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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공터에서' 본 나라의 운명

"분노의 폭발이 아닌 미래 건설의 힘으로 연결됐으면"

2017-03-10 09:42

취재 : 황혜진 기자  |  사진(제공) : 신승희,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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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과 군부독재를 모두 겪은 사람의 인생은 어떤 색일까. 작가 김훈은 그 격동의 현대사를 맨몸으로 겪어낸 한 아버지와 그 아들의 삶을 새 소설 <공터에서>를 통해 풀어놨다.
“저는 1948년에 태어나서 올해 70살이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1910년, 우리나라가 망해서 없어지던 해 태어났고 저는 그 나라를 다시 만들어 정부수립을 하던 해에 태어났습니다. 1910과 1948이라는 숫자가 우리 부자의 생애에 운명적 좌표처럼 찍혀버린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결코 도망갈 수 없는 한 시대의 운명이 전개되었던 것이고, 저나 저희 아버지나 모두 그 시대의 참혹한 피해자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삶의 터전을 떠나 만주 일대를 떠돌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겪어낸 파란의 세월, 해방 이후의 혼란과 연이어 겪게 되는 한국전쟁, 전후의 피폐한 상황 속에서 맺어진 남녀의 애증과 갈등, 군부독재 시절의 폭압적인 분위기,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한국인들의 비극적인 운명,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죽음, 세상을 떠도는 어지러운 말들을 막겠다는 언론 통폐합, 급속한 근대화와 함께 찾아온 자본의 물결까지. <공터에서>는 작가 자신과 작가의 부친인 소설가 김광주가 직접 살아낸 시대를 그리고 있다.
 
“저의 아버지와 그 시대의 많은 아버지들이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해 겉돌고 떠돌던 여러 모습을 모자이크했습니다. 아버지 세대에 대해 쓰는 것이 제 평생 짐이었어요. 저는 그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자기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버지의 고통을 알지만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고통이 글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였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념이나 사상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저항하는 인간이나 영웅 같은 인물도 나오지 않는다. 시대가 개인에게 가하는 역사의 무게, 그리고 그 하중이 무서워 세계 밖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이 등장할 뿐이다. 그는 “희망은 아주 조금밖에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여자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순수한 생명의 원형이 드러나는 것, 그리고 소시민적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그가 그려낸 희망의 전부다.
 
“여성의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놀랍고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여성은 또 생명을 낳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도망 다니고 그 시대를 부인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아주 무섭게 그리고는 이렇게 사소한 것을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한심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명석한 전망이나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미수에 그쳤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것이 너의 한계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한계가 맞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 한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장마다의 한계도 있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많은 한계에 부딪혀 갈팡질팡 살고 있다”고 했다.
 
“저는 협소한 시야와 협소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전망, 시대 전체의 구조, 통합적인 시야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내가 쓰고 싶은 것, 써야 마땅한 것을 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겨우겨우 조금씩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글로, 이런 글쓰기로 내 생애를 마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가 쓰고 싶은, 써야만 하는 목표나 당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목표를 향해 나의 언어를 몰고 가서 올바른 표현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장인적 기법이 확보되지 않는 한 저는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괴로운 고백인데 내 고백에는 거짓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와 작가의 아버지가 살아온 1900년대는 어떤 시대였습니까? 이 땅에서 70년 살면서 내가 정말 소름 끼치게 무서웠던 것은 우리들 시대의 야만성과 폭력, 한없는 억압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루 말로 다 못 하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도 악의 유산으로 세습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악의 유습, 유구한 전통인 ‘갑질’입니다. 이 소설을 쓰려고 과거 신문을 많이 봤습니다. 사회면을 봤더니 서울부터 부산까지 50만 명이 줄을 지어 그 추운 겨울날 피란을 가는데 이 나라 고관대작들이 군용차와 관용차, 트럭에다가 응접세트와 피아노를 싣고 먼지를 날리면서 피란민들 사이를 질주해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국방부 장관이 제발 이따위로 하지 말아달라고 성명을 발표한 것이 <조선일보>와 <부산일보>에 나와 있어요. 그뿐 아니라 그와 유사한 여러 ‘갑질’들이 보도됐습니다. 나는 그걸 보고 ‘아 내가 태어난 조국이 이런 나라였구나’ 깨달았어요. 나는 ‘이런 나라의 후예로구나’, ‘이런 나라에 태어나 글을 쓰고 있구나’ 슬픈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보면서는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과거 전쟁 때 신문에 나타난 비리와 야만성이 지금도 계승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광화문에서 매일같이 분노의 함성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전통이 유구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그런 문제에 대해 저 나름대로의 매우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글쓰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 사람은 본래 저런 사람이구나’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집회에도 나가보셨나요? 장성한 조카들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겨우 중산층 밑바닥에 들러붙은 가장들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 데리고 광화문 집회에 같이 나가자는데 거절했어요. 나에게 보내준 사진을 보니까 분노의 기색은 없었고 소풍 온 것처럼 깔깔대며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감격을 느꼈습니다. 며칠 후에는 일흔 먹은 내 또래 친구들이 태극기 집회에 가서 찍은 사진을 보내며 같이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것도 감기에 걸렸다고 하고 안 나갔지요. 태극기 집회에 나간 친구들은 나와 같이 국민소득 100달러 시대에 사춘기를 보낸 사람들입니다. 대학에 들어갈 때는 국민소득이 130달러였죠. 우리나라가 소말리아와 같은 세계 최빈국이었던 그때 종합무역상사의 해외주재원으로 나가서 우리 여학생들의 생머리를 잘라 만든 가발, 비닐 원단, 미역, 김 같은 것을 외국에 팔아 한 줌의 달러를 국내로 송금해온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기아와 적화가 가장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난방을 펑펑 때고 밥이 넘쳐흐르는 세상을 살면서도 기아와 적화의 공포에 흔들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극기, 성조기, 십자가는 내가 어렸을 때 전개됐던 반공의 패턴하고 완전히 똑같은 겁니다. 70년이 지났는데 그것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내가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하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참가자라기보다는 관찰자로서 연말에 혼자 갔다 왔습니다. 위정자들이 저지른 난세를 광장의 군중들이 함성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크나큰 불행입니다. 하지만 희망이 싹트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분노의 폭발로 가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힘으로까지 연결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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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설을 쓰는 데 스냅적인 기법과 크로키 기법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 시대 전체를 전체로서 묘사할 수는 없었어요. 제가 쓴 것보다 쓰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쓰지 못한 부분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겨우 쓴 부분을 연민을 가지고 보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부탁입니다. 전체를 통괄할 수 없는 자로서 고심참담해서 도입한 기법은 우선 세부적인 것에 갑자기 달려들어서 날카롭게 한 컷 찍어버리는 스냅적인 기법입니다. 디테일을 통해 디테일보다 큰 것을 드러내면서 이 괴로운 글쓰기를 돌파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하나는 이 복잡한 디테일들을 그리는데, 스피드를 빠르게 해서 골격만을 그려내고 세부 사항은 드러내지 말자. 미술로 치면 크로키 기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나의 전략은 부분적으로 성공했고 많은 부분에서 실패했습니다. 제 소설은 이것보다 3배 분량으로 썼다가 스냅과 크로키가 좋지 않다고 생각된 부분을 거둬내고 남은 부분만 인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체를 통괄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통찰력 있는 진술을 할 입장은 아닌데 조정래 선배나 황석영 선배 같은 분들은 한 시대의 억압적 구조, 역사적 틀 그 전체를 들여다보고 주물러가면서 인물을 배치해 글을 쓰시잖아요. 그리고 윗대 어른들 중에도 그런 작가들이 있었죠. 저는 전체를 그리는 시각보다는 디테일을 통해 좀 더 큰 것을 말해보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체를 들여다봐서 원고지에 올려놓고 쓰는 작가들을 한없이 존경하지만, 제가 그분들의 뒤를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저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쉽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소설을 쓸 때와 에세이를 쓸 때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에세이는 주인공 없이 무책임한 정서를 자유롭게 전할 수 있어 편한데, 소설은 등장인물을 통해 말해야 해서 어렵습니다. 특히 3인칭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생각합니다. 이번 소설에 나오는 마동수와 마창세를 잘 들여다보면 아직 3인칭에 도달하지 못한, 1인칭의 아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인칭은 바다와 같은 것이에요. 그것을 지향해야 하는데 어려운 것이지요.
 
책 표지에 말이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건가요? 나는 어릴 때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늙은 말이 오는 것 같았어요. 힘없이 광야를 헤매다 터덜터덜 들어오는, 갈퀴에 눈이 덮인 늙은 말의 느낌이었죠. 책에 보면 어린이공원에서 말 타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불쌍한 말에 아버지를 투영한 것입니다. 표지의 말은 너무 뻔쩍뻔쩍해서 재판에는 초라한 말로 그리자고 얘기해놨습니다.
 
제목을 <공터에서>라고 정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터라는 것은 주택과 주택들 사이에 있는 버려진 땅이잖아요. 역사적 구조물이나 시대가 안착될 만한 건물이 있지 않아 앞으로 여기에 뭘 지어야 할지 모르는 공터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가 그랬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가건물에서 산 것 같습니다. 광화문에 나가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을 보고 내가 철거될 가건물에서 살아왔구나, 이것이 또 헐리겠구나 하는 비극을 느꼈지요. 그런 나의 비애감과 연결이 되는 제목입니다.
 
5년 만에 출간한 장편소설입니다. 처음에는 5권 정도 생각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 권으로 끝내셨습니다. 쓰면서 어떤 부분이 힘드셨나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몸이 많이 안 좋았어요. 특별한 병은 없으니 노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꾸 써서 뭐하나 싶어가지고 글을 쓰기가 싫었어요. 고만 쓰자는 생각도 가끔씩 했습니다. 단편과 에세이를 쓰면서 살았죠. 올해부터는 정신 차려서 열심히 쓰려고 합니다. 닭이 알을 낳듯이 써보려 하고 있어요.
 
세월호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도 하신 바 있습니다. 자료는 아주 많이 갖다 읽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학문적으로는 재미가 없고 기자들이 현장에서 수집한 게 재밌더라고요. 저는 다큐멘터리, 르포, 현장 보고서, 실록처럼 현실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글들을 좋아하는데 세월호도 그렇습니다. 세월호를 쓰려면 변형을 시켜 쓸 수밖에 없는데 참사 다음 날 자살한 안산고 교감선생님을 생각했어요. 그 선생님은 인솔책임자였는데 애들 버리고 혼자 탈출해서 그다음 날 아침에 나무에 목매달고 죽었더군요. 너무나 끔찍했어요. 인간에 대해 뭐라고 글을 써야 하나. 이 교감선생님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런 것들은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죠. 종교의 영역으로 갈 수밖에 없는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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