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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깊어진, 피아니스트 윤한

2017-10-19 11:31

취재 : 서재경 기자  |  사진(제공) : 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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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이 마중이라도 나온 듯 청명했던 어느 날 오후, 피아니스트 윤한을 만났다. 좀 더 분위기 있어지고 한결 여유로워진 서른다섯 윤한은 점점 깊어가는 중이다.
바쁘게 사느라 연락이 뜸하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었다. 예전만큼 브라운관을 통해 자주 볼 수 없는 피아니스트 윤한과의 인터뷰는 그만큼 반가웠다.

올해 초, 그는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음악학과 전임교수로 임용돼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어 몇 차례 소규모 콘서트를 열었다. 가을엔 오롯이 피아노 사운드로만 채운 소품집도 발매할 계획이란다. 방송 활동을 자주 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012년, MBC <우리 결혼했어요>에 로맨틱한 피아니스트 가상 남편으로 출연해 대중의 인기를 얻은 윤한은 그로부터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 그때와는 다른 남자가 되어 있었다. 진중한 분위기가 묻어나고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편 듯 힘을 빼고 여유로워졌다. 이 남자, 어딘가 조금 더 깊어졌다.
 

방송 활동을 자주 안 해서인지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에요. 그동안 바쁘게 지냈어요. 주중엔 학교 가서 일 보고, 공연 있을 때는 틈틈이 공연 연습하고 합주도 하고. 앨범 준비 중이라 틈틈이 곡도 썼어요.

올해부터 대학교수로 강단에 섰습니다. 한 학기를 마친 소감은 어떤가요? 세상에 쉬운 건 없구나 싶네요.(웃음) 지난 3월 학기를 시작했는데 준비기간이 짧았음에도 강의를 많이 맡았어요. 일주일에 24시수였거든요. 전임은 보통 12~15시수 맡는데 두 배를 맡은 거죠.

왜 그렇게 많이 맡았죠? 인기가 많아서? 농담이고요. 학부도 있지만 대학원도 있잖아요. 특수 대학원 수업은 강의가 오후 6시 30분에 시작해서 10~11시에 끝나요. 밥도 교직원 식당에 가서 혼자 먹고. 4천5백 원이에요.(웃음) 학기 초엔 개강 총회며 MT, OT도 가야 하고요. 강의 말고도 할 일이 많더군요.

극한 직업인데요?(웃음) 활동을 많이 할 수 없군요. 그렇죠. 지난 학기엔 미리 잡혀있던 스케줄은 어쩔 수 없이 휴강하고 참석하기도 했는데, 휴강을 많이 할 수는 없잖아요. 주말밖엔 시간이 안 되죠.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물론 좋아해주면 좋죠. 학부는 어린 친구들이 많잖아요. 눈높이에 맞춰서 수업하려고 해요. 대학원은 나이 많으신 분이나 활동하다 오신 분도 계셔서 같이 재밌게 수업하고요. 

피아노 소품집 앨범을 낸다고 들었습니다. 소개 좀 해주세요. 3집을 지난해 말에 냈어요. 4집을 내야 하는 타이밍인데, 정규 앨범보다는 조금 비워낸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품집을 내면 좋겠다 싶었죠. 요즘 사람들이 다시 아날로그 감성을 찾고, 뭔가를 비워내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저도 피아노 솔로로 음향 효과를 따로 넣지 않은, 절제된 사운드를 앨범에 담으려고요. 사람들에게 휴식을 줄 수 있고, 친환경적인 음악을 하고 싶어요.

앨범 콘셉트가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소리)’이라고요? 녹음 방식이 자연스러워질 것 같아요. 잡음도 들어가고. 우리가 듣는 음악은 대부분 정제된 사운드잖아요. 저는 좀 더 자연스러운 음악을 담고 싶어요. 녹음하는 날 기분에 따라 나오는 즉흥곡도 넣고 싶고요.

이전 앨범에는 윤한 씨 목소리가 들어갔습니다. 이번엔 노래를 안 하나요? 이번엔 목소리가 안 들어가요. 대신 기침 소리나 숨소리가 들어갈 수는 있겠죠.(웃음) 1집엔 연주곡만 담았어요. 그다음 앨범부터 보너스 트랙처럼 한두 곡 노래를 불러 넣었죠. 리스너들은 오히려 목소리 나오는 걸 많이 듣더라고요. 하지만 이번엔 원점으로 돌아와서 연주곡만 넣게 됐어요.

MBC <복면가왕>에 출연해서 김조한의 ‘사랑에 빠지고 싶다’를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화제였나요? 곡이 좋았죠. 제가 고른 곡은 아니에요. 제가 부르고 싶은 곡은 이미 다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제작진이 선곡해줬어요. 모르는 곡이었는데, 연습해서 불렀죠. 제가 아는 곡이었으면 가왕까지 갔을 거예요.(웃음)

얼마 전 팬미팅도 했습니다. 팬들과 자주 만나나요? 아뇨. 생일파티 외엔 자주 만나지 않아요. 매번 공연에 와주셔서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아는 분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만 소규모로 서른 분 정도 모셔서 제가 밥을 샀어요. 편안하게 앉아서 근황 얘기하고 수다 떨었죠.

팬들이 좋아하는 윤한 씨 매력은 뭔가요? 자화자찬도 좋습니다. 글쎄요. 계속 변하는 것 같아요, 저를 좋아하는 포인트가. 처음엔 좀 신선하지 않았을까요? 원래 TV엔 딱 완성된 연예인들이 나오잖아요. 제가 처음 방송했을 땐 날것 같은 신선한 느낌이 조금 어필했던 것 같고. 요즘엔 제 음악이 좋아서 오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웃음)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공연을 하고 있어요. 학교 들어가고서는 원래 공연하던 것의 절반 정도밖에 못 했어요.

공연하는 시간이 소중하겠는데요. 그렇기도 하고, 자주 공연하면 그 시간이 익숙한데 오랜만에 하면 무척 설레거든요. 그런 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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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소규모 투어 콘서트도 했습니다. 어땠나요? 연초부터 소규모 공연을 했어요. 어떤 면에서 보면 이번에 발매하는 피아노 소품집과 연관이 있어요. 장비가 다 갖춰진 공연장에서 멋있게 차려입고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카페나 서점 같은 작은 공간에서 작은 피아노를 놓고 공연했거든요. 저도 그렇지만 관객도 편안하게 와서 대화도 나누고. 재미있었어요.

자연스러운 걸 선호하게 됐나요? 나이 들면서 점점 비우는 것을 추구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는 것 같아요. 베테랑 배우들 보면 오버해서 연기하지 않는데 눈동자만으로도 깊이가 느껴지잖아요. 피아노 연주나 공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대학 다닐 때 녹음해놓은 곡들을 들어보면 무척 화려해요. 요즘엔 음표 개수는 줄었지만 한 음 한 음에 무게를 실어서 치게 돼요. 성향이 많이 바뀌었죠.

이른바 ‘엄친아’로 유명합니다. 줄곧 전교 1등을 하다가 고3 때 피아노를 시작하고 버클리 음대에 들어갔다고요. ‘실화’인가요?(웃음) 쉽지 않았죠. 준비하는 동안엔 다들 그렇게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나도 따라가려면 열심히 해야겠다고. 당시엔 공부 말고 음악을 하고 피아노 치고 살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했어요. 저한텐 놀이였거든요. 스트레스나 부담이 덜했죠.

갑자기 음악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나요? 중·고등학교 때 뚜렷한 꿈이나 목표가 없었어요. 시키는 공부해서 성적 잘 받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가고 그렇게 생각했지 목표가 뚜렷하지 않았어요. 저희 형이 4수를 해서 의대에 갔거든요. 형이 힘들게 공부하는 걸 보면서 나는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게 뭘까 고민했죠. 고2 때 막연하게 곡도 쓰고 악기도 연주하고 노래하면서 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했어요.

그 나이 때 음악을 한다고 하면 보통 가요계를 꿈꾸지 않나요? 처음엔 그랬어요.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당시만 해도 국내에 실용음악과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다 알아보니까 경쟁률이 치열하더라고요. 잘하는 사람만 들어가고. 고민하다가 집에서 유학을 가라고 하셨어요. 외국 학교들은 잘 받아준다고.(웃음) 우리나라와 미국은 입시 시스템이 조금 달라요. 우리나라는 이미 잘하는 학생을 뽑는데 미국에선 음악을 얼마나 하고 싶어 하는지, 잠재력은 있는지를 보죠. 그래서 들어가긴 쉬운데 졸업하긴 힘들어요.

지나온 얘기만 들으면 천재 같은데 실제론 ‘노력형’이라고요? 천재과는 확실히 아니에요. 그런 성격도 못 되고요. 극도로 예민하거나 완벽주의 성향도 아니에요. 집중력만 높은 편인 것 같아요. 작업하려고 앉으면 6~8시간 화장실도 안 가고 밥도 안 먹어요. 하다 보면 시간이 그렇게 흐르죠. 성격도 고지식해요. 하지 말라는 거 안 하고, 겁도 많고요. 대학원도 석사·박사 과정 밟는 4년 동안 개근했어요, 수업 빠지면 큰일 나는 줄 알고.(웃음) 시키는 거 열심히 하다 보니까 성적도 잘 나온 거예요. 학교도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대학원 때 올 A+ 받아서 1등 장학금도 받았다니까요.(웃음)

학창시절에도 모범생이었죠? 시키는 거 열심히 하고, 가지 말란 데 안 가고.(웃음) 사고 치거나 일탈하는 일도 없었고요.

음악의 길을 간 것이 첫 일탈인가요? 그렇겠네요.

피아노 선택한 걸 후회한 적은 없나요? 아직은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잘 선택했다 싶죠. 무엇보다 음악을 시작하면서 교수가 되겠다고 부모님과 약속했는데, 피아노 덕분에 17년 만에 약속을 지킨 것도 감사하고요.

꿈을 너무 빨리 이룬 것 아닌가요? 한 100년 기다릴 걸 그랬나요?(웃음) 교수들 중에 제가 제일 어리긴 해요. 오가며 모르는 교수님들께 인사드리면 학생인 줄 아세요. “어, 그래” 이러신다니까요. 요즘엔 나이 들어 보이려고 안경도 끼고, 면도도 안 하곤 해요. 나름 고충이 있어요.(웃음)

4수 끝에 의대에 간 형도 그렇고 교수 꿈을 이룬 윤한 씨도 그렇고 가족들이 고집과 끈기가 있나 봐요. 저는 사실 잘 포기해요. 아닌 걸 계속 붙잡고 있기보다는 해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빨리 포기하는 편이거든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고 봐요. 작년에 연기를 해보겠다고 했는데, 아니다 싶어서 바로 포기했거든요.

그럼 연기는 다시 안 할 건가요? 연기는 잘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연기 말고도 DJ나 뮤지컬 배우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습니다.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기회만 된다면 경험해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라디오 DJ나 패션쇼 무대에 섰던 경험도 좋았어요. 오늘처럼 촬영하는 것도 제 분야는 아니지만 재밌고요.

서른다섯입니다. 이전까지는 어떤 사람이었고, 이후에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요? 그런 생각을 잘 안 해요. 과거를 추억하지도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았으면 좋겠어요. 큰 굴곡 없이. 대박 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망해서 끼니를 걱정하고 싶지도 않고.(웃음)

몇 달 안 남았습니다만 올해 남은 계획이 있나요? 앨범을 잘 만들어서 10~11월에 발매하고 싶어요. 앨범 나오면 공연도 준비해서 한 해를 재미있게 마무리하고 싶어요. 10월에 열리는 서울숲재즈페스티벌도 준비 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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