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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엘 아빠 이기진의 자녀교육 딴짓하며 키워보세요

2018-07-13 10:10

취재 : 박지현 기자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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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딴짓을 많이 해서 ‘딴짓 고수’로 불린다. 본업은 물리학자다.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논문도 게재했다. 부업(?)은 수집광이자 작가이자 화가인데, 이런 식이다. 연구하다가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으면, 종이에다 그림을 끼적인다. 그렇게 남긴 습작으로 동화책을 낸다. 딴짓에서 얻은 성취감은 본업을 하는 데 동력이 된다. 선순환이다.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그의 딴짓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다. 다음 세대인 딸에게도 이어진다.
한번 상상해보자. 시끌벅적한 호프집. 옆엔 직장 상사가 앉아 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상사.

“내가 말야! 30대 때 아르메니아로 무작정 떠났어. 아르메니아가 어딘지 알지? 다들? 어허, 가보니까 이걸 어쩌나. 내전 상태인 거야. 근데 내가 누구야, 육군30사단 의무병 출신 아니냐. 참전을 했지. 그때 아르메니아 군인들이랑 말 몇 마디 나누고 친해진 거야! 심지어 태권도를 가르쳤다는 거 아냐. 허허허.”

어디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상사는 또 입을 뗀다.

“한번은 말야. 파리에 가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더라고. 두 살배기 애를 둘러업고 애 엄마랑 파리 옥탑방에서 살기도 했어. 캬, 좋은 추억이었지. 그때 알게 된 지인 덕분에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회도 열었지. 프랑스 유명 배우가 내 작품을 보고 반해서… (중략) 그다음엔 일본으로 넘어갔는데… (하략).”

월남 스키부대 출신이라는 어르신을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싶겠지만 이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다. 가수 씨엘 아버지인 물리학자 이기진 교수의 ‘실화’다.
 
 
물리학자가 된 계기

지난 6월 8일 롯데갤러리 잠실점에선 <과학자의 만물상>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기진 교수는 이 전시에서 그림과 로봇 조형물, 수집품 등 수백여 점을 선보였다. ‘딴짓 물리학자의 자녀교육 연구실’이라는 주제의 강연도 열었다. 자신의 성장 과정과 양육 철학을 편하게 털어놓는 자리였다. 10명 안팎 소수 정예만 모아놓고 그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곧 이순(耳順)인 그는 청바지에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이 교수 인생은 요컨대 ‘딴짓’으로 점철됐다. 이름 앞에 붙은 수많은 타이틀은 다 딴짓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말로 ‘만능 재주꾼’인 셈인데 시작은 아픈 기억에서다. 초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선생님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더라고요. 버벅거린 거예요.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선생님이 다가와서 뭐라고 했는데, 그다음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충격이 컸어요. 그때부터 남 앞에서 책을 못 읽게 됐어요. 그래서 어떡했냐고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죠.”

어머니는 그를 혼내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좀 쉬었다가 내년에 다시 가면 된다”고 했다.

그는 진짜로 쉬었고, 이듬해 다시 학교에 갔다. 다른 학교로 전학했는데, 거기서 그의 ‘딴짓’ 역사가 시작된다. 친구들이랑 재미 삼아 야구를 했는데 너무 재밌더란다. 교내 야구팀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제가 야구부를 만들었어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에 붙어 있는 중학교에 다니는 형을 코치로 초빙했고, 저는 포수를 봤어요. 팀의 리더이자 중심은 역시 포수잖아요?”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참 여러 가지에 미쳐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물리를 잘해 선생님에게 인정도 받았지만 그의 관심사는 교과서 밖에 있었다. 밤새워 음악을 듣는가 하면, 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그림을 그려댔다. 미대 진학을 심각히 고려했지만, 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신입생 때도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다. 도서관에서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서적을 섭렵하고, 미술 동아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좋았다. 그때 날아든 건 F학점 성적표 그리고 군대 영장.

“제대하고 복학한 후에야 ‘이제 공부 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상 물리학 공부를 제대로 해보니 이게 또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때부터 물리학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건 한다

그렇게 한 우물만 팠느냐고? 그렇다면 얘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딴짓은 이제부터다. 박사 과정을 밟던 1990년, 돌연 그는 아르메니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지금이야 사람들이 많이 알지만 그때는 대개 “거기가 어딘데?”라고 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국가였다. 목적은 연구였지만 가지 않는다고 해도 ‘큰일’이 날 건 없었다. 게다가 아내 뱃속엔 맏딸 채린(가수 씨엘)이 있었다. 주변에서는 만류했다. 공산국가인 데다 아제르바이잔과 분쟁 중이었기 때문. 전화 통화조차 어려울지도 모르는 곳이었지만, 어머니만은 “가고 싶으면 가야지”라며 비용을 대줬다.

“당시 아르메니아로 가기 위해서는 모스크바에서 열차를 타야 했습니다.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고, 도착할 때까지 1주일이 걸렸어요. 극한 상황에서 아르메니아 국경에 들어선 순간, 아! 뭐든지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현지 군인들과 친분을 쌓고 태권도를 가르친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는 “같이 있는 연구소 사람들이 전장에 나가는데 혼자 있을 수 없어 따라 나가 참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돌아온 후에도 그는 아르메니아와 끈끈한 인연을 이어갔다. 현재도 아르메니아 유학생을 자신의 연구에 참여시키고 있으며,  2015년에는 동양인 최초로 아르메니아 과학아카데미 정식회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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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의 추억이 동화책으로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갔다. 그때 채린의 나이 두 살 때였다. 그는 “파리에서 한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갔다”고 했다. 부랴부랴 전셋집을 빼고 보증금 3000만원을 들고 세 식구가 비행기를 탔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파리의 다락방에 살았다.

“세 식구가 한꺼번에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방이었어요. 박사후과정이라 월급도 적고 앞날을 알 수 없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죠. 그런데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정말 좋았어요. 그립고, 우리 가족에게 다시없을 추억이죠.”

그다음엔 일본으로 갔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일본 쓰쿠바 대학과 도쿄공업대학에서 각각 연구원과 교수로 생활했다. 한국에 돌아온 건 7년 후, 서강대 교수로 임용되면서다.

“일본에 있을 때만 해도 큰딸 채린이와 둘째 하린이가 어릴 때였죠. 아이들은 자기 전에 이야기를 해줘야 잠을 잤어요. 이부자리 속에서 눈 감고 얘기를 듣고 있다가 다 듣고 나면 또 해달라고 조르기 일쑤였죠. 그러면 저는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풀어내야만 했어요. 그런데 재밌는 걸 발견했어요. 스토리가 허무맹랑할수록 아이들이 좋아하는 겁니다. 까르르 넘어가는 거예요. “이때 깍까가… 하늘을 향해 힘껏 박치기를… 쓩~” 뭐, 이런 내용이었어요.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말로 했던 이야기들을 그림과 글로 풀어내보자.”

그렇게 나온 게 동화책 <박치기 깍까>다. 그는 “지금 생각하면 이야기가 진정 동화가 아닐까 한다”고 했다. 그동안 물리학 서적과 에세이 등 15권 이상 책을 냈지만, 첫 동화책인 만큼 남다르게 다가온다.

“<박치기 깍까>는 프랑스어와 일본어, 영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 출간됐어요. 덕분에 잡지사·출판사의 집필 의뢰가 이어지면서 만화와 그림을 그리고 계속 책을 낼 수 있었죠. 따져보니 1년에 한 권씩 책을 낸 셈이네요.”
 
 
아직도 딸들과 친구처럼

여기저기 뿌려놓은 ‘딴짓’은 때론 아주 빨리 혹은 찬찬히 수확물이 됐다. 무작정 떠나 살았던 파리에서 만난 인연이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하기도 했다.

“<빠나나 박사와 깡통로봇>이라는 만화 칼럼을 연재했을 때 그 깡통 캐릭터를 양철로 만들어보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완성한 로봇 사진을 파리의 지인이 파리의 아트페어 회장에게 보여줬더니 ‘이런 작가를 찾고 있었다’고 했답니다. 아트페어에 참가했죠. 한 남자가 로봇 앞을 서성이더니 ”이 로봇을 사고 싶다”는 거예요. 그게 되게 크거든요. 180㎝짜리 작품이에요. 그 사람이 알고 보니 유명한 프랑스 배우 에릭 주도르였습니다. 그 배우 덕분에 제 로봇이 유명해졌죠.”

그의 딴짓은 딸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줬다.

“채린이가 (한국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재즈댄스를 배웠는데, 학원에서 유명 외국 댄서들을 초대해 춤을 가르치곤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도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하니까 채린이한테 통역을 부탁한 거죠. 그렇게 해외 유명 댄서와 직접 대화할 수 있었죠. 그러다 보니 더 가까이서 춤을 배울 수 있었고요.”

이 교수는 두 딸과 친구처럼 지낸다.

“2012년, 씨엘로 가수에 데뷔한 후 힘든 시기를 보내던 채린이가 ‘아빠, 파리로 여행 가자’고 했어요. 그때 다시 한 달 동안 딸과 함께 파리에서 생활했죠. 그 시간은 그림에세이 <꼴라쥬 파리>로 남았고요.”
그는 “그림을 그리고 책을 내게 된 건 딸들 덕분”이라면서 슬쩍 딸들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보여줬다. “내 아빠라서 고마워”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는 “남들은 무모하다고 할지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일단 저질렀고, 열심히 뒤처리해온 것이 이렇듯 결과물이 됐다”고 했다.

“두 딸에게 지금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해보라고 하죠. 주변에서 무모하다고 할지라도요. 그게 결국 삶이 되니까요. 울타리 밖? 조금 넘어가면 어때요. 저 또한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학교에 가야 한다고 야단쳤다면 삐뚤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요. 관심을 갖고 지켜보되 강요하지 말자고요. 함께 있는 동안 재밌는 추억 많이 쌓으시고요. 나중에는 돈을 주고도 갖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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