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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de Veteran 09]‘모차르트 프로젝트’ 도전하는 창단 55주년 KCO 리더 김민

2020-08-03 02:09

글 : 이상문 기자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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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체임버오케스트라(KCO)에겐 2020년이 유난히 특별하다. 창단 55주년이자 이곳 리더인 김민 음악감독이 취임 40년째를 맞은 해이기 때문이다. 더 특별한 이유가 또 있다. 국내 최초로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때문. 코로나19로 손발이 묶여 있지만 9월엔 모차르트와 함께 다시 축제를 펼칠 예정이다.
감히 말하자면 서양음악 클래식은 몰라도 모차르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천재 음악가의 음악과 일생은 수백 년 동안 대중의 귀와 눈을 흔들어왔고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드라마 OST, CF 음악, 무대 그리고 음반과 도서에서 모차르트는 박제되지 않은 채 계속 살아 움직인다. 그의 음악은 경쾌하고 단순하고 투명하고 순수하다. 반면에 고뇌와 성찰, 상념과 슬픔이 배어 있다고도 말한다. 덕분에 청중은 절제 속에 숨은 둘 사이의 긴장을 설레며 맛볼 수 있다. 연주자의 입장은 어떨까. 모차르트는 연주자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음악가이다. 하지만 반드시 연주해봐야 하는 관문 같은 존재다. 때문에 부담스럽고 어렵다. 작은 실수도 금방 드러나 저절로 긴장이 된다고 한다.

코리안체임버오케스트라(KCO)는 지난해 말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는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모두 46곡을 10회에 걸쳐 연주하는 무대다. 실내악이 발전한 나라의 몇몇 오케스트라가 시도한 적 있지만 국내에선 첫 시도. 이 기획의 중심에 선 이가 KCO 리더이자 음악감독인 김민(76)이다. ‘김민’이라는 이름은 웬만한 클래식 마니아에겐 이미 익숙하다. KCO를 40년 동안 이끌어 세계 곳곳에서 140회 초청 받아 한국 실내악단의 대명사로 만들어낸 인물이다. 리더이자 감독 이전에 서울예고와 서울대 음대,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연주자로서의 개인 이력도 굵직하고 화려하다. 독일 유학 후 쾰른 실내악단 악장과 솔리스트로 활동했고 베를린라디오심포니에도 참여했다. 한국인 최초로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 30년간 활동한 것도 괄목할 이력이다. 1979년 국립교향악단 악장을 맡으며 귀국했고, 1981년부터 14년간 KBS교향악단 초대 악장으로 활약했다. 1980년에 KCO의 전신인 서울바로크합주단을 맡아 재창단한 후 오늘까지 이끌었다. 젊은 날의 활약에 보상도 뒤따랐다.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과 폴란드 문화훈장, 대원음악상 대상 등 많은 상을 받았고,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 세계적인 음악제의 심사위원을 수십 차례 맡았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 천재 음악가와 명망 있는 해석가를 동시에 영접할 생각에 속이 버거웠다. 문외한의 벼락치기 공부가 잘 먹힐지도 의문이었고 평론식 인터뷰가 되는 건 아닐까도 걱정이었다. 우선 모차르트부터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판이다.
 
왜 모차르트인가? 모차르트 음악은 워낙 많이 알려져 있다. 짧은 인생에 굴곡이 너무 많았던 음악가이고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다. 연주자들에겐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과제이자 끊임없이 연주해야 하는 곡이다. 실내악에선 모차르트를 제대로 다 해본 적이 없다. 잘하든 못하든 해보지 않고는 체임버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없다. 듣기엔 쉽지만 연주는 그렇지 않다. 46곡 중 12곡 정도는 많이 들었지만 전곡을 다 들은 경험은 드물 것이다. 처음엔 하이든을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100곡이 넘으니 다 하려면 5, 6년이 걸려 너무 방대한 작업이었다. 창단 50주년 때 우리도 기록 하나를 남겨보자는 마음으로 기획했다.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았겠다. 우선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가 궁금했다. 유명한 몇 곡 말고 익숙하지 않은 곡들을 잘 소화할지 신경 쓰였다. 그래서 음악학자, 전문가를 모셔서 곡 해설과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넣어 자료를 만들었다. 세계적인 체임버오케스트라 중 가장 손꼽히는 잉글리시 체임버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랄프 고토니를 초빙했다. 해외 연주로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흔쾌히 승낙해줬다. 엄청난 노력으로 준비했는데 코로나19로 중단돼 있어 아쉽다. 연말에 끝내기로 한 계획이 내년 4월 완료로 미뤄졌다. 모차르트가 왜 우주적인 천재 작곡가였는지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연주자나 클래식 마니아뿐만 아니라 일반인 모두가 함께 즐기는 연주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대중에게 더 가까이 가고 싶다. 레코드가 20장 나온다. 스테디셀러로 남게 될 걸로 기대한다.

한국의 민간 오케스트라가 전곡 연주를 한다는 건 이례적이다.교향곡 전곡 도전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 연주는 사례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레코드는 비엔나필하모닉과 잉글리시 체임버에서 한 것 등이 있다. 우리나라 클래식 역사가 의외로 짧다. 개인적으로는 1950년 6·25전쟁 이후 1954년 정도가 시작이라고 본다. 그전에는 짧고 간헐적이었다. 짧은 역사이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해낼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데 의미를 둔다. 우리에겐 재능 있는 음악인이 참 많다. 서양 전통음악인 클래식에 이렇게 재능이 많다는 게 놀랍다. 단순히 흉내 내는 게 아니고 진짜 잘한다. 서양에서는 한국의 음악인들을 신기해하며 연구 대상으로 본다. 세계적인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가보면 다들 한국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다. 도쿄대학 총장은 왜 한국인이 클래식을 잘하는지 본격 연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전 세계 클래식 음악을 이끌어간 천재들은 대개 유대인이었다. 교육이 특별나고 자기들끼리 끌어주는 힘도 대단하다. 그런데 40, 50년 전부터 동양인, 특히 한국인이 세계 음악계를 장악해가고 있다. 어느 콩쿠르에 가봐도 한국인이 20~30%를 차지한다. 독일의 오페라하우스 합창단 같은 경우 한국 사람이 없으면 운영이 안 될 정도다. 이탈리아는 한국인의 대회 출전을 일부 제한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가 시장이 좁은 것도 이유지만, 어쨌든 한국인의 클래식 음악 역량은 모든 부문에서 뛰어나다. 이런 바탕 위에서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을 우리가 직접 해내는 건 우리뿐 아니라 세계 클래식계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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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교회 음악가로서 많은 미사곡을 작곡했고 <마술피리>, <피가로의 결혼> 등 주옥같은 오페라도 작곡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뿐 아니라 플루트, 오보에, 호른, 하프 등 거의 모든 악기를 넣은 협주곡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그의 교향곡에 대한 청중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25번과 40번, 41번 정도가 영화 등에 노출되며 귀에 익숙할 뿐이다. 음악학자 이성률은 “관객들이 관악기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화려한 19세기 교향곡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실제로 19세기 낭만주의 시대 교향곡에 비하면 18세기 교향곡은 악기 편성도 소규모이고 음량도 작다. 실내악적인 요소가 강하고 악기 편성도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의 현악 편성에 오보에 등 목관악기 몇 개가 추가되는 식이다. 클라리넷조차도 18세기 말에서야 교향악단에 포함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18세기 교향곡은 악기들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는 특성이 있다. 모차르트는 악기 편성의 확대와 다양한 음악 기법 활용으로 교향곡 발전에 큰 몫을 한 음악가다. 어릴 때 부친의 권유로 유럽으로 음악 여행을 다닌 것이 다양한 영감을 얻게 된 동기로 알려져 있다.
 
그럼, 모차르트 교향곡 다수는 실내악 악보라고 봐도 되나? 그렇다. 초기엔 스무 명 남짓한 앙상블이면 족한 곡들이었고 나중엔 40명 이상이 연주하는 악보가 만들어졌다. 체임버오케스트라가 그 지점에 있다. 모차르트는 시대에 앞서 다양한 악기를 추가하고 자기만의 기법을 시도해가며 교향곡을 발전시켰다.

체임버오케스트라는 흔히 말하는 오케스트라와 뭐가 다른가? 더 특별한 매력이 있다면? 오케스트라 중 딱 중간 규모를 말한다. 실내악 연주단으로 생각하면 쉽다. 일반적으로 20명 전후를 앙상블이라고 한다. 30~40명 정도를 체임버오케스트라로 부르고, 70명 이상을 오케스트라 또는 브라스 밴드라고 부른다. 각각의 울림과 느낌이 다른 것 아니겠나.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풀 세팅한 한정식과 세미 한정식, 간이 한정식 같은 거다. 연주는 철저히 악보를 따르기 때문에 밥상을 차리는 건 작곡가의 뜻이다. 악보에는 그 시대의 상황과 문화, 작가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 연주자들이 잘 읽어 표현한 하모니를 공감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이나 다 좋다. 개인 취향이지만 난 실내악을 특별히 좋아했다.            

민간 연주단체로서 KCO의 월드 투어 기록은 꽤 놀랍다. 지금까지 해외 초청 연주를 140번 했다. 독일과 미국이 주로 많았다. 클래식 단체로선 해외 연주 경험이 제일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첫 시작은 1987년이었다. 뉴욕 연주회에 처음 갈 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망신만 당하고 오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런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미디어 리뷰가 극찬이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도 하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가졌다. 이후 매년 해외 연주를 하게 됐다. 창단 50주년이었던 2015년엔 ‘빅 파이브(5)’ 연주에 도전하기로 하고 스위스 매니지먼트 회사랑 계약을 했다. 빅5는 퀸 엘리자베스홀, 뉴욕 카네기홀,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홀, 비엔나 필하모닉 그리고 베를린이다. 보스턴도 계약했다.

사단법인 연주단체의 해외 투어는 할수록 손해 아닌가?커리어엔 도움 되지만 매번 물리적 한계에 부딪칠 텐데. 사실이다. 한 번 가려면 엄청난 비용과 수고, 피로가 따른다. 적어도 25명은 가야 하는 데다 첼로 같은 악기는 좌석을 따로 사야 하는 등 돈이 많이 든다. 거리가 멀어 단원들의 피로도도 심하다. 공연을 위해 각자 현업 스케줄을 빼야 하고, 연습에도 참여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연주료 받으면 개런티로 다 나가고 빈손이나 적자가 될 수 있다. 다행히 현지 리뷰가 좋으면 스폰서가 붙어 겨우 충당할 수 있다. 그래서 한때는 현지에 오피스를 두는 방법도 생각해봤다. 비행기 탈 필요 없이 빠르게 모여 연습하고 공연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나 싶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모을 수 있는 단원에 한계가 있다는 게 함정이다. 아무래도 현지 유학생이 많을 텐데 그들은 한시적인 활동일 수밖에 없다. 체임버 멤버들은 호흡이 중요하다. 철학도 맞아야 한다. 각자 직업이 따로 있어도 전속단원처럼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연주하는 단원들이 있어 KCO가 계속된다.
 
그렇게 힘든데 해외 연주를 꼭 해야 하나?클래식 문턱이 아직 높은 국내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무대를 만드는 건 어떤가? 해외 연주를 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연주할 곳이 많아서다. 클래식이 일상화돼 있는 문화라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연주 무대가 너무나 많다. 연주자들에겐 그게 기회다. 일정한 스탠더드에 올라서면 자기 브랜드를 가지고 충분한 연주 활동을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그런 면에서 토양이 좁다. 서양에선 거리 노동자나 택시 드라이버도 연주회를 수시로 찾는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클래식이라 하면 가진 자들만 향유하는 것이라 여기는 편견이 남아 있다. 그들에 비해 무대도 그리 많지 않다.
 
KCO가 쌓은 글로벌 이미지는 온전히 김민 감독의 역량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 단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김민의 존재감은 더 확실해진다. KCO의 옛 이름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이었다. 1965년 서울대 전봉초 교수가 만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체임버오케스트라였다. 고 전봉초 교수는 서울대 음대 재학 때 김민의 스승이었다. 1980년 김민이 독일 유학을 다녀온 뒤 서울대 음대 학장이 된 은사를 다시 만났을 때, 서울바로크합주단은 활동을 멈춘 채 명맥만 유지해오고 있었다. 귀국 후 실내악단 조직을 준비하던 제자는 은사의 뜻을 이어받아 서울바로크합주단 운영을 맡았다. 시작부터 이름이 걸리긴 했다. 바로크 음악만 연주하는 단체로 오인하기 쉬웠기 때문. 하지만 오래 써왔던 이름이라 선뜻 바꿀 수 없었고 주변의 반대도 있었다. 1987년 해외 연주가 본격화되면서 영어식 이름이 필요했다. 이때 코리안체임버오케스트라(KCO)를 처음 쓰면서 국내용과 국외용으로 이름이 두 개가 된 것. 김민의 KCO는 1999년 파리 유네스코 회관, 2000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의 공연을 통해 UN 공식 ‘평화의 실내악단’으로 지정됐다. 지금까지 국내외에서 679회의 공연을 소화하고 17장의 CD를 발매하면서 세계와 대한민국에 체임버오케스트라의 힘을 각인시켜왔다. 그 성과에 힘입어 김 감독은 그간 함께 이뤄온 전통을 의식해 쉬 바꾸지 못했던 이름을 바꿀 수 있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창단 50주년이었던 2015년에야 온전한 KCO로 다시 태어났다. 정체성의 혼란을 무릅쓰고 단원들 스스로 변화하고 결정하길 기다린 결과였다.
 
40년간 단체를 이끌어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한 리더십이 있다면? 음악 하는 이들은 개성과 자존심이 강하다. 도제식의 독특한 문화도 있다. 예민한 사람들이라 단체생활을 하다 보면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혼자 하는 것도 힘들지만 둘 이상 모이면 하모니와 팀워크가 중요한데, 이걸 잘 이끌어가는 역할이 지휘자나 리더에게 달려 있다. 단체생활이니 무조건 양보하라는 건 한계가 있다. 양보보다는 타협이 중요하다. 리더의 덕목엔 두 가지 트랙이 필요하다. 첫째는 실력, 둘째는 인간적 신뢰와 조화다. 단체에서 요구나 불만이 많아진다는 건 리더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불신임일 수도 있다. 이때 실력으로 보여주거나 인간애로 리드해야 한다고 본다. 둘 중 하나라도 돼야 한다. 우리 경우는 직장이 아닌 사설단체이니 제일 중요한 건 공감이다. 단원들이 오랫동안 나를 리더로 인정하는 것도 함께한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시하지 않는다. 모든 걸 같이하고 투명하게 공유한다. 단원 중에 후배도 많고 제자들도 있지만 나이 차는 상관없다. 30, 40년 후배들도 무조건 동료다.

개인적으론 바이올린 연주가이다. 단체의 리더로 개인의 욕심을 희생해온 삶이 아쉽진 않은가? 이제 70대 중반이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 체감으로는 120년을 산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바이올린을 시작해서 오케스트라와 실내악단, 교수와 단체 리더로 20, 30년씩 투신했다. 국내외 통틀어 음악과 관련된 활동을 한 걸 햇수로 다 합쳐보면 250년이 넘는다. 사실 어릴 때 음악보다 더 좋아한 건 미술이었다. 음악 교육자인 부모님은 맏아들이 바이올린을 계속하길 바라셨지만, 중간에 일탈도 많이 했다. 비싼 일제 바이올린을 사주면서 독려하신 부모님 뜻을 거스르고 음악 하기 싫어 가출도 해봤다. 제주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려고 40일 동안 가출했다. 중학생 때였으니 엄청 대담한 친구였던 것 같다. 예고에 가면서 비로소 음악에 집중했는데, 그것도 사실 마지못해 한 것 같다. 입학해보니 남자는 6명이고 여자애들이 60명이더라. 못하면 창피하니까 죽자고 매달렸더니 졸업 땐 수석이 됐다. 이후론 바이올린이 좋았고 특히 실내악이 너무 좋았다. 가르치는 일도 좋지만 체임버오케스트라로 활동하는 게 잘 맞아 모든 걸 쏟아 부었다. 학부 생활 때도, 귀국 후 전 교수님께 합주단을 물려받기 전에도 실내악단을 만들고 악장을 하곤 했다. 1980년 이 단체를 맡고서 기획부터 디자인, 경영, 연주회 준비 등 모든 걸 혼자 했다. 1990년대 초가 돼서야 직원 하나를 두었고 1997년 해외 연주를 본격화하면서 회원도 더 늘리고 직원도 한둘 더 뽑았다. 열심히 하니까 회원도 많아지고 팬도 많아지고 후원자도 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개인과 단체가 따로 없다. 그냥 좋아서 하는 거니 희생이랄 것도 없고 손해랄 것도 없다.       
 
예술과 행정은 부딪치기 쉽다.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병행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수년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맞고소 사건이 생각난다. 행정이나 경영을 따로 배운 건 없다. 40년간 하다 보니 하나씩 배워서 꾸려온 것뿐이다. 투명하게 하면 되는 것 같다. 그러면 굴러간다. 음악은 나의 세포다. 돈 벌려고 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물음엔 특별히 대답할 말이 없다. 음악인으로서 그냥 박수 받는 게 좋고, 그래서 자존심을 키우고 다시 음악 하고, 그러는 거다. 단원들도 같은 생각일 거다. 그러니까 어려운 중에도 참여하는 단원이 늘어나는 것 같다. 단원이 너무 많다. 120명 정도 되는데 나가는 사람이 없다(웃음). 지난 40년간 중간에 이탈과 진입이 꽤 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처음부터 함께한 고정 멤버가 많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생각한다.

KCO처럼 오랫동안 살아남고 사랑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그냥 친목단체가 아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니까 무엇보다 음악을 잘하는 게 최선의 비결 아니겠나. 고정적인 스폰서 없이 단체가 운영되긴 힘들다. 그렇다고 돈 버는 영업에만 매달릴 건 아니지 않나. 끝없는 연습으로 기량을 보여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 퀼리티를 중시해서 단원들에게 많은 연습을 요구했다. 1980년대엔 새벽 6시에 모여 두 시간 넘게 연습하고 샌드위치 하나씩 물고 각자 출근하는 풍경이 일반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어디서 그런 열정들이 나왔는지.

지금도 개인 연습을 하나? 평소 일과는? 늘 해왔지만 요즘엔 코로나19 덕에 연습시간이 늘었다. 9월부터 공연이 재개되니 좀 더 긴장하려 한다. 집에서 주로 연습하고 사무실에 나와서는 두 가지 일 하느라 나름 바쁘다. KCO 관련 일 돌봐야 하고 4년 전에 설립한 영재음악학원(SCC) 일도 돌보고 있다. 정해진 강의도 나가야 한다.

클래식의 문턱이 아직 높다는 말이 있다. 동의하는가? 오래전에 한예종 총장을 지낸 이강숙 교수와 일본 대표 음악학자가 대담을 했던 게 기억난다. 클래식 대중화는 가능한가라는 논제였는데, 둘의 이야기 방향은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클래식 대중화는 안 된다는 결론이었다. 나도 동의한다. 힘들기도 하고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클래식은 클래식대로 가고 대중음악은 대중음악대로 가면 된다. 나 역시 오래 고민했다. IMF로 국민들이 힘들어할 때 특히 많이 고민했다. 세미클래식이라도 만들어 대중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클래식은 클래식 원형대로 청중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렵다고 합쳐지고 변형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퓨전음악은 반짝할 순 있지만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아예 클래식도 아니고 팝도 아닌 제3의 음악이 만들어지는 건 환영할 만하다. 최근에 어떤 제자가 그 가능성을 열어 보여 깜짝 놀랐다.   
온전한 클래식을 대중화하는 방법은 어떤가?플래시몹이나 버스킹 같은. 해외 여행지에 가면 리버 브리지에서 집시나 학생들이 클래식 음악도 버스킹을 한다. 우리도 그런 문화가 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버스킹이나 플래시몹은 제대로 완성된 연주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보고 듣는 사람은 쉽지만 하는 사람들은 준비할 게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악보도 다 외워야 하고 부담이 크다. 우리도 부여의 한 리조트에서 버스킹을 해본 적 있는데, 너무 힘들어서 이후론 자주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 교향곡 중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다면? 다 주옥같은 곡이라서 한두 가지만 꼽기가 곤란하다. 그래도 너무 낯설지 않은 곡부터 접근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영화 <아마데우스>로 알려진 25번이나 40번, 41번을 먼저 권한다.

체임버오케스트라는 객석의 감상 포인트가 다른가? 오케스트라의 규모에 따라 울림과 느낌이 다른 것뿐이다. 어떤 연주회든 기본적인 감상 포인트는 하나다. 무작정 가지 말고 그날의 연주곡이 뭔지 찾아보고 미리 한 번이라도 듣고 가면 훨씬 좋다. 전곡을 다 듣지 않아도 메인 곡이라도 들어보고 가자. 그래야 친근하고 재미있다.   

하던 일 외에 더 해보고 싶은 일은 뭔가?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어릴 땐 음악보다 미술을 더 좋아했다. 그동안 못해본 그림 그리기를 요즘 시작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시간을 번 것이 계기였다. 건축 하는 동생과 미술 하는 동생이 있다. ‘미술 동생’이 무조건 열심히 그리라고 해서 몇 주 전부터 원 없이 그린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좋고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무대예술가들은 코로나 때문에 더 힘들다. 포스트 코로나가 두렵지 않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평생 이것저것 원 없이 해봤다. 힘들었지만 자부심도 느끼고 함께해온 사람들이 고맙다. 내 의지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라서 신은 확실히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코로나로 연주가 취소되니까 많이들 걱정해준다. 맥이 빠지진 않을지, 경비 지출도 많은데 잘 견뎌낼지 등 염려가 많다. 그래도 마음을 비운다. 내 음악 인생은 운명적으로 흘러왔다. 안 되다가도 잘될 때가 또 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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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O와 김민 감독의 모차르트 프로젝트는 지난해 12월 28일 첫 연주를 시작으로 1월 연주까지 마친 상태다. 3월과 6월에 각각 2회씩 예정돼 있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무기한 연기되다가 9월 재개를 앞두고 있다. 1980년부터 40년간 이어온 ‘김민의 KCO’로서는 이번 프로젝트가 자못 값질 수밖에 없다. 터닝 포인트이자 미래의 KCO를 가늠하는 새 주춧돌이다.     
 
창단 35주년 때 그의 스승인 전봉초 선생이 쓴 헌사를 빌리자면, 세계사에 남을 위대하고 당당한 업적은 모두 어떠한 열중이 안겨준 승리였다. 미국의 저명한 사상가 에머슨이 남긴 말이다. 전봉초 선생은 “연주가가 연주에 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실내악에 대한 김민의 열중이야말로 불후의 금자탑”이라고 칭송했다.
 
쌓은 것이 너무 많아 잊거나 흘릴 것 많은 나이. 그러나 김민은 여전히 쌩쌩하고 열정적이다. 윤기 흐르는 멋진 백발은 부러움을 사고, 경쾌하게 열중하는 몸놀림은 시선을 분주하게 하고, 클래식하지 않은 소탈한 웃음소리는 마음을 앗아간다. 그와 함께한 한낮의 클래식은 그렇게 몇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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