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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족발집에서 만난 ‘람바다’ 박광덕의 인생유전

2014-03-13 15:17

람바다, 브라질어로 ‘채찍’이라는 뜻이다. 한때 이 람바다 춤으로 모래판을 사로잡았던 씨름 선수 박광덕은 그 후 곡절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잇단 실패와 혹독한 루머, 흡사 채찍을 맞는 듯한 시절이었다. 은퇴 후 10년, 새로운 출발선에 선 그를 만났다.

이제 웬만한 시련에는 흔들리지 않아요

“안녕하십니까, 전화 주셨다고 해서요….” 낮고 진중한 목소리다. ‘이런 목소리로 전화를 걸 사람’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저, 박광덕이라고 합니다만….” ‘아..!’ 이틀 전, 새로 연 그의 족발가게에 전화를 걸었다. 자리를 비웠다고 해 사무실 번호를 남겼었다. ‘인터뷰를 했으면 한다’는 메모와 함께. 다시 한 번 두드려보려던 차에 전화가 왔다. 남긴 메모를 보고 먼저 전화를 걸어준 것도 드문 일인데, 말투나 목소리가 정중해 더욱 뜻밖이다. 오래 고민한 눈치였다. ‘할 이야기가 없다’며 망설이는 그를 설득해 인천에 문을 연 그의 가게를 찾아갔다.

비싼 수업료 내고 인생수업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주방에서 손에 물기를 닦으며 그가 나왔다. 조금은 쑥스러운 듯, 약간은 경계하는 듯했다. 약속시간은 3시, 인터뷰를 망설이면서도 ‘그때 막 삶은 족발이 나온다, 우리집 족발 맛은 보셔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가 잡은 시간이었다. 늦여름 햇살과 초가을의 바람이 뒤섞인 오후, 인천시 부평구 골목에 자리 잡은 그의 가게에서는 돼지 앞다리 삶아지는 훈내가 풍겨왔다.
그가 음식점 문을 연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00년 은퇴 후 2002년, 사촌형제들과 대전에 ‘박광덕 람바다 감자탕집’을 열었다. 맛도 좋았고 처음에는 장사도 제법 잘됐다.
“거리가 멀어서 제가 매일 왔다 갔다 하지는 못했어요. 이름 보고 찾아온 분들이 가게에 제가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시는 경우도 많았죠. 그러다 보니 인심도 잃고, 가게는 점점 관리가 안 되고, 중간에 장난치는 사람들도 생기고요.”
이는 운동만 알았던 박광덕의 인생수업 서막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믿고’ ‘도와달라는 청을 거절하지 못해’ 시작한 일들, 예를 들면 라이브 카페, 룸살롱, 막걸리집… 등이 번번이 엎어졌다. 그럴 때마다 몇 천만 원, 크게는 몇 억이 사라졌다.
“그렇게 10억을 잃었어요. 빚이 많을 때는 담뱃값 2천 원이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에 담배를 서너 갑은 피워야 견딜 수 있을 땐데 비참했죠…. 씨름하면서 정상에도 올라보고, 세상에 나와서는 바닥도 쳐봤어요. 이제는 천천히 가더라도 차곡차곡 쌓으면서 가려고 합니다. 모래판만 알던 놈이 ‘세상 사는 법’을 배운 셈이죠. 수업료가 너무 비싸긴 했지만.”
스무 평 남짓한 족발가게는 그가 수업을 잘 수료했다는 증거다. ‘빚을 져서라도 강남에 자리 잡겠다’든지, ‘일단은 크게 차리고 볼 일’이라든지 하는 허세는 버렸다. 자기 분수에 맞게,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부터 시작했다. 집도 가게에서 5분 거리다. 밤에 DJ 근무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가게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그를 볼 수 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가장 힘들었던 순간도
박광덕은 5형제 중 막내다. 위로 형님만 네 분이 있다. 그를 임신했을 때 부모님은 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태어난 아이는, 생후 한 달이 지나자 7.8kg을 훌쩍 넘겼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라는 말로도 모자랐다. 1학년이 되자 70kg,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90kg을 넘었다.
“한번은 선생님이 저희 집에 가정통신문을 보내셨는데, 그걸 보고 부모님이 생전 안 하던 칭찬을 해주시더라고요. 거기에 선생님이 이렇게 쓰신 거라. ‘처음에는 광덕이가 몸집도 크고 힘도 세서 아이들 괴롭히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히려 힘든 일은 자기가 더 나서서 하고, 아이들과도 잘 지낸다’고.”
커다란 몸집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받는 오해는 ‘많이 먹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기대(?)만큼 폭식하지 않는다. 육류보다는 야채나 생선을, 기름 많은 음식보다는 담백한 음식을 좋아한다. 양도 아주 배고플 때 아니면 한 공기를 넘기는 일은 드물다. 씨름을 시작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어릴 적 넷째 형이 씨름을 했다. 막내는 바로 위에 형이 새벽에 일어나면 같이 일어나 운동도 하고, 모래도 퍼날랐다. 중학교도 형을 따라 씨름부가 있는 곳으로 진학했다. 그가 ‘씨름의 길을 가겠구나’ 하고 알게 된 건 ‘소년체전’에 나가면서부터다.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상대는 박광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깔리기 일쑤였다. 군내 씨름대회에서는 우승을 했다. 자연스럽게 고등학교는 씨름 명문인 청주 운호고등학교에 갔다. 열여섯 소년이 고향인 충남 예산 삽교를 떠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 소년은 전국 방방곡곡에 발자국을 남기게 된다. 경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망을 위해.
“저는 어릴 적부터 씨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근데 하루의 시작부터 끝이 다 씨름인 거라. 그때는 씨름부 기강이 어찌나 센지,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훈련만 끝나면, 주말에 고향집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도망가는 거예요. 그럼 큰 형님이 며칠 숨겨주다가 아버님께 전화하죠. ‘광덕이 여기 있다’고. 나중엔 코치님이 집에 안 보내려고 해요. 하도 도망을 가니까. 그럼 절대 도망 안 간다고 싹싹 빌고는 또 도망가죠.”
그랬던 그가 씨름의 맛을 알게 된 건 프로에 입단하면서부터다. 도망자 박광덕 선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체전’에서 2위에 입상하게 된다. 그 당시 전국체전은 전국의 유망주들이 모이던 자리, 무명의 박광덕은 그때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람바다 춤’을 처음 선보인 것도 이 자리에서다. 관중석에서 그를 지켜보던 럭키증권(후에 LG) 감독은 그에게 스카우트를 제안한다.
“집에서는 프로팀 가지 말고 대학에 가라고 했어요. 우리 형제들 중에 대학 간 사람이 없거든요. 둘째 형은 공부를 정말 잘했는데도 못 갔어요. 그때 집안이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막내만큼은 대학문 밟아보는 게 부모님 소원이었죠. 근데 차마 못 가겠더라고요. 내 평생에 열아홉, 그때가 제일 철들었던 거 같아요. 얼른 프로에 들어가서 집안에 보탬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당시 럭키 측에서는 박광덕에게 연봉 2천만 원에 계약금 4천만 원을 제안한다. 1990년 당시에는 큰돈이었을 뿐 아니라 열아홉 신인선수에게도 파격적인 액수였다. 프로팀에 입단하니 신세계가 열렸다. 짜임새 있는 식단, 체계적인 훈련. 150kg, 체중은 그대로인데 힘이 붙는 느낌이 확연했다. 기술도 점점 좋아져, 선배들과 경합을 벌이면 그가 이기는 횟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그때가 아마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거 같아요.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고, 힘도 달리지 않고. 경기장에 들어가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늘 있었죠. 실제로 그랬고요.”
경기에 이기고, 람바다 춤을 추고, 경기장에 모인 2만 명이 넘는 관중들이 일제히 박광덕을 향해 함성과 박수를 보내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스포츠신문에 그가 등장하던 시절. 천하장사 준우승 5번, 백두장사 3번. 씨름선수로서 탄력이 붙어가는 것도 신나는 일이었지만, 자신의 작은 몸짓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짜릿한 경험이었다. 이십대 초반,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나이었다. 

명동 바닥을 발가벗고 뛰어볼까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당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던 <슈퍼 선데이>와 <출발, 토요대행진>에서 동시에 섭외가 들어왔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대본을 받으면 남의 대사까지 다 외워갔던 그는 끊어서 가는 방송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다. 제작진의 사인을 알아듣지 못했고, 차례가 오면 책 읽듯 대사를 이어갔다. 호흡을 조절하기엔 여유가 없었다. 그가 준비되기까지 기다려줄 연예계가 아니었다.
“내가 봐도 한심했어요. 왜 이렇게밖에 못하나. 명동 바닥을 발가벗고 한번 뛰어볼까. 내가 팬티만 입고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샅바 잡았던 놈인데, 뭐가 겁나서 이렇게 쪼그라들었나.” 
그 후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어느 날 TV에서 종적을 감춘 그는 ‘연예계에 진출했다 실패한 운동선수의 대명사’라는 오명과 몇 가지 루머로 사람들 머리에 기억되었다. ‘외국으로 잠적했다더라’, ‘죽었다더라’ 같은. 루머라는 게 본디 당사자는 배려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스트레스로 198kg까지 몸이 불었던 거구의 그를 쓰러뜨린 건 추락이 아니었다. 오히려 재기의 희망이었다.
“95년에 LG에서 연락이 왔어요. 다시 한 번 씨름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그때 제 몸이 전성기 때만큼 나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다렸죠. 새벽에도 전화벨 소리만 들리면 발딱 일어나 잠결에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일어나서 받았어요.”
비슷한 시기 라이벌 팀이던 한보에서도 연락이 왔다. 그쪽으로 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런데 소문이 퍼졌다. ‘박광덕이 한보와 협상 중’이라는 단신기사가 나가면서 순식간에 ‘이중계약’ 논란이 퍼졌고, 이쪽저쪽에 인심을 잃게 된 그는 씨름계에 다시는 발도 붙이지 못할 상태가 됐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지고 다시 LG에 들어가기까지의 두 달이 제 인생에서 제일 고통스럽고 길었던 거 같아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정말로 ‘죽을까’ 생각한 건.”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2000년 그는 정말로 모래판과 이별을 고한다. 그러나 그때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TV 리포터를 나가도 전만큼 많이 긴장하거나 떨지 않았다. 방송이 자연스러워지니 일감도 많아졌다. 행사진행, 밤무대 DJ…. 빚을 갚으면서 생활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규칙대로 정정당당하게 임하면 어떤 일이든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백두장사는 이제는 사람을 의심할 줄도 알게 되고, 말 뒤에 숨은 속뜻을 읽을 수도 있게 됐다.
“심할 때는 의심병에 든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어요. 명함을 주고받았고, 전화도 되고, 행사비도 입금이 됐는데 ‘이게 진짜일까’ 안 믿어지는 거예요. 세상 누구도 믿을 수가 없고.”
사람을 너무 믿어 세상에 데인 그는, 한때는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괴로운 시절을 보내다가 이제야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무려 15년이 걸렸다면서. 흔한 말 같지만 ‘이제는 잘되더라도 자만하지 않고, 안 된다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고.’ 전국 어디를 가나 ‘람바다 천하장사’라며 쏟아졌던 갈채가 순식간에 싸늘한 비수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걸 겪어봤기에.
“그런데 사람들은 몸집이 크면 상처도 덜 받는 줄 아나 봐요.(웃음)”
어릴 적부터 엘리베이터에 타면 제일 먼저 탔어도 사람이 많아지면 슬그머니 내리고, 선수단으로 외국에 가도 비행기에 타면 (복도 사이로 움직이는 게 미안해) 자리에만 앉아 있는 게 습관이 됐다. 샅바 때문에 굳은살 박힌 손이 따가울까봐 상대와 악수를 할 때는 망설여지고,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는 여전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
거기다 그는 섬세한 기억력의 소유자다. ‘람바다’ 춤을 추게 된 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 카메룬 선수가 골 세리모니로 람바다를 췄던 게 인상적이었기 때문이고, 결혼 후 아내와 갔던 핀란드의 도시 이름은 ‘송카예르비’라는 것. 95년에 그가 처음 맡았던 프로그램의 이름은 ‘박광덕-노희지의 크고 작은 이야기’라는 것도. 그때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촘촘히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은 쉽게 덩치가 크면 마음도 무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에게 비추어보건대 오해다. 내색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이날, 어렵게 되찾은 그의 웃음은 카메라 앞에서도 편안해 보였다.

p.s 박광덕이 손수 포장해준 족발은 이날 밤, 야근하던 <여성조선> 편집국 식구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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