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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팔 만담가의 세상토크]한국야쿠르트 김혁수 상임고문·김기옥 여사 ‘리얼’ 부부 스토리

“부부가 일상을 함께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2017-12-28 11:00

글 : 장광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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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와 미소가 잘 어우러진 사내는 신이 나서 회갑 기념으로 아들 김세하(25) 군과 단둘이 남미여행을 다녀왔다며 자랑을 했다. 1985년 평사원으로 한국야쿠르트에 입사한 그는 광고팀장, 홍보이사, 경영지원실장, 사업총괄부사장,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지금은 경영 일선에서 한발 비켜서 상임고문직을 맡고 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가 재수할 때 다녔다는 양영학원과 무과수제과 자리에 들어선 서울 무교동 르메이에르 빌딩 사무실에서 한국야쿠르트 김혁수(60) 상임고문과 부인 김기옥(56) 여사를 만나 유쾌한 수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반백의 쾌남 김 고문을 ‘김’, 젓가락 한 짝처럼 늘 곁에 있는 부인 김기옥 여사를 ‘옥’, 인터뷰를 진행한 필자(장광팔 만담보존회장)는 ‘장’으로 표기한다.
집안 소개 좀 해주시죠.

아버님은 평안도 출신으로 직장에 다니셨어요. 그분 덕분에 영등포, 불광동, 상도동 등 당시 서울의 변두리는 다 살아봤어요. 약주를 무척 즐기셨는데, 그것도 4홉들이 소주만 드셨어요. 말년에는 당뇨와 신부전증으로 고생하셨는데, 진짜 고생은 그런 시부모를 모시는 집사람이 했지요. 아마 엄청 마음고생이 컸을 거예요. (이 대목에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눈가에 묻어났다.)

장남이신가요?

제가 본래는 넷째인데, 큰형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셋째로 승격(?)하면서 부모님께서 제 집사람이 (부모) 모시는 걸 편하게 생각하시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요.

그러게 처음에 윗사람에게 잘 보이면 평생 고생하는 거예요. 

아버님께서 신부전증으로 8년간 일주일에 세 번씩 인공투석을 하셨어요. 일산에 살 때인데, 남편이 출근하면서 병원에 모셔다드리면 제가 투석하실 동안 간호를 하다가 집으로 모셔오고 그랬지요.

제 직장이 남대문 상공회의소 안에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일산은 시골이었거든요. 비가 오면 땅이 질퍽거려 고무장화를 신고 경의선 타고 출근해서 깨끗이 닦아놓은 복도를 진흙 발자국으로 찍어놓았으니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눈총깨나 받았지요.

그런데 이 천사 같고 예쁜 분을 어떻게 만나서 그렇게 고생을 시키셨어요?

제 친구가 집사람 이종사촌 오빠예요. 그 친구 소개로 만났는데, 그때는 정말 예뻤어요. 이런저런 일로 못 만났는데, 몇 년 후 친구가 다시 데리고 나왔더라고요.

전형적인 옛날 영화 스토리네요. 자녀들은요?

큰딸 가윤이, 아들 세하 이렇게 둘을 두었어요.

이상적으로 두셨네요. 저는 딸 하나, 계집애 하나, 여자 하나. 이렇게 골고루 두었습니다.(웃음) 결혼은 시키셨나요?

둘 다 아직 학생이에요. 큰딸은 연대 로스쿨에 다니고, 아들은 연대 보건대학 물리치료과에 다니다가 플로리다 주립대 교환학생으로 있어요.

고문님 고등학교 때에는 우열반 중 우등반에 있었죠?

당연히 ‘돌반’(열반)이었지요. 그때는 노는 게 왜 그렇게 좋던지 원 없이 놀았어요. 그렇지만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 재수, 삼수를 했어요. 바로 이 빌딩 자리에 있던 양영학원 다닐 때 무과수제과에서 여학생을 만나 빵도 사먹고 했는데, (부인을 보며) 물론 지금 이 여학생은 아니에요. 잡기에 능했는데 다행인 것은 놀면서도 소설을 좋아해서 그때 정말 책을 많이 읽었어요. 또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오래 듣다 보니 이제는 클래식 마니아가 되었어요. 그게 보이지 않는 지식으로 쌓인 것 같아요. 가끔 친한 기자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아는 게 많다’고 그럽니다.
 

“학창시절, ‘진짜’ 치열하게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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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을 가졌을 때는 직장도 안 다니고 시골 같은 일산에서 목가적인 생활을 하며
음악도 많이 듣고, 뱃속 아이와 대화도 많이 나누었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제가
생각한 이상대로 태어나 힘들이지 않고 자라더라고요.
 

당시에는 전차를 타고 통학하셨죠?

네, 저는 전차 세대예요. 전차가 느려서 막 출발해도 뛰어가서 올라타곤 했지요. 낚시광이던 선친께서 조그만 물고기를 잡아오셔서 “전차표만한 것밖에 못 잡았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네요.(웃음)

저는 전차는 몰라요.

젊다는 거 표시 내려고 그러시는 거죠?(웃음) 학창시절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직장에 다니다가 다시 학업을 계속하곤 하느라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이스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보호 방어기제가 발동한 김 고문이 나섰다. 역시 고수다.)

예일여고에 들어갈 정도였으니 수재였지요.(웃음)

아이들은 어떻게 키우셨어요?

신혼 초에는 맞벌이하면서, 그 후에는 시부모 모시면서 에너지를 다 쏟다 보니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어요. 덕분에 거저 키운 것 같아요. 젊은 엄마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태교가 매우 중요하다는 거예요. 큰딸을 가졌을 때는 직장도 안 다니고 시골 같은 일산에서 목가적인 생활을 하며 음악도 많이 듣고, 뱃속 아이와 대화도 많이 나누었어요. 그랬더니 아이가 제가 생각한 이상대로 태어나 힘들이지 않고 자라더라고요. 성격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음감도 뛰어나 피아노도 잘 쳐요. 그냥 자연스럽게 키웠어요. 그런데 아들을 가졌을 때는 복잡한 환경의 상도동에서 살면서 제대로 태교를 못 했어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흐른다고 생각했는지, 김 고문이 또 나선다.)

그래서 아들이 뭐 잘못됐다는 거예요?(웃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죠. 우리 아이들을 예로 들어보면 그렇다는 거예요.

그 애가 성격이 자유분방해서 사춘기에는 혼을 많이 냈지요. 누나한테 내 욕도 많이 하며 파쇼(Fascio)라고 불렀대요. (이번에는 김 여사가 끼어들었다.)

당신이 가끔 심하게 혼을 내서 아이가 당시에는 움츠려 있어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다행히 나이가 들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좋아지더라고요.

그 애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3년 내내 여학생을 사귀었대요. 동네 사람들은 다 아는데, 우리 식구만 몰랐어요.

아버님 닮아서 그런 거죠.(웃음) 요즘은 건배사 ‘당나귀’가 ‘당신과 나의 귀중한 만남을 위하여’가 아니라 ‘당신과 나의 만남을 귀신도 모르게’로 바뀌었대요.(웃음) 당시 회자되던 유행어가 ‘개구쟁이라도 좋다. 씩씩하게만 자라다오’였는데, 자식한테는 이게 말처럼 잘 안 되지요?(웃음)

그럼요. 아들 사춘기에는 사실 제가 엄하게 다뤘어요. 그래서 아들이 저를 무서워하고 솔직히 부자지간에 서먹한 관계였어요. 그런데 (대표직을 물러난 후) 얼마 전 아들과 둘이 23일간 남미여행을 다녀오면서 ‘찐한’ 부자지간의 정을 서로 확인했습니다. 우리 일생일대의 행운의 여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한테도 같이 가자고 했는데, 제가 사양했어요. 둘만 다녀오라고.

립서비스한 것 몰라요?(웃음)

딸아이가 꼬깃꼬깃 모아둔 300만원에 제가 조금 보태서 남편 여행비를 마련했고, 아들 여행비는 아버지가 대서 떠난 여행이에요.

아들은 미국에서, 저는 인천공항에서 출발하여 페루 리마에서 만났는데,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오히려 열악한 여행환경이 두 남자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더라고요. 5분만 더운물이 나오니까 두 사내가 벌거벗고 비누칠을 해주면서 ‘빨리빨리’를 외치며 목욕을 후다닥 해치우고는 서로 마주보며 웃기만 하기도 했어요. 한번은 한 방향으로 산을 오르는데 너무 힘들어 만날 곳을 정해놓고 아들은 정상에 오르고, 저는 뒤처진 채 호기심이 발동하여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커피숍에서 쉬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상에 오른 아들이 저와 만나기로 한 곳에 와보니 제가 안 보였던 거예요. ‘아버지가 스페인어를 할 줄 아나, 그렇다고 영어가 능한가, 걱정이 말이 아니었겠죠. 제가 길을 잃은 걸로 생각하고 거의 울상이 되어 찾아 헤매다가 카페에서 태평스레 차를 마시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마치 아이를 잃었다 찾은 엄마가 화를 내듯 저를 다그치더라고요. 그때 ‘아 이놈이 이제는 애비 걱정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고요.
 

아들이 내 이불 속으로 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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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수 한국야쿠르트 상임고문은…
1985년 한국야쿠르트 입사, 광고팀장 홍보담당이사, 경영지원실장, 사업총괄부사장을 거쳐 2013년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2015년 그는 상임고문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여행을 다녀온 후 아들이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7분짜리 영상으로
편집해 보내왔는데, “힘들고 바쁘게 살아오신 아버지!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이제는 너무 바쁘게 살지 마세요”라는 멘트에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23일간의 불편한(?) 부자간의 동거가 끝나는 리우에서의 마지막 밤,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고 한다. 잠을 설치고 있는데, 싱글베드에 따로 누워 있던 아들이 갑자기 김 고문 이불 속으로 쳐들어와 안기더란다. “왜 이래 이놈아, 저리 가!” 소리쳤지만, ‘아 이건 내 일생일대에 가장 멋진 여행이다’라는 생각에 겉으로는 둘이 낄낄대면서도 마음 한켠이 찡해지더란다.  
 

이번 여행은 저에게 정말 행운이었죠.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여행을 다녀온 후 아들이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7분짜리 영상으로 편집해 보내왔는데, “힘들고 바쁘게 살아오신 아버지!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이제는 너무 바쁘게 살지 마세요”라는 멘트에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이제 아드님 자랑 그만하시고 따님이 피아노를 잘 친다고 하셨는데, 아드님도 다루는 악기가 있나요?

네. 아들은 애 아빠가 클라리넷을 강제로 시켰는데, 요즘 아들이 강제로라도 악기를 배운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더라고요.

고문님은 클래식 마니아인데,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나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집에 풍금은 있었는데 형편상 못 했어요. 이제 기회를 만들어 클라리넷이나 오보에를 배우고 싶어요.

저는 악기에 소질이 없어요. 동호회에서 우쿨렐레를 배운 적은 있지요. 그렇지만 남편 덕분에 클래식으로 아침을 맞다 보니 음악이 습관처럼 길들어 친숙해졌어요.
(이때 또 김 고문이 거들었다.)

집사람은 그림을 잘 그려요. (부인의 만류에도 김 고문이 내미는 액자 속 그림은 남편과 아들의 초상화였다.)
 

뚝심으로 밀어붙인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비빔면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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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님을 딱 닮았네요. 그런데 어째 초상화가 가수 설운도 씨도 닮은 것 같아요.(웃음)

아이들에게는 꼭 악기를 하나 가르치거나 그림을 가르치라고 권하고 싶어요. 악기나 그림에 소질이 있든 없든 인격을 형성하는 데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물을 보는 눈의 폭이 넓어져요. 최소한 초등학교 때만이라도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부모가 취업만 생각해서 전공을 강요하지 말고, 본인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끔 맡겨두었으면 좋겠어요. 제 아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스스로 판단해서 과를 선택하니까 더 즐겁게 공부하고, 또 그 과정이 힘들어도 후회하지 않더라고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분의 따뜻한 성품과 유머러스한 말솜씨가 독서는 물론, 음악을 즐기는 여유 있는 습관에서 기인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야쿠르트 광고를 보면 배우 오달수 씨가 나오는 ‘팔도왕뚜껑 라면’ 등 유독 유머러스한 히트 작품이 많더군요.

지금은 걸 그룹 ‘아이오아이’가 모델이지만, 황보라 씨와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달수 씨를 과감히 픽업해서 공전의 히트를 친 작품이다 보니 광고상을 휩쓸었어요. ‘팔도왕뚜껑’을 사서 들고 가던 오달수 씨가 왕뚜껑을 길에 떨어뜨리고 가자 황보라 씨가 왕뚜껑 위에 주저앉아 감추고 있는데, 자동차가 다가와서 클랙슨을 누르니까 오달수 씨가 황보라 씨를 잡아당기는 코믹한 설정의 광고였지요. 이후에 오달수 씨는 개성적인 인상과 연기 덕에 스타로 부상했더군요.

한국야쿠르트 제품 중 ‘윌’ 광고 때도 유사한 일이 있었지요?

맞아요. 헬리코박터균을 배양해 직접 마셔 위염을 치료한 베리마셜 박사를 돈 많이 안 들이고 모델로 픽업했는데, 후에  이분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바람에 몸값이 엄청 뛰었어요. 물론 그땐 이미 저렴한 모델비로 계약기간이 남아있었지만 더 예우를 해드렸지요. 주위에서 공짜 좋아하는데 머리가 많이 빠지지 않은 게 이상하대요.(웃음)

머리가 빠지면 죽게요? 머리카락이 빠지는 거죠. 남자가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이 빠지는 이유는 집사람한테서 ‘헤어나지’를 못해서 헤어가 안 나는 거예요.(웃음) 고문님은 광고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계신가요?

광고는 제품의 특성이나 우수성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업 쪽에서는 왜 제품과 동떨어진 콘셉트의 광고를 하느냐고 난리죠. 아무리 기발한 광고 카피나 CM송, CF도 책임자의 결단과 뚝심이 없으면 채택되지 못하고 사장되기 일쑤이지요. 이렇게 탄생한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두 손으로 비벼비벼 팔도비빔면” 광고도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었지요.
 

“이젠 문화예술로 인생 이모작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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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고문의 아내가 그린 남편과 아들

‘팔도도시락’ 라면으로 러시아를 정복하셨다지요?

러시아를 서진(西進)하여 키오스크(노점상)에 도시락 라면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지요. 러시아 1등 브랜드입니다. 모스크바에만 공장을 두 개나 설립했으니까요. 1990년대 말 제가 과장 시절입니다. 겁도 없이 가방에 미국달러 화폐를 잔뜩 담아 들고 시베리아로 날아가 현지 방송 프로덕션과 CF를 찍었습니다. 아마 마피아가 알았다면 시베리아 어딘가에 묻혔을 겁니다.

사모님은 김 고문이 CEO가 되리라고 예견하셨나요?

저희는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 가정이었어요. 남편이 워낙 성실하고 일을 열심히 해서 한 번도 승진에 누락된 적은 없지만, 이사까지만 가도 잘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아버님께서 작고하신 후 정말 모든 일이 잘 풀리더라고요. CEO까지 올라간 건 시부모님의 음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다시 끼어드는 김 고문)

저 사람이 가톨릭 신자인데… 그런 걸 믿어요?(웃음)

가톨릭에서도 퇴마사가 있잖아요.(웃음) 시부모님을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셨으니 종교를 떠나 분명 어르신들의 감응이 있었겠지요.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는 집사람의 내조가 컸습니다. 예전에는 새벽에 술 취한 직원들이 쳐들어오곤 했는데, 매번 싫은 내색 없이 바로 술상을 차려오는 바람에 저도 놀랐어요. 아침에는 해장국까지 끓여주니 제 평판이 좋을 수밖에 없었지요.(웃음)

사모님! 가끔 어깻죽지가 가렵지 않으세요? 천사가 날개가 돋으려는 거니까 긁지 마세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바쁘던 남편께서 시간 여유가 생기니 기분이 어떠세요?

지금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무엇보다 남편과 일상을 함께할 수 있어 너무 좋아요.

부부싸움은 안 하세요?

부부싸움 할 틈이 없어서 못 했어요.(웃음) 어쩌다 다툼이 생겨도 얼른 제가 꼬리를 내려서 냉전기간이 하루도 못 가고 풀려요.

항상 내가 꼬리를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웃음)

김형석 교수(97)께서 강연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1920년 동갑내기인 안병욱(작고), 김태길(작고) 교수님과 이렇게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언제 가장 행복했는가?’ ‘언제 나이로 돌아가고 싶은가?’ 회고해보니 ‘60세부터 75세까지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했복했던 시기’라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지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미혹하지 않을 나이가 60세부터 75세까지라는 것이 우리나라 최고 지성들의 공통된 견해인데, 이제 60세가 된 고문님의 인생 이모작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사실 60세가 되기 전까지는 열정적으로 일을 해도 가정과 식구를 위한 호구지책 측면이 클 수밖에 없었지요. 이제 가족 부양에서 어느 정도 자유스러워졌으니 그동안 제가 해보고 싶던 일들을 하고 싶어요.

저는 무엇보다 남편에게 이웃들 눈치 안 보고 볼륨을 한껏 올리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방음이 된 서재 겸 음악 감상실을 하나 장만해드리고 싶어요. 시간에도 쫓겼지만 공동주택에 살다 보니 불가능한 일이라 안타까웠는데, 이제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겠어요.

벌써 음악 실컷 들어보고 싶은 소원 하나는 이루어졌네요. 또 책을 원 없이 읽고 글도 쓰고 싶어요. 그동안 편독하던 경영, 경제 분야 말고요. 무엇보다 문화예술 방면의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돈벌이가 되면 좋겠지만, 연연하지 않고 순수하게 접근해보려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친척이나 불알친구들 그리고 동창생이 끈끈한 면은 있지만 오히려 불편한 구석도 있어요. 제가 CEO때 일인데, 어렸을 적 친구들을 초대해서 근사하게 밥을 산 적이 있어요. 그런데 한 친구가 ‘너는 밥값 내는 모습이 너무 교만해 보인다’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그때 일순 당황했지만 ‘그렇게 보일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사고를 가진, 철들어서 만난 미지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신나게 수다를 떨다 보니 제 스트레스가 다 풀린 느낌입니다. 김 고문님 내외분을 비롯하여 모든 분이 새해에는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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