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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de Veteran 7]과학과 예술 넘나드는 ‘양다리’ 타이포그래퍼 유지원

“도구 물리학과 인체 생물학의 만남, 글자의 세계는 신비하죠”

2020-06-17 08:43

글 : 이상문 기자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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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 딸을 기대하는 부모를 둔, 문학을 좋아하던 소녀가, 과학을 하는 마음으로, 미술을 선택했다.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을 뿐인데 4차원, 오지라퍼, 엉뚱한 딸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학과 과학, 미술을 두루 섭렵하는 연구자, 갈라진 세계를 연결해주는 소통 전문가라는 이름을 얻었다.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의 과제는 그래서 복잡다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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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계기는 흔한 듯 흔하지 않은 책 제목 때문이었다. <뉴턴의 아틀리에>(김상욱·유지원, 민음사). 단번에 ‘과학과 미술의 짬뽕 구라겠거니’ 짐작했지만, 뭐라고 말하는지는 엿보고 싶었다. 그냥 지나쳤다면 그런 게 바로 콘텐츠 홍수시대에 사는 폐단이다. 날림의 정보엔 익숙하지만 속살을 파고드는 노력과 진지함은 사뭇 덜하다. 그래서 우리는 만났다. 책을 통해 먼저 만나고 카페에서 되새김질을 했는데, 명료하고 친숙해진 점도 있고 오히려 더 어려워진 구석도 있다. 타이포그래피의 세계가 그로 인해 단순한 듯 보이다가 복잡해졌다. 왜일까.

일부러 볼멘소리를 하자면, 이 책 때문이다. 저자인 두 사람의 욕심이 화(?)를 불렀다. 타이포그래퍼 유지원과 물리학자 김상욱이 서로 다른 두 영역을 관계 맺도록 주선한 게 일의 시작이었다. 김상욱 교수는 틈만 나면 미술관을 찾는 과학자, 유지원 작가는 물리학회까지 참석하며 과학에 열정을 보이는 디자이너다. 두 사람은 수년 전부터 한 신문에 칼럼을 교차로 연재하며 인연을 맺었고, 둘 모두 각 학문의 영역이 관계 맺고 소통하기를 바란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며 친해졌다. 자연스러움, 복잡함, 감각, 가치, 유머 등 26개의 키워드를 놓고 과학자와 예술가로서 다양한 생각을 펼쳐냈다. 유지원은 이 소통의 가능성을 ‘경계’에서 찾는다. 경계에서 만나 서로의 영역에 조금씩 건너가보는 작업이다. 그래야 생명력이 생긴다고, 그는 말한다.

‘…세포도 인간도 네트워크를 이루어 서로 의존해야 생존을 유지한다. 아무리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늘 외부와 어떤 경로로든 소통하고 있다. 이것이 개체성과 양립하는 사회성이다. 세포막으로 경계가 나뉜 세포들은 서로 어떻게 소통을 할까? 세포막에는 여러 종류의 막단백질이 있어 이들이 세포의 외부와 내부를 소통시키기도 하고 세포들끼리 소통시키는 역할도 한다. 세포막은 개체의 경계를 가르면서도 서로 소통하고 연결하며 생명을 유지하도록 한다. (…) 소통이란 생명 그 자체이고 때로 개체의 목숨을 초월해서 관철되기도 한다. (…) <뉴턴의 아틀리에> 역시 막단백질 같은 역할로 여겨졌으면 한다. 여러 분야들의 세포막 같은 경계를 넘나드는 소통의 통로처럼 여겨지기를 바라면서….’
―<뉴턴의 아틀리에> p.4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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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을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고 간단히 정의해도 되는가? “예술과 과학, 미술과 과학이 만난다는 말, 만나야 한다는 말을 사실은 굉장히 싫어한다. 예술 안에 이미 과학이 들어 있고, 과학 안에 예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그런 얘기를 많이 하고 다녔다. 생소한 것끼리 처음 만난 게 아니고 원래 연결된 것을 재확인한 것뿐이다.”

미술과 과학이 그렇게 연결돼 있다고, 관계한다고 처음 느낀 건 언제부터인가? “대학 전공을 택할 때나 학교에 다닐 때나, 수학이랑 과학을 못 하면 미술로 가는 거라는 편견 같은 게 많았다. 그게 몹시 불편했다. 수학과 과학도 잘하지만 미술을 더 좋아하거나 잘해서 미술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1학년 전공수업 때 과제를 하는데 미술이 과학 그 자체였다. 가시적인 걸 만드는 미술 활동에는 수학적 아이디어가 꼭 필요했다. 물성을 정확히 파악해야 표현이 가능한 것 아닌가. 입체조형도 힘의 원리를 모르면 만들기 힘들다. 모션 그래픽에서도 공이 통통 튀는 걸 표현하려면 구의 물리적 운동 방향과 크기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대개는 그냥 감으로 표현하더라. 내가 보기엔 미술 대부분이 물리학의 영역이었는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난 그때부터 교양필수로 맞춤형 물리학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술은 감각적이고 미대생은 감성적일 거라는 통념과 꽤 다르다. “(미술 하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지냈다. 그래서 더 고생하지 않았나를 말하는 거다. 미술에 물리학이 내재돼 있다고 생각 못 한 게 원인이다.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학문은 학생을 괴롭히는 거라고만 생각했지, 미술을 도와줄 수 있는 과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거다. 미대생이 좋아하는 물리학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용수철을 표현한다 치면, 탄성계수를 알면 훨씬 표현이 다양해지는 식이다. 상상력만으로는 표현 범위가 좁아지거나 결과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수학이나 물리가 미술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런 쪽 일에 소명의식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과제로 삼고 있는 건가? “문과나 미대생이 좋아할 만한 물리, 그런 과학을 가르치지 못하는 게 좀 답답하다. 가공된 쉬운 과학을 가르쳐야 한다. 그걸 보여주지 않으니까 적대시하는 것 같다. 누군가 내게 다음 행로가 뭐냐고 물으면, 수학과 과학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중고생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한다. 분과학문이라는 구실로 칸막이를 놓는 게 문제다. 학교뿐 아니다. 사회에서도 직업에 이름을 붙여 소양을 구분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직업에 내 소양을 맞춘다. 내가 가진 소양에 직업을 맞추는 게 아니라 반대로 간다. 한 가지로 규정이 안 되는 직업적 소양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칸막이와 이름이 문제다. 몇 가지 과목명으로 알 수 없는 재능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재능들이 아깝다. 그런 걸 보살피는 교육 제도나 기관이 없는 게 아쉽다.”

통섭 또는 융합이라는 말에 관심이 많겠다. “통섭이나 융합이라는 말이 그다지 기쁘진 않다. 좋아하지 않는다. 언어 개념 자체는 좋으나 통섭, 융합을 구실로 진흥시킨다고 한 일들에는 무리수가 많았다. 애들만 괴롭히고 실망을 주었다. 좋은 뜻의 언어가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오염된 케이스다.”

‘인식의 구속과 오류로부터 자유를 탐색하고…’라는 표현을 책에 썼다. 어릴 때부터 줄곧 취해온 태도인 것 같던데, 잘못된 인식에 구속받은 경험이 많은가? “미술을 하게 된 경위를 돌아보면 설명이 될 것 같다. 중2 때 뒤늦게 미술을 하기로 결심했다. (다른)공부도 썩 잘했다. 수학도 과학도 어렵지 않게 잘했는데, 미술을 한다니 모두들 놀라고 반대했다. 사람들은 인간의 재능에 길항작용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재능에 총량이 있어 어느 쪽을 잘하면 다른 쪽은 역량이 작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능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난 여러 재능 중 무엇을 가장 좋아하나 생각했고 미술을 하기로 결정한 거다. 어릴 때니까 감성적이고 유치한 구석도 있긴 했다. 헤르만 헤세에 빠져 있었는데 그가 열네 살 때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는 말을 했다기에 열네 살이던 나도 자극을 받았다. 내 결과물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게 좋았다.”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 “당연히 반대했다. 설득이 안 됐고 많이 싸웠다. 아버지가 법관이셨다. 맏딸이 당연히 판사가 될 거라고 기대했다. 공부 잘하고 있던 딸이 갑자기 미술을 한다고 하니 당황하셨을 거다. 집안 지원 하나도 없이 미술을 시작했다. 선화예고에 진학하기로 했는데 엄마는 그걸 알고도 중3 과학반 신청을 몰래 해놓았다. 미련이 계속 남은 거였다. 그때는 반항심에 과학을 더 멀리했다. 예고에 불합격할 걸로 짐작했던 부모님은 합격 통보를 받고 그렇게 실망하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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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어떤 분야가 제일 좋았나? “뭐든 미술로 칭찬받는 게 제일 뿌듯했다. 수채화 등 회화도 했지만 실용에 관심 많아서 디자인을 좋아했다. 대학 2학년 때는 디자인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하겠다 말했다. 실용 디자인을 하면서 물리나 과학에 관심을 갖더니 나중엔 책까지 내는 걸 보고 엄마는 ‘소질이 원래 과학이었다’고 ‘타고난 자질은 속일 수 없다’고 말하셨다. 아버지 때문에 법조인이 되길 원했지만 성향적으로는 자연과학이 어울릴 거라고 봤다고 하셨다. 그런 점엔 나도 동의한다. 엔지니어가 맞는 것 같다.”

실용 디자인을 택한 이유는? “선화예고 응용미술과였다. 디자인이 아니면 진로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2학년 때 디자인, 서양화, 동양화, 조소로 전공이 갈리는데, 동양화는 147명 중 143등이었다. 어차피 디자인을 할 거니까 시간 낭비라 생각했다. 수학 점수가 항상 좋았다. 문제를 보면 답이 순식간에 보였다. 문제를 기발한 방식으로 푼다고 선생님들이 특이하게 바라보셨다. 난 그게 수학적 재능이라기보다 일종의 기예로 생각했다. 곡예 같은 거랄까. 수학을 잘 풀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디자인이지 수학은 아니었다. 회화보다는 수학적, 물리적 판단을 적용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특별히 타이포그래피로 방향을 잡은 계기는? “마치 운명처럼 모든 게 처음부터 연결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술을 하지 않았다면 독어독문학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유학도 독일로 갔다. 기본적으로 책과 글자를 좋아했다. 시각적 효과와 자극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다. 언어와 글자, 문학까지도 시각화라는 측면에서 모두 다 연결돼 있다. 본다는 것은 물리적 행위다. 여러 사람의 지혜가 책을 통해 전달된다는 것 역시, 시각을 통해 전달돼왔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지혜가 타이포그래피와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했다.”

독일 작센에서 공부한 경험이 특별하다고 했다. 공저자 김상욱 교수와도 인연이 있는 곳이라던데. “김 교수와는 엇갈려서 같은 시기에 작센에 있진 않았다. 하지만 과학기술네트워크 모임을 통해 공통분모가 생겼고, 그중 작센에 대한 공감이 꽤 있다. 작센을 포함한 유럽 토양의 특징은 비표준의 다양성이다. 열린 사람들, 미국식 표준화가 아닌 다양한 퍼즐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유럽이 좋다. 특히 과학자들은 열린 상상력의 범위가 엄청나게 크고 넓다. 다양한 면에서 사물을 보고 규정하지 않고 왜곡을 피한다. 열린 결론으로 퍼즐을 풀어가는 과학적인 자세가 감동적이었다. 어떤 문제에 대해 결론은 어떻게 될까 물으면 ‘아마 8040년쯤 돼야 결론이 나지 않을까요?’라고들 말한다. 과학자들과 같이 있으면 스케일이 굉장히 커진다. 기본 단위가 수천 년씩이니까.”(웃음)

타이포그래피를 하는 이유, 딱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기 위해서다. 타이포는 그 연결성이 매우 강하다.”

타이포그래피로 해결하고 싶은 과제는? “중·고등학생들이 수식에 거부감이 있는데, 그걸 없애주고 싶다. 수식 타이포에 도전한다는 뜻이다. 방정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에도 이쁘고 내용도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아직 그런 시도는 없었는데 출판사와 조금씩 얘기 중이다.”

사회적 연결성을 많이 강조했다. 타이포그래피가 할 수 있는 공공성의 역할이 있을까?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관심이 있다. 김 교수님과 책에도 썼지만, 평균의 정의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고 싶다. 디자인이 평균을 상정하는데, 분배도 고려해야 한다. 분배가 없으면 여기저기서 소외당하거나 도태되는 사람이 생긴다. 예를 들어, 어린이 글쓰기 타이포그래피를 보자.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글자체가 어른들의 노련한 붓글씨체, 펜글씨체에 가깝다. 당연히 어렵다. 어린이는 몸도 작고 운동 제어력도 약한데 그런 서체를 쓰라고 하면 힘들다. 중간 과정에 어린이용 글씨체가 필요하다. 독일이나 영국은 그 방면의 연구와 실행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글자라는 놈은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나? 자판 글씨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 아이들은 힘든 글쓰기를 굳이 할 이유가 없어 포기한다. 쉬운 글자체가 개발되고 네이밍도 해줘야 한다고 본다. 독일은 16개 주마다 쓰는 글자가 정해져 있다. 우리도 시급하다고 본다.”

타이포그래피는 전달 수단이라는 기능적 측면만 본다면 지나친 변형과 과장은 허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떤가? “동의한다. 그렇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허영이란 말은 나쁜 의미가 아니다. 좋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타이포그래피도 예술이다. 예술의 다양한 얼굴을 사람들이 알아봤으면 좋겠다.”

캘리그래피 트렌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인가? “글자에는 세 가지 속성이 있다. 가시성, 판독성, 가독성이다. 한 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가시성이다. ‘흥’과 ‘홍’이 구별돼야 한다고 말할 때는 판독성을 뜻하는 거다. 모양이 비슷하지만 발음이 워낙 다르니 확실히 구별해줘야 한다. 판사나 아나운서 같은 직업엔 아주 중요한 요소다. 나는 가독성을 중요시하는 전문가다. 캘리그래피는 가시성과 유희성에 가깝다. 세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보게 하는 기능을 중시한다. 그래서 가독성 전문가다. 캘리그래피에선 조금 떨어져 있다. 하지만 캘리그래피는 공헌을 많이 한다. 내가 아무리 서체 차이를 설명한다 해도 캘리만큼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고 여러 가지 감흥을 던져주지 못한다. 캘리가 융성하는 건 타이포 전체가 함께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가독성을 중시하는 전문가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나? “글씨는 도구의 물리학과 인체의 생물학이 결합돼 있는 결과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손글씨를 모으면 일상의 패턴이 보일 수 있다. 직업이나 성별, 연령 등 생물학적 몸과 사회적 몸이 글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분석해 알 수 있다. 그런 연구는 없어서 내가 그걸 하고 있다.”

예술가보다 엔지니어라고 보면 되겠나? “맞다. 나는 엔지니어처럼 사람들 생활을 더 편리하게 하려는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다. 타이포 미술을 하되 과학자적인 마인드로 접근한다.”

글자의 패턴을 수집한다는데, 그런 자료가 수집이 되나? “지난해에 어린이 교과서 타이포그래피 연구회가 있었다. 최근엔 교보문고에서 손글쓰기문화확산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다. 거기 위원이 되어 참가한다. 응모작이 600점 이상 들어온다는데, 이게 소중한 연구자료가 될 거라는 직감이 든다. 어린이 교육과 글자 그리고 사회적 패턴, 그런 걸 구조화하는 작업이 가능할 거라고 본다. 글씨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고 소외자들에게 편안한 글자를 제공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대회 마치면 연구자료로 넘겨달라고 부탁도 했다. 아직 이런 연구가 없었다. 역사나 문헌적 연구만 있었다.”

이런 것도 빅데이터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물리학적, 생물학적으로 연구한다. 흔치 않았던 관점이니 아직 자료가 많지 않지만 나중엔 빅데이터가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선생님들한테도 손글씨 모으면 유용한 데이터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다들 공감하셨다.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글씨에 대한 가치관과 선호도가 다를 테니, 그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서로 다른 관점을 나누다 보면 관점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나도 기존의 가치관을 수정하고 배울 수 있을 테니 설렌다.”

단연 과학을 추종하는 타이포그래퍼답다. 글자와 과학을 얘기하고 있다 보니 세종대왕 생각이 난다. “오늘(5월 15일)이 마침 세종대왕 탄신일이다.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가독성의 글자를 연구하신 분이니 너무 위대한 과학자셨다. 과분한 비유지만, 지식 민주화를 위해 일한 점에서는 맥락이 통하긴 한다.”(웃음)

손글씨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대한 의견은? “줄긴 하지만 절대 사라지진 않는다. 인간이 포유류인 한, 물성에 대한 감촉과 감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디지털 단말기 터치 화면을 보자. 매끄러운 느낌에 익숙해진 시대다. 하지만 이제 다시 종이 질감을 원하는 단말기로 갈 것이다. 기술 발달의 방향이 다시 물성을 접촉하는 쪽으로 틀 것이다. 로봇도 딱딱한 조립 로봇에서 부드러운 연성 로봇으로 가고 있지 않나. 글자도 종국엔 손글씨에서 답을 찾게 될 것이다. 미래는 죽은 나무토막의 시대로만 가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은 결국 인간의 몸으로 회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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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하자면 유지원은 ‘양다리’ 타이포그래퍼 또는 ‘문어발’ 타이포그래퍼다. 무례를 무릅쓰고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를 콘텐츠 프로바이더인 것 같아서다. 글자의 물성과 역학, 기능을 전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을 사람이요, 이미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인문학자이자 작가이기 때문. 타이포그래피는 소통이다, 당신은 소통을 위해 타이포를 연구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소통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였다. 앞으로는 작가로 불리고 싶다는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타이포그래퍼의 불문율이 ‘함부로 참견하지 말라’예요. 타이포그래피는 ‘어떻게’의 학문이지 ‘무엇을’의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죠. 저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배웁니다. 예를 들어 문학작품에서 ‘장미’를 맘대로 강조하면 큰일 납니다. ‘무엇을’은 저자의 영역이니까요. 그런데 전 타이포그래퍼이자 저자이기도 해서 그런 혼란이 생겼어요. 두 가지 정체성이 섞여 있으니 앞으로의 과제도 달라져야겠죠.”

독일 유학 중에 인쇄기술을 자주 둘러보았다. 완벽한 기능성을 가진 인쇄기계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현대에 와도 대체할 수 없는 올드 테크놀로지의 그 무결함을, 그는 과학과 예술의 관계로 해석한다.

“과학과 예술, 도구와 감성… 우리는 자꾸 이렇게 이름을 붙여놓고 구분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기계를 보면서 도구나 기술 자체가 감성과 감동의 세계라는 걸 느껴요. 그러니 과학이 곧 예술이기도 한 거죠. 다른 영역인데 넘나드는 게 아니라 원래 한 영역일 수 있다는 겁니다.”

‘작가’ 유지원은 오래된 인쇄기에 잉크가 흐르고 돌아가는 걸 보면 뜨거운 피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아이작슨이 안내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읽을 때, 그가 한 모든 예술이 과학 자체였음에 놀란 적 있다. 그래도 내 몸에 피가 도는 느낌까진 아니었는데, 과학을 아는 예술가는 역시나 더 뜨겁다. 무엇을 보더라도 훨씬 풍요로울 테니, 마구 샘나고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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