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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기부자 모임’ 정갑윤 의원

가난이 선물한 여유

2017-03-13 08:41

취재 : 여지인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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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볼 여유가 없는 삶이었다. 팍팍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가난 탓이었다. 그런데 묘했다. 그 가난이 훗날 베푸는 여유를 줬다.
그 덕에 국회의원으로서는 두 번째로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멤버가 됐고, 20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나눔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나눔에 열을 올린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이미 지역구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다.
영원한 울산 촌놈

그는 울산 토박이다. 나고 자랐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와 서울서 1년간 재수하던 때를 제외하곤 고향 땅을 떠나본 적이 없다. 정갑윤 의원은 “나는 영원한 울산 촌놈”이라며 웃었다.

정 의원은 2002년 제16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울산 중구에서만 내리 5선을 했다. 19대 때는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국회의장을 보좌하는 부의장 자리는 여당과 야당에서 각각 한 명씩 총 두 명이 맡는다. 정 의원은 당시 여당 소속으로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던 올 초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남았다.

국회의원회관을 찾은 2월 14일. 정 의원은 얼굴 가득 화색을 띠고 있었다. 바로 전날인 13일, 울산 중구가 ‘2019 올해의 관광도시’에 선정됐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2017년이 울산 방문의 해로 지정되기도 했다. 겹경사였다.

“그간 울산은 공업도시, 혹은 산업도시로서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관광도시로서의 콘텐츠가 어마어마해요. 우선 간절곶. 한국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입니다. 십리대밭도 있어요. 도심 한가운데에 그런 대나무 숲이 있는 곳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반구대 암각화도 있고, 대왕암공원,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칠봉’까지 있습니다. 7개의 봉우리가 마치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이 아주 장관이죠. 고래관광도시이기도 해요. 그리고 산업단지 자체가 관광 매력물이기도 합니다.”

여느 국회의원보다 고향사랑이 대단하다고 소문난 그답게 ‘울산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지역 곳곳을 꿰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울산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면서 “곧 봄이 오면 태화강 일원에 유채와 꽃양귀비가 피는데, 아주 장관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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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갑윤 의원이 5선을 이룬 데는 아내 박외숙 여사의 내조가 큰 몫을 했다. 박여사는 울산에 계속 머물며 지역을 챙기고 있다.

아내 박외숙 여사의 내조

고향사랑을 엿볼 수 있는 건 비단 ‘자랑’에서뿐만이 아니다. 지방지역구 국회의원이 국회에 입성을 하면, 통상적으로 그 가족들 모두가 서울로 적을 옮긴다. 지역구에는 적당히 머물 곳을 마련해두는 게 보통이다. 한데 정 의원은 그 반대다. 아직도 집이 울산이다. 서울에서 그는 ‘자취’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내 박외숙 여사와는 주말부부로 지낸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울산 중구에서는 다선을 허락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곳에서 5선의 위엄을 달성한 데는 박 여사의 내조가 크게 몫을 했다고 한다.

“제가 5선을 할 동안 아내는 계속 울산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면서 지역민들과 함께 울고 웃었지요. 물론 초선, 재선일 때는 제가 일일이 다녔는데, 다선이 되고 나서부터 저는 주로 이곳에 있고 아내가 제 공백을 다 메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박 여사가 ‘정갑윤 아내’로 활동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아내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 이름으로 단상에 올라가는 건 괜찮다. 그러나 남편 이름으로는 결코 단상에 올라가지 마라. ‘정갑윤 아내’로 활동하지는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좀 보수적이지요? 허허.”
실제로 인터넷 검색창에 ‘정갑윤 부인’이라고 쳐보면 이렇다 할 기삿거리를 찾기 힘들다. 부창부수. 때문에 박 여사는 묵묵히 일주일에 며칠은 급식소 봉사를 하고, 김장 등 철마다 치러지는 행사에 빠지지 않고 나가 일꾼이 되길 자처한다.

“태화강이 생태강으로 거듭나고 나서 수영대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죠. 각종 단체들이 와서 전을 구웠죠.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하게 전을 굽는 아내에게서 지역민들이 진정성을 본 것 같습니다 ”

사실 박 여사가 봉사활동을 시작한 건 정 의원이 국회의원이 되기 훨씬 전인 1992년부터다. 이때부터 복산급식소에서 불우노인들에게 식사 대접을 했고, 이후에도 남해노인복지센터와 혁신도시에 있는 장애인복지관에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슬하엔 두 아들을 뒀다. 지금은 모두 장성해 첫째는 한 프랜차이즈 회사에서, 둘째는 통신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사내아이들인지라 아주 엄하게 키웠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밥만큼은 가족들과 함께하려고 애썼죠. 그 시간이 아이들을 위한 ‘밥상머리 교육’ 시간이 됐습니다. 공부하라는 소리는 안 했는데, 대신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에는 매를 들기도 했어요. 인사를 하지 않거나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을 때에도 엄하게 훈육했지요.”
 
 
세월이 남긴 나눔 습관

정 의원 또한 어린 시절, 아버지의 대쪽 같은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아버지는 늘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개를 쫓아내도 나갈 곳은 보고 쫓아내라’, ‘부모 팔아서 친구 사라’라고요. 지금도 귀에 선한 아버지의 말씀이 이제껏 제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죠. ‘부모 팔아서 친구 사라’라는 말씀이 친구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도록 이끌었다면, ‘날아가는 까마귀도 내 술 한잔 먹고 가라’ 하시던 말씀은 베푸는 삶이 주는 행복을 터득하게 했습니다.”

정 의원은 가난한 산골 농부의 여섯 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을 도우며 컸다. 그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가난이었다”고 했다.

초등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됐지만, 집이 워낙 가난한지라 그저 소 먹이고 나무하고 풀 베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사는 어르신께 간신히 천자문을 익히는 것으로 배움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건 동네 이장님 덕분이었다. 책을 좋아하고 공부에 목말라하는 어린 소년을 옆에서 지켜보기 안타까우셨는지 여기저기 주선을 한 끝에 초등학교에 넣어주셨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신문배달을 하며 직접 용돈을 벌었고 악착같이 공부했다. 결국 울산에서 공부깨나 하는 학생들만 간다는 부산 경남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경사였지만, 입학금 7천3백50원을 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중학교 담임이셨던 이진갑 선생님이 제 형편을 잘 알고 계셨어요. 여기저기 상황을 알렸고 부산 유지분들의 마음을 움직여 성금을 모아 주셨죠.”

대학생이 되자 큰형님의 목재소 사업이 번창해 집안 형편이 좋아졌다. 여유가 조금 생기자 가슴에 새겨뒀던 빚이 떠올랐다. 그렇게 대학시절부터 나눔의 참맛을 알게 됐다. 대학시절 내내 야학에 나가 학생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쳤고, 방학이 되면 면 단위마다 있는 재건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야학에 나와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어린 시절 힘들게 공부했던 내 모습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 그분들의 나눔이 없었다면 아마도 야학에서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던 정갑윤도, 정치인 정갑윤도 없었을 겁니다.”

정 의원은 2008년부터 매월 세비의 약 10%를 지역복지단체 5곳에 쌀로 기부하고 있으며, 2012년과 2015년에는 각각 장기와 각막 기증 서약을 통해 생명 나눔에도 동참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쌓인 나눔 철학 덕분에 그는 국회의원 중 두 번째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20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나눔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지만, 이는 현재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가난은 나를 한 번도 기죽이거나 좌절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가난했던 내게 많은 분들이 베풀어준 숱한 나눔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었죠. 가난으로 커다란 불편을 겪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 시간들은 가난 속에서 성장하면서 인생의 가장 귀중한 가치를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보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가치가 바로 나눔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세월 의정활동을 하면서 나눔이야말로 국가가 책임지지 못하는 사회안전망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면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라 ‘함께’에 희망이 있다. 나눔은 내 정치의 목표 중 하나이자 동기부여의 원천”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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