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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팔 만담가의 세상토크 06]이건용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명예교수

“초교 시절 이계석(작곡가) 선생님의 칭찬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해주셨어요”

2018-08-10 09:57

글 : 장광팔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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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그렇다. 누가 온다는 것, 또 무엇과 마주친다는 것, 그것들로 인해 나를 찾는다는 것, 그건 내 운명의 한 막(幕)이 열리는 것이다. 한국 현대음악의 거장 이건용(71)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의 인생이 그렇다.
그는 목사이면서 음악을 사랑했던 부친을 통해 음악과 마주쳤고, 작곡가 이계석 선생을 만나 작곡에 눈을 뜬 후 그의 운명의 한 막을 연다. 서울중학교,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음대에서 음악을 통해 자아를 찾고 자아를 표현하려 발버둥을 쳤지만, 서울 염리동 달동네에서의 그의 삶과 음악은 전혀 무관하였다. 한예종 4대 총장으로 소임을 마치고,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을 지낸 그는 다시 한예종 음악원에서 손자 같은 영재를 기르고 있다. 그는 그의 운명 같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단호히 ‘교육은 사랑이다’고 단정 짓는다.
운명 1막
서귀포 푸른 바다를 만나다
 
장광팔 만담가 고향이 대동강 유역 낙랑평야가 있는 평안남도 대동군이죠? 남북·북미 정상회담도 열리고 하니, 고향 생각이 나시겠어요.

이건용 명예교수 1·4후퇴 때인 3살 때 떠나왔으니 워낙 어려서 고향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머리도 신통치 않고 해서.(웃음)

장광팔 저는 태어날 때 기억이 생생한데요.(큰 웃음) 피란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이건용 가족들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6·25전쟁 당시 국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공세로 후퇴할 때 평양에 살던 사람들이 남한으로 피란하는데, 우리 가족도 함께 내려온 거예요. 그런데 피란시절 기억이 없는 게 다행이에요. 1942년생인 형님은 피란길에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를 무수히 보았대요.

장광팔 기억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죠. 기억이 안 나는 여백은 아름다움이 채워주잖아요. 그래 어디로 피란하셨어요?

이건용 열차 지붕 위에도 타고, 업히고, 걷고, 배도 타고 하면서 부산을 거쳐 서귀포로 왔대요. 기억나는 장면은 배를 타고 오며 무서웠던 그림 한 컷이 남아 있어요. 밤에 갑판에서 칠흑 같은 바다로 오줌을 누며 무서움에 진저리를 쳤던 기억이 나네요.

장광팔 그 순간에는 시원해서 저절로 진저리가 나는 거잖아요?(웃음) 제주도 생활도 기억나시나요?

이건용 서귀포에 녹음 우거지고 습한 바람 불고 포근했던 몽환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가족들 이야기로는 당시 서귀포에는 공비가 남아 있어 밤에 붙들려가 심문도 당하던 상황이라 그렇게 평화로운 분위기가 아니었대요. 아! 화장실의 돼지가 무서웠던 기억도 나요.

장광팔 그 제주도 똥돼지가 얼마나 맛있는데요?(웃음) 그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시죠.

이건용 제주도에 2년 채 안 되게 있다가 부산으로 건너가 피란 재동초등학교 천막 교사에 다녔어요. 다시 2년쯤 지내다가 1953년에 서울로 올라와 당시 돈암국민학교를 다녔어요. 2부제로 한 반에 100명이 넘는 ‘콩나물시루’에서 공부했는데, 저로서는 존재감이 없는 기간이었어요
 

운명 2막
아버님이 만들어주신 좋은 음악 환경을 만나다
 
장광팔 이북 피란민에 7형제 중 넷째 아들이 어떻게 작곡자가 될 수 있었나요?

이건용 아버님께서 목사님이셨어요. 가족예배를 드렸는데, 동생들은 어려서 기도만 드리고 노래 잘하시는 아버님과 형님들 그리고 제가 4부 합창으로 찬송가를 매일 불렀던 것이 조기 음악공부가 되었어요. 아버님이 워낙 음악을 좋아하셨는데 아마 저는 아니고 두 형님 중에 한 분을 음악가로 키우고 싶으셨나 봐요. 하루는 바이올린을 두 대나 사가지고 오셔서 형님들한테 “한번 해봐” 하고 권유하시는 거예요. (이때 이 교수와 동향으로 인터뷰를 함께 하던 김혁수 한국야쿠르트 상임고문이 평양도 사투리로 바로잡아준다.)
김 ‘야들아, 이거 한 번 안해 보간?’(큰 웃음)

이건용 아버님이 연희전문 교목으로 취임하시면서 살던 집을 팔고 사택으로 이사했는데, 워낙 이재에 어두워 죄송한 말씀이지만 집 판 돈을 굴릴 생각은 못 하고 목돈이 생기니까 평소 자식들에게 사주고 싶었던 피아노를 한 대 사주셨어요.

장광팔 당시 피아노라. 그것도 집 판 돈으로… 오늘의 음악가 이건용 교수가 있기까지는 훌륭한 아버님이 계셨네요.

이건용 제가 공부를 좀 잘해서 서울중학교를 다녔는데,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를 하려면 예고에 가야 했어요. 그런데 당시 서울중학교 다니다 예고를 가겠다면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 때라(웃음) 차마 부모님께 입을 뗄 수 없었는데, 용기를 내어 “아버님 저 작곡 공부하러 예고에 갔으면 합니다” 하고 어렵게 말씀드렸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시원하게 “너 잘 결정했다” 하시는 거예요.

장광팔 어르신께 절로 존경심이 우러나오네요.

이건용 아버님께서 제게 육신은 물론 신앙과 음악 두 가지를 선물로 주신 셈이죠. 그런데 고혈압으로 57세에 일찍 작고하셨어요. 제가 57세 되던 해 ‘아! 나는 아버님보다 오래 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시니컬한 웃음) 그때부터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웠어요. 그래도 제게는 항상 음악이 곁에 있어서 힘든 줄 모르고 지냈어요.
 

운명 3막
음악혼을 불어넣어준 이계석 선생님을 만나다
 
장광팔 다시 학창시절로 돌아가볼까요?

이건용 초등학교 4학년 때 효제국민학교로 전학했는데, 비로소 이때가 제 눈에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고 웃음도 찾은 시기예요. 성적표 통신란에 담임선생님께서 ‘명랑 쾌활한 아동’이라고 써주셨더라고요.

장광팔 인생에 첫 번째 티핑 포인트가 된 시기였군요.

이건용 맞아요. 제 짝궁 조옥희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 아이가 노래를 잘한다고 자주 시키셨어요. “날이 샌다, 목장에 아침이 온다. 사랑하는 그대여…” 하는 노래였어요. 그때 ‘어어? 나는 더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질투심은 아니고 자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더라고요.

장광팔 자존감을 찾은 순간이었네요.

이건용 예. 그런데 결정적 순간이 온 거예요. 제가 1학년 1반 때 2반 담임선생님이 “우리 모두 다같이 화음공부 해보자/도미솔미 도미솔솔솔/너도나도 소리맞춰 화음 노래 부르자”는 ‘화음 3형제’를 작곡한 이계석 선생님(작고)이셨어요.

장광팔 운명의 손이 곁에 계셨군요.

이건용 그 선생님 곁을 지나가자면 이상하게 의식하게 되고 굳어지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장광팔 사모하는 여성을 스쳐 지나갈 때처럼요?(웃음)

이건용 그런데 마침 1반 담임이던 이석훈 선생님께서 일이 생겨 학교에 못 나오게 되면서 1반과 2반이 합반하게 된 거예요.

장광팔 드디어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군요.

이건용 예.(웃음) 하루는 칠판 오선 위에 4분의 4박자 도도미솔 이렇게 음표를 그려놓고는 한 칸을 비워놓으시더니 “여기에 들어갈 음을 그릴 사람?” 하시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게 있어 손을 번쩍 들고 나가서 자신 있게 그려 넣었더니 어찌나 칭찬하시던지(웃음) 그 순간 저는 작곡가가 된 거예요.(큰 웃음) 그때부터 저는 자연스럽게 그냥 틈틈이 선율을 그리곤 했어요.

장광팔 선문선답을 하자면, “저 작곡가 할래요” 손을 들으니, “그래 한번 해봐라” 하고 이계석 선생님이 답하신 거네요.

이건용 그렇습니다. 학생의 재능을 찾아내어 칭찬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선생이 해야 할 가장 숭고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인이 되고는 자기 결정으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만, 18세 이전에는 부모의, 특히 선생님의 날카로운 선별력과 칭찬 그리고 무한 신뢰가 필수적이에요. 이계석 선생님의 한마디 칭찬이 오늘의 제가 되었잖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초등학교 5학년생이 작곡을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겠어요. 특히 몸을 가지고 기량을 뽐내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발레 등은 10대 때 판가름이 나는 분야예요. 혼을 가진 학생을 찾아내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자 사명이에요. 20대에는 맹렬히 치고 나가게, 30~40대에는 원숙미를 더해 대가의 반열에 오르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장광팔 예능뿐 아니라 일반교육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건용 그럼요. 보통교육, 공교육 다 중요하지만, 별종은 별종대로 끄집어내서 갈고닦을 기회를 주어야 해요. 학생은 선생의 관심을 먹고 자랍니다. 영재가 아닌 보통학생이라도 각자 재능을 찾아내어 칭찬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칭찬이 학생의 미래를 결정하거든요. 상대평가라는 것, 객관화라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평가도 없어요. 선생과 학생은 객관성이 아니라 사랑으로 마주 대해야 합니다. 저는 ‘교육은 사랑이다’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한 인간의 삶의 모티프를 사랑으로 자극하여 찾아내주는 것이 교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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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4막
국정연 선배, 김달성 선생님을 만나다
 
장광팔 그런데 어떻게 예고에 입학할 생각을 하셨어요?

이건용 서울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로 진학하게 된 것은 온전히 국정연 선배 덕이었어요. 악기를 만져볼 욕심에 밴드부에 들어가 오보에를 불었어요. 밴드부 연주곡이 거의 행진곡이었지만, 이따금 ‘비엔나 숲 속의 이야기’ ‘인도의 공주’ 등 서곡도 부를 기회가 있어 좋았어요. 그런데 당시 오보에 사수가 3년 위 국 선배였어요. 그는 다짜고짜 “너 작곡하고 싶지? 그럼 예고에 가라. 거기에 가야 레슨을 받을 수 있어. 나는 늦었지만, 너는 예고에 가서 꼭 작곡 공부를 하라”고 얘기해준 거예요.

장광팔 족집게처럼 가려운 곳을 집어내어 효자손처럼 긁어준 은인이군요.(웃음)

이건용 후에 그 선배는 나사(NASA)에서 근무했지만 자신은 연주가의 길을 가지 못하고 저를 대신 가도록 한 것이지요. 예고에 들어가 오페라 ‘자명고’, 가곡 ‘편편화심’ ‘국화 옆에서’ 등 수백 편을 작곡한 김달성 선생님(작고)을 만나 원 없이 작곡 공부를 했어요.
 

운명 5막
목마른 예술적 자양분을 부어준 오태석 선생을 만나다
 
장광팔 때마다 운명을 순방향으로 건드려준 은인을 만나셨는데, 다음은 또 누구를 만나셨을까 궁금해지네요.

이건용 (최근 성폭력 의혹에 휩싸인) 오태석 선생입니다. 이 내용은 알아서 쓰세요. 저는 제게 예술적 자양분을 섭취하게 해준 고마운 분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니까요.

장광팔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으셨다고요?

이건용 요즘 아이들은 중 2때 사춘기가 온다는데, 저는 대학생 때 왔으니 많이 늦은 거지요?(웃음) 서울대 음악과에 입학했는데 실기와 이론 모두 예고 때 배운 내용이라 흥미가 없더라고요. 사춘기가 온 거죠. 그래서 싱숭생숭 건들건들하던 친구 몇이 모여 “우리 연극 한번 해보자” 하고 음대에 연극반을 만든 거예요. 그때 같이 싱숭생숭 건들건들하던(웃음) 친구 중 하나가 문호근(1946~2001)이라고 우리나라 오페라 연출의 1세대라고 할 친구인데 문익환 목사님의 장남이자 연기인 문성근 씨 형님이에요.

장광팔 멤버를 제대로 만나셨네요. 그래도 일을 저지르려면 또 누구를 운명적으로 만나야 하는데 그게 오태석 선생이었군요.

이건용 맞아요. 마침 대학본부 연극반에서 단과대학 연극 페스티벌을 한다기에 찾아갔다가 작품도 없고 연출도 없다니까 연대 철학과를 나와 출판사에 근무하던 오태석 선생을 소개해준 거예요. 그에게서 <나는 방관자가 아니다>라는 작품을 받아 그의 지도로 제가 주역을 맡았지요. 선생은 <웨딩드레스> <손>이라는 작품으로 신춘문예에도 당선했는데, 그때 글씨를 곧잘 쓰던 제가 200자 원고지에 정리를 해드렸어요. 그런데 ‘나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선생께 말씀드리니, “한번 써봐” 하시는 거예요. 그날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탈고해 드리고는 뭔 소리가 나올까 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데, 말없이 읽으시며 실실 웃기만 하더니, “신춘문예에 한번 내봐” 하시는 거예요.

장광팔 정말 시니컬한 멘토였군요.

이건용 알아보니 신문사마다 신춘문예는 마감되었고 경향신문만 며칠 남았기에 제출했는데, 얼마 후 검은 신문사 지프차가 주소를 보고 집으로 찾아왔더라고요. 그 길로 그 차를 타고 신문사로 가서 당선 소감 인터뷰를 했어요. 1967년 경향신문에 <석기시대>로 등단한 거지요.

장광팔 그때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어요?

이건용 음악으로 나를 표현하지 못해 무척 침울하던 시절이에요. 자아를 찾아 나를 표현해야 하겠는데, 염리동 달동네에서의 나의 삶과 음악은 무관하더라고요. 그때 소설이 나를 구제해준 거지요. 음악에서 섭취하지 못해 목말랐던 예술적 자양분을 그분을 통해 섭취하게 되어 그지없이 고마웠어요.
 

운명 6막
아내 이진숙과 독일 치머만 교수를 만나다
 
장광팔 <장만세 인터뷰>에 사랑 이야기가 빠지면 안 되지요.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 작업을 하셨어요?

이건용 작업요?(웃음) 연극을 하다 군대에 다녀와서 다시 연극을 하면서 소설도 쓰고 평론도 썼는데, 그때 문화계의 중심적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이 공간사회에서 펴내던 <空間>이에요. 그때 ‘젊은 시각으로 본 비평문’ 원고 청탁을 공간으로부터 받았지요. 당시에는 팩스도 없어서 200자 원고지에 원고를 써서 직접 전달하던 시기였는데 원고를 받아서 편집을 하고 나중에 누런 봉투에 세금 공제 후 고료까지 전해준 분이 이진숙 씨였어요.

장광팔 원고 청탁에서 고료 지급까지 논스톱 서비스를 해주신 이진숙 님과 연을 맺게 되셨나 보죠?(웃음)

이건용 결론적으로 그런 셈이죠.(웃음) 그때 건축가 친구들이 건축설계 사무실을 차려 자주 그곳에 모였는데, 제가 여기서 음악회를 열자고 했지요. 그래서 1인당 5만원씩 10명이 10개월간 곗돈을 부어서 피아노를 장만했지요. 음악회를 마치면 2부 순서로 소맥을 한잔했는데, 예술하는 친구들이 많이 드나들었어요. 공간사 여직원 몇 분도 멤버였어요. 거기서 작업이 이루어졌지요.(웃음) 그때 1차로 맺어진 커플이 나중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같이 만들고 한예종 미술원장을 역임한 친구 민현식이고, 2차로 맺어진 커플이 저와 이진숙 씨예요.

장광팔 건축설계사무소가 아니고 결혼상담 사무소였네요.(웃음) 독일 유학은 언제 가셨나요?

이건용 결혼 직후인 1976년이에요. 군대에 다녀와서 다시 연극을 하고 글을 쓰며, 4년간 음악과 담을 쌓고 지내다가 다시 자아를 찾아 음악을 하러 독일로 유학을 떠난 거예요. 세계교회협의회(W.C.C) 교환학생 프로그램 장학금을 받아 갔어요.

장광팔 그곳에서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던가요?

이건용 치머만 교수님을 은사로 모셨어요. 그분은 독일을 대표하는 교회음악의 대가예요. 교회음악은 음악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저에게는 음악은 물론 예술을 깊이 있게 연구하여 예술을 통해 자아를 발견한 소중한 기회였어요. 이로 인해 교회음악과 연관된 일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특히 7년마다 열리는 W.C.C 10차 총회가 부산에서 열렸는데 제가 현지 음악감독을 맡았어요, 37년 만에 W.C.C 장학금 혜택 빚을 갚을 기회가 온 거죠.(웃음)

장광팔 윤이상 선생님과도 교류가 있었나요?

이건용 저는 물론 윤이상 선생님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고, 영향을 받은 바도 있습니다. 또 독일 분들에게 윤이상을 아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았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베를린에서 활동하셨고, 저는 프랑크푸르트에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 교류는 없었어요.

장광팔 독일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이건용 독일에 가기 전에 목사인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사춘기가 또 찾아와(웃음) 교회에 정을 붙일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독일에 와서 프랑크푸르트에 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상사 주재원들이 다니는 한인교회를 독일 정부가 만들어주어 그 교회를 중심으로 재미있는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어요. 거기서 미학을 전공한 김문환(작고) 선생 등과 활동하며 다시 교회에 재미를 붙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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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7막
이강숙 선생님과 한예종을 만나다
 
장광팔 귀국해서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어떻게 한예종 설립에 주역을 맡게 되셨어요?

이건용 그러게요.(웃음) 귀국해서 형님이 사제로 있는 성공회에 다니면서.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서울대에 재직하시던 이강숙 선생님께서 한예종 설립을 주도하다가 한예종 교장(총장)으로 가신 거예요. 그때 선생님께 설득당해 코가 꿰여(웃음) 교학처장을 맡아 매년 음악원, 연극원, 영상원 등 순차적으로 6개 원(院)을 만들어 원장을 초빙하고, 교수진을 구성하여 커리큘럼을 짜는 등 그야말로 일에 파묻혀 살았어요.

장광팔 한예종 실세였네요.(웃음)

이건용 (웃음) 실세는 실세인데, 실속 없는 실세였지요. 그렇지만 해피(happy)하게 일했어요.

장광팔 그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을 법한데요?

이건용 영상원을 설립할 때였는데, 영상기자재 구입 건으로 난상토론이 벌어졌어요. “이제는 디지털 시대이니 디지털로 가자, 아니다 그래도 예술은 아날로그다.” 때마침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영상기자재 페어’가 열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수진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니 이견 없이 디지털로 답이 나왔어요. 그때 아날로그로 갔으면 큰일 날 뻔한 거죠.(웃음)

장광팔 미술원 시험 때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었지요?

이건용 교수님들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미술원 시험에 아직도 석고 데생을 보느냐며 성토(?) 끝에 역동성 있는 말(馬)을 그리게 하자는 결론을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입시 때가 엄동설한이니 어느 마장(馬場)으로 입시생들을 데리고 가서 말을 그리게 하겠어요?(웃음)

장광팔 그래서 실내에서 그릴 수 있는 동물로 대체했다지요? 어떤 동물이었나요?

이건용 염소요.(큰 웃음)

장광팔 말에서 염소라, 용두사미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네요.(웃음)

이건용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이놈들이 어찌나 염소 똥을 싸대던지.(웃음)

김 치우느라 욕 좀 보셨겠어요.(큰 웃음) 한예종은 몇 년부터 졸업생을 배출했나요?

이건용 1993년에 입학했으니까 1997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네요.

장광팔 4대 총장을 역임하셨지요?

이건용 예. 1992년 교학처장을 시작으로 2001년 3대 음악원장으로 있다가 2002년부터 2006년까지 4대 총장으로 재직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제5대 서울시 오페라단 단장을 지내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한예종 음악원에서 ‘16세기 대위법’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장광팔 총장님의 여러 번의 사춘기(웃음)가 오페라단을 운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겠네요.

이건용 그렇습니다. 자아를 찾는 늦은 사춘기 때 저를 구제해주었던 작곡, 연극, 소설 등이 대본을 쓰고 무대를 꾸미는 힘을 만들어준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운명 8막
델픽을 만나다 ‘우리나라를 예술의 중심국으로’
 
장광팔 2009년도 제3회 세계 델픽대회가 제주에서 열렸을 때 위원장을 맡으셨지요?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과 달리 문화제전인 델픽에 대해서는 생소한데요?

이건용 그렇습니다. 제우스신에게 바치는 스포츠 제전이 올림픽 대회인 데 비하여 델픽대회는 6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제우스의 아들로 음악·무용과 시의 신(神)인 아폴로에게 받쳤던 문화제전이에요. 서기 394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도 활동이라고 금지할 때까지 1000년간 지속되었지요. 1997년 고대 델픽의 부활을 목표로 국제 델픽조직위원회(IDC)가 발족되어 1회는 200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2회는 2005년 말레시아 쿠칭에서 그리고 3회가 우리나라 제주에서 2009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열렸지요. 올림픽이 성화를 봉송하는 데 비해 델픽은 그리스 델피 아폴로 신전에서 성수(聖水)를 제주 물허벅에 담아 봉송했어요. 46개국 450여 명의 경연 참가자와 50여 개국 1500여 명의 문화예술인이 참가하여 음악·공연·언어·예술·공예 등 6개 분야 18개 종목에서 경연을 벌였는데, 후에 모범적 대회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장광팔 최근 한국델픽위원회를 재결성하셨다면서요?

이건용 우리나라가 이제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세계 주도권을 잡을 때가 되었다는 신념에서입니다. 문화예술의 중심은 한때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를 거쳐 독일, 지금은 미국으로 축이 옮겨졌는데, 문화의 변방이었던 우리나라도 이제 중심이 되어야겠다는 비전에서입니다. 우리나라 문화를 저는 삼겹살, 오겹살에 비유합니다. 한 겹으로 특징지을 수 없는 살과 마블링이 중첩되어 곱씹을수록 맛있는 문화가 바로 우리 문화이고, 이 맛이 한류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장광팔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세계 예술의 중심국가로 부상할 수 있을까요?

이건용 세계 여러 나라에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기여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말, 우리글이 세계 공용어 중 하나로 사용될 때가 반드시 옵니다. 델픽은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장(場)입니다. 국제델픽위원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고, 이번에 한국델픽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된 최상균 위원장과 임원 여러분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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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명예교수는…
 
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대 작곡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프랑크푸르트 음대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 대구 효성여대와 서울대에서 가르쳤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작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ARKO한국창작음악제(이하 아창제) 추진위원회 위원장
2012년 7월~ 2017년 1월 제5대 서울시오페라단 단장
2012년 7월 세종문화회관 서양음악단 예술총감독
2002년 3월~ 2006년3월 제4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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