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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연주한 권혁주, 계속 알려갈 거예요"

러시아 보물 바이올리니스트 고 권혁주 모친 이춘영 씨

2017-06-09 10:15

취재 : 선수현 위클리공감 기자  |  사진(제공) :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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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마음은 다 똑같다. 그저 자식이 잘되길 바란다. 때문에 어머니라는 이름에서는 자식을 위한 헌신과 사랑이 느껴진다. 바이올리니스트 故 권혁주 어머니 이춘영 씨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안위보다 자식의 꿈이 먼저였기에 이 씨의 아들은 세계가 주목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을 살아가던 이춘영 씨는 다시 일어서기로 했다. 여전히 권혁주의 어머니로서 할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환상적인 연주자, 신도 놀랄 만한 테크닉과 타고난 음악성을 가진 놀라운 존재.” 러시아가 극찬해 마지않던 이 연주자는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1985~2016)이다. 한국 클래식계의 ‘비르투오소’ 권혁주는 지난해 10월 부산 움챔버오케스트라 창단연주회를 하루 앞두고 있었다. 연주회 리허설 후 호텔로 향하는 택시에서 잠이 든 그는 영원히 눈을 뜨지 못했다. 천재의 요절에 한국 클래식계는 비탄에 빠졌다.
 
어머니 이춘영 씨는 아직 아들을 가슴에 묻지 못했다. 집에는 아들의 흔적이 빼곡하다. 바이올린, 연주 포스터, CD, 일정 메모까지 그대로다. 보면대에는 권 씨가 미처 무대에서 연주하지 못한 악보가 수개월째 펼쳐져 있다. 앞세운 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만 그렇다고 선뜻 물건을 정리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황망한 아들의 죽음에 몇 달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홀로 기른 외동아들 혁주는 남편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혁주가 떠난 후 바이올린 선율은 늘 처량했다.
 
 
러시아의 보물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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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3일 금호아트홀 ‘아름다운 목요일’ <드뷔시 스페셜 Ⅳ> 권혁주 Violin, 김다솔 Piano.

이 씨는 아들이 바이올린을 마주하던 30년 전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 살 무렵 집 근처 음악학원에서 바이올린과 인연을 맺은 권혁주. “엄마, 들어봐. ‘라-’ ‘시-’ 어때?” 그는 바이올린에 첫눈에 반했다. 아이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악보를 보여주면 그 자리에서 외웠다. 아니, 악보를 통째로 흡수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의 손에 들린 활과 네 개의 줄은 정확하게 음표와 기호를 읽어냈다. “이런 아이는 처음이에요.” 혁주를 만난 선생님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었다.
 
혁주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이춘영 씨는 아들의 음악적 소질을 가늠해보고자 했다. 클래식 문외한이던 이 씨는 알음알음 물어 김남윤 교수를 찾았다. 김 교수는 단번에 권혁주를 알아봤다. 권혁주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들어가 김남윤 교수에게 사사했고 바이올린과 결코 뗄 수 없는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혁주의 실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던 데 반해, 남편의 사업은 부도를 맞았다.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었지만 혁주의 인생에서 바이올린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춘영 씨는 한 교수를 떠올렸다. 몇 달 전 독주회를 위해 방한했던 마리네 야스빌리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였다. 당시 어렵게 찾아간 마리네 교수는 혁주의 연주를 듣고 연신 ‘브라보’를 외치며 꼭 러시아로 오라고 당부했었다. 마리네 교수는 방한 기간인 4일 내내 혁주를 만났다. 모자(母子)는 망설이지 않고 러시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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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크라이나 국영방송 인터뷰 모습.
2 어머니와 함께.
3 러시아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가 티혼 흐네리코프와 함께. 그는 권혁주를 “러시아 계보를 이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평했다.

아들의 실력은 러시아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즐기는 천재를 당할 자가 없었다. 권혁주는 열한 살 때 차이콥스키 청소년 콩쿠르에 출전해 2위를 차지했다. 1위를 차지한 학생은 열일곱 살로 여섯 살이나 차이가 났을뿐더러 권혁주의 바이올린은 ¾ 사이즈였다. 그럼에도 “야사 하이페츠가 살아 돌아왔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연주자”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이후 크렘린 궁전에서 러시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이처럼 혁주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전폭적인 후원을 약속했다. 어린 연주자는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칼 닐센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 파가니니 바이올린 콩쿠르 등 각종 대회를 석권하며 이름을 알렸다. 동양인 연주자임에도 “러시아의 보물”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연주자로 성장한 권혁주는 무대를 가리지 않았다. 최고의 기량일 때 다양하게, 더 많은 곡으로 관객과 만나고 싶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러시아, 유럽, 아시아 무대를 오가며 차이콥스키 방송교향악단,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 체코 필하모닉, 브뤼셀 필하모닉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금호아시아나솔로이스츠, 올림푸스 앙상블, 서울시향 등 국내 무대를 주도하며 한국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많은 청중들이 권혁주 연주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연주로 ‘파가니니’ 곡을 꼽는다. 파가니니 곡은 대중에게 친숙한 곡임에도 완벽하게 소화하는 연주자가 드물다. 특히 ‘카프리스 24개곡’을 한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다. 곡당 길이가 길진 않지만 고난도 스킬이 필요한 곡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곡을 만들고 연주한 파가니니를 두고 악마와 결탁한 연주자라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다. 하지만 2013년 권혁주는 ‘파가니니 카프리스 24개’ 전 곡을 한 무대에서 선보였다. 심지어 곡을 연주하는 권혁주의 모습은 담담하고 여유로웠다. 다섯 손가락은 바이올린 네 줄을 현란하게 넘나들며 정확히 음계를 짚었다. 월간 <객석> 최은규 칼럼니스트는 “권혁주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하게”라며 연주회를 평했다.
 
 
“혁주가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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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21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한러 문화예술의 밤’ 2부 개막축하 갈라공연.

이춘영 씨는 지난 4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자녀를 훌륭한 예술가로 키운 어머니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수여하는 상이다. 이 씨는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했을 때, 혁주가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어요. 먼저 떠난 혁주 생각이 더 간절해졌죠”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수상을 한 어머니와 자녀 모두 한마음으로 기쁨을 나눴지만 그는 아들 사진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권혁주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재능과 노력은 물론이고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준 이춘영 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씨는 무엇보다 아들을 믿어줬다. 작은 결정도 스스로 할 수 있게 지지했다. 성인 연주가가 되어서는 객석에서 가장 열렬한 팬으로 음악을 감상했다. “권혁주는 아들이기 전에 마음을 훔치는 연주가였어요. 노래를 아무리 잘하는 가수라도 마음이 움직이는 노래는 따로 있잖아요. 연주도 마찬가지예요. 권혁주는 영혼을 담아 연주했기 때문에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였어요”라고 평가했다.
 
이춘영 씨는 아들의 것이라며 몇 권의 노트를 보여줬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누렇게 바랜 노트에서는 거침없이 그려낸 음표가 눈에 띄었다. 아홉 살 혁주가 작곡한 클래식 곡 오선지는 지우개로 지운 흔적 하나 없었다. 오로지 영감을 받아 즉석에서 작곡한 곡들이다. 비록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이춘영 씨는 할 일이 있다. “혁주의 음악 인생을 남기고 싶어요. 지금은 음원을 정리하고 작곡한 악보를 프로듀싱하고 있어요.” 이 씨는 아들의 바이올린 선율을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알릴 예정이다.
 
새로움을 주는 연주자, 기분 전환을 시켜주는 연주자, 관객과 함께 음악을 느끼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던 권혁주. 아들의 꿈을 이어가기 위한 어머니 이춘영 씨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2017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수상자
 
문화체육관광부는 4월 27일 ‘2017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시상식을 개최했다. 올해로 27회를 맞은 가운데 문학, 미술, 음악, 국악, 연극, 무용, 대중예술 등 7개 분야 예술인의 어머니가 수상의 기쁨을 안았다. 故 권혁주 어머니 이춘영 씨 외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문학 시인 박성우의 어머니 김정자 씨
박성우 시인은 2000년 <거미>로 등단했다. 2010년 시집 <난 빨강>으로 청소년 시 분야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으며 시집 <거미>, <가뜬한 잠>, <자두나무 정류장> 등을 발표했다. 신동엽창작상, 불꽃문학상, 윤동주상 젊은 작가상, 천인갈채상 등을 수상한 시인이다. 박성우 시인의 어머니 김정자 씨는 젊은 시절엔 농사일을, 노년에는 아들의 모교 대학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며 뒷바라지를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박성우 시인은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을 시로 발표하여 예술로 표현하기도 했다.

미술 설치미술가 김승영의 어머니 박흥순 씨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꿈이 흔들릴 때 어머니는 밤늦도록 일하며 아들의 꿈을 지원했다. 설치미술가 김승영 씨와 어머니 박흥순 여사의 이야기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물, 이끼, 숯 등 자연재료와 빛, 음향,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혼합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모란조각대상전 우수상, 동아미술제 대상 등을 수상했고 주요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사비나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김승영 작가는 어머니의 사랑을 작품 <의자>를 통해 표현할 만큼 어머니의 사랑이 예술적 영감과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말했다.

국악 국악인 방수미의 어머니 구현자 씨
평소 우리 소리에 관심이 많던 구현자 씨는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국악의 길로 이끌었다. 딸의 교육을 위해 직접 명창을 찾아다니며 배움의 길을 열어줬고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생계와 자녀의 국악 활동을 위해 노력했다. 딸 방수미는 한국무용, 가야금병창, 판소리를 배웠고, <홍보전>, <심청전>, <춘향전>, <수궁가> 등 다양한 창극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2012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전통예술부문에서 수상한 실력 있는 국악인으로 성장했다.

연극 연출가 김태수의 어머니 조용녀 씨
“바라는 건 없다. 너의 길을 가라.” 어머니 조용녀 씨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바느질, 뜨개질 등 일을 하면서도 아들의 연극을 향한 꿈을 믿어주고 묵묵하게 지지해줬다. 김태수 연출가는 1977년 연극 현장에 입문하여 1984년 극작가 故 박재서, 배우 명계남 등과 함께 극단 완자무늬를 창단했으며 현재 극단 완자무늬 대표로 활동 중이다.

무용 발레무용수 황혜민의 어머니 김순란 씨
5남매 중 두 딸을 발레리나로 키워낸 김순란 여사. 오늘날의 발레리나 황혜민이 있기까지는 그녀의 손발이 되어 학교, 학원에 동행하며 매일같이 함께 고생한 어머니가 있었다. 딸의 발레단 입단 후에는 매 식사를 잊지 않고 챙겨줬으며 공연 때마다 객석에서 묵묵히 응원해줬다. 황혜민 발레리나는 헝가리 국립발레단 <돈키호테> 주역 초청, 인터내셔널 발레 스타 갈라 초청 등 국제활동을 이어가며 현재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발레뿐만 아니라 뮤지컬 <팬텀>에 출연하며 활동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대중예술 가수 김건모의 어머니 이선미 씨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더 잘 알려진 이선미 씨. 무심한 듯 툭툭 말을 내뱉지만 그의 눈에서는 아들을 향한 사랑이 뚝뚝 묻어난다. 이선미 씨는 아들의 남다른 음악적 성향을 알아보고 4살 때부터 피아노 교육 등을 통해 재능을 키워줬다. 국민가수 김건모는 독특한 음색과 디스코풍의 댄스곡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여전히 다양한 히트곡을 남기는 중이다. 한국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평가받는 김건모는 골든디스크 대상 3년 연속 수상,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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