일하고 있지. 죽을 때 5인 병실 침대에 누워 있다 가지 않으려고 열심히 돈 벌지. 독방에서 우아하게 꽃에 둘러싸여 가려고.”
“엄살이시죠? 노후대책 확실하게 해놓으셨을 분이란 거 모를까 봐요.”

좀 된 얘긴데 신성일 씨, 나, 그의 일본인 친구 이케하라 씨 셋이서 우연히 일본 도쿄에 머무는 기간이 같아서 이케하라 씨의 지인이 운영하는 호텔에 모두 묵게 되었다. 어느 날 신성일 씨와 내가 쇼핑을 함께했는데 애기들 옷 파는 가게 앞을 지나면서 “나 손주 생기면 이런 옷 다 산다. 골프채 같은 거 안 산다.”라며 뽐내는(?) 것이다. 아니 누가 물어봤냐고. 그는 흥미로운 눈초리로 애기 옷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는 그의 두 딸도 결혼을 안 했을 때이니 미리 애기 옷을 살수도 없고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너무나 평범하고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신성일 씨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케하라 씨에게 말했다. “신 선생님 좀 시무룩해 보이시죠? 도쿄가 재미없으신가?” 이케하라 씨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 그건, 신성일 씨는 기분이 나쁜 거예요. 한국에서는 집 밖에만 나가면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알아봐주는데 도쿄에서는 아무도 몰라주니까 은근히 화가 나는 거지요.” 에엣? 하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어쨌든 우리는 대책을 마련했다. 아카사카에 있는 한국클럽에 갔다. 여기라면 한국인 아가씨들에, 한국인 손님들에, 주인까지 한국인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신성일 씨를 본 아가씨들이 꺄악꺄악 난리가 났다. 여자 하나, 남자 둘인 우리 테이블에 아가씨들 대여섯 명이 앉았다. 신성일 씨는 공평하게 여러 아가씨들과 블루스 음악에 맞춰 춤을 한 번씩 땡겨주시고 노래도 불렀다. ‘맨발의 청춘’을 불렀는데 군가처럼 불렀다. 그래도 “앵콜! 앵콜!”이 터졌다.
그가 떠나는 날 방에 가보니 침대 위에, 카펫 바닥에 짐들이 널려 있었다. 가방 정리를 못해서 쩔쩔매고 있었다. 어쩌나 보려고 가만히 구경만 했다. 항상 폼을 잡는 스타일리스트인 그가 호텔방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짐을 짊어지고 허둥거리고 있었다.
“니는 언제 귀국할끼고?”
“3일 후에 갈 거예요.”
“그럼 나랑 공항까지 같이 가줄래? 하루 만 엔씩 3만 엔 주께.”
“나리타까지는 안 되고요. 하코자키터미널까지 동행해드릴게요. 거기서 가방 보내고 가뿐하게 가심 되죠.”
“그러지 뭐.”
꼭 엄마 잃은 오리처럼 보여서 정말 재밌었다. 왜 이런 얘기를 늘어놓느냐 하면 지금 인터넷의 댓글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신성일 씨의 여러 모습들이 엉뚱하게도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신성일 씨는 아내와는 ‘엇박자 부부’였다고 표현했다. 엄 여사는 신성일 씨 모르게 또 “쳇!” 했을 것이다. 둘이 같으면 쪽박이나 차겠지. 엇박자는 무슨. 이렇게 장단이 잘 맞는 부부가 어디 있다고.
그런데 이 부부가 유지하고 있는 체제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약간은 변화가 생겼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의문은 있다. 왜냐하면 이제 엄 여사는 76세다. 신성일 씨와의 생이 반세기를 관통하고 있는 이즈음에 엄 여사는 조용히, 무언으로 ‘자주독립’을 선언하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에게 휴가를 주듯이 말이다. 오랜 세월 한 사람을 너무 외곬으로 바라보며 품어 안으면, 마음이 행복하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창살 없는 감옥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최근 서울 동부이촌동에서, 경북 영천에서 각각 여유롭고 느슨하게 지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밤중에 갑자기 홀로 잠에서 깨었을 때, 엄앵란 씨는 어떤 감각에 사로잡혀서 먼 여행을 떠나듯 과거의 시간 속을 뒤적거릴지도 모르겠다.
어떤 부부도 특별하지 않고 어떤 부부든 특별할 거라고 생각한다. 신성일·엄앵란 부부도 그 속사정은 본인들만 알 것이다. 나는 서두에 말한 것처럼 이 두 사람을 믿는다. 그들은 세상을 끝낼 때까지 하나의 줄에 엮여서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박영은…
소설가 겸 극작가. 장편소설 《정오의 탈선》, 《김마리라는 부인》, 《동경에서 서울까지》, 《내일은 천국이고 싶다》, 《러브 어게인》 외 다수, 논픽션 모음집 《서울 비빌지도》 출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서 ‘타인과 연인’으로 당선. MBC TV <사랑의 계절>, <알뜰가족>, KBS 라디오 <대공수사실록> 집필. 그 외 신문, 잡지 등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장편소설 《정오의 탈선》, 《김마리라는 부인》, 《동경에서 서울까지》, 《내일은 천국이고 싶다》, 《러브 어게인》 외 출간
시나리오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타인과 연인’으로 당선
MBC TV <사랑의 계절>, <알뜰가족> 집필
KBS Radio <대공수사실록> 집필
그 외 신문, 잡지 기고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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