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모음 이벤트 동영상 카드뉴스 조선뉴스프레스멤버십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ISSUE
  1. HOME
  2. ISSUE
  3. people&

영원한 현직 조용기 우암학원장

천막 2개로 시작 9개 학교의 종합교육센터로 발돋움

2017-02-23 09:41

글 : 박지현 기자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메일보내기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새파란 청춘들이 캠퍼스를 누빈다. 고맘때 할 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거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노년의 신사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아흔을 넘긴 나이. 머리는 희끗하지만 등은 꼿꼿하다. 청년들이 인사를 건넨다. “학원장님, 안녕하세요.” 교직생활 70년. 한국교육계의 원로이자, 영원한 현직 우암 조용기 선생이다.
본문이미지
조용기 학원장은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20대 시절 천막을 치고 아이들을 가르치던 당시 본인의 사진 앞에 선 조 학원장. 70년이 흘렀지만 학교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

 
종강을 앞둔 교정은 차분했다. 겨울의 문턱이었지만 그리 춥진 않았다. 삼삼오오 걷는 학생들 사이로 백발의 신사가 걸어 들어왔다. 막 종강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망백의 나이지만 그는 아직 청년이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감색 정장과 환한 보랏빛 넥타이가 그랬고, 강의에 대한 열정이 그랬다.
구순을 넘긴 지금도 조 학원장은 강단에 선다. 그가 설립한 대학인 남부대학과 전남과학대학에서 ‘조용기 인간학’이라는 교양과목을 매주 두 시간씩 가르친다. 학생과 선생은 불과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강의 내용은 70년의 세월을 초월한다. 돈 주고도 못 살 깊은 연륜이 담겨 있다. 일방적인 설교가 아니라서 학생들에게 인기도 좋다.
“살아오면서 느낀 이야기들입니다. 읽었던 책 가운데서 감명이 깊었던 대목을 인생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하고요. 아이들의 고민, 궁금증을 수렴해 ‘나라면 이렇게 하겠다’는 조언도 해줍니다. 우리 삶은 이론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힘이 모자라면 서로 손을 잡는 ‘협동’은 생활에서 온 가르침이지, 책에서 배운 게 아니지요. 앞으로 살면서 부닥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그때마다 헤쳐 나가는 지혜를 나눠주려 합니다. 험난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살 만한 세상이라는 걸 알려주려는 것이지요.”
이론과 공식을 탈피한 수업이니만큼 채점하는 방법도 재밌다. 답이 틀려도 점수가 나간다.
“왜 틀렸는지 들어봅니다. 10점짜리 문제를 틀린 이유에 따라 7점이 나가기도 하고 8점이 나가기도 합니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정답이 딱 정해진 것도 아니고, 실패해도 다시 딛고 일어설 수도 있고요.”
한 학생의 학점을 두고 며칠을 고민하기도 한다.
“인간학이라는 과목에서 C학점을 받는다고 해보세요. 평생 C학점 인간이 될 수도 있는 거지 않습니까. 허허.”
두 시간짜리 수업을 위해 일고여덟 시간을 투자하는 건 기본이다. 매일 새벽,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집어 드는 것도 강의록이다. 이면지에 빼곡히 메모를 하고 한 대목도 놓치지 않기 위해 강의록을 봐가면서 수업한다. 그는 “순발력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며 웃었다. 강의를 시작한 이래 휴강을 한 적도 없다. 조 학원장은 “쓰러지는 날까지 교단에 서고 싶다”고 했다.
 
 
천막 두 개로 시작한 학교
 
조 학원장의 ‘가르침’에 대한 애착을 이해하려면, 시곗바늘을 많이 돌려야 한다. 교단에 선 지 올해로 70년째. 대한민국 수립 이전부터 교직에 몸담았다. 지난날을 돌아봐 달라고 하니, 그는 회상을 위해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1926년, 그는 곡성 옥과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5남매 중 차남이었다. 태어날 당시 조국은 이미 일제 치하였다. 대쪽 같았던 부친은 일본의 부당한 요구에 협력하지 않았다. 일제가 그의 집터에 신사를 짓겠다며 집을 비우라고 했지만 거부했다. 일제는 그의 집에 불을 질렀고 부친은 옥에 갇혔다. 참혹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야겠다, 이를 꽉 물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배우는 것밖에 없었다. 배운 후에는 나눠야 했다. ‘교육’이 답이었다.
“순천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을 열었습니다. 당시엔 문맹자가 공식적인 통계로 78%였습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지요.”
야학에서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운동을 벌였고, 1945년 해방 직후에는 광주 YMCA 재건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조선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46년에는 숭일학교(중학교 교과과정)의 정식 교사가 됐다.
“당시 교사는 처우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경찰서장도 경례를 붙일 정도였으니까요. 집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당시 한 달 치 급여에다 다음 달 급여를 조금 가불 받으니 되더라고요. 교사 월급이 꽤 괜찮았지요.”
안정기에 접어드나 했더니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부산으로 피란을 가야 했습니다. 부산에 가니, 모든 물자가 노적돼 있는 겁니다. 전쟁 통이지만 아직 대한민국이 살아 있구나 싶었어요. 그해 9월에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졌잖아요. 낙동강까지 밀린 군이 재편을 해서 올라오는데, 그중에 광주로 가는 부대가 있는 겁니다. 광주를 가는데 내 고향 옥과를 경유하더라고요.”
고향 옥과는 이미 폐허가 돼 있었다. 부서져 매가리 없는 나뭇가지만 굴러다니는 땅을 보며 그는 울 수도 없었다. 울 겨를이 없었다.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고향이 초토화되는 동안 나만 편하게 살았구나….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는 희망을 생각했다.
“당시 한국에는 젖소가 없었어요. 우유를 먹어본 사람도 없었지요. 다들 풀뿌리를 먹고 살았는데, 미군이 주는 우유가 어찌나 맛있던지…. 우리도 조금 더 잘살았으면 좋겠다, 이 고비만 넘기면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이번 고비를 넘기는 방법. 이 또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좀 더 비장했다. 학교를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재직하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옛 집터에 천막 두 개를 쳤다. 그리고 ‘옥과농민고등학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옥과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아내 故 이연희 여사의 내조
 
맨땅에 학교를 짓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밀린 자재 값을 충당하지 못해 목숨을 끊을 생각도 했다.
“하나님, 나 죽고 다시 태어나거든 좋은 학교 한번 만들게 해주시오” 하며 기도했다. 자살을 결심하고 소나무 옆에 엎드려 울고 있으니 “너 죽게 내버려둘 것 같으냐”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무렵 반려자인 고(故) 이연희 여사를 만났다.
“학교 일이 너무 힘들어 잠시간 서울에서 낭인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지요. 허허. 우연한 자리에서 아내를 만나게 됐습니다. 얘기를 하다 보니까 그 사람 꿈이 농촌에서 농사지으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사는 거였어요. 근데 그 사람이 당시 고위관료의 딸이었단 말이에요.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 그 시절에 자가용차를 타고 등교하던 사람이었죠. 그래서 나는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인데 괜찮겠느냐, 했더니 같이 시골로 가자고 하더라고요.”
이 여사는 조 학원장의 든든한 파트너가 돼줬다. 학교를 지으며 위기가 올 때에도 함께 이겨내자 다독였다.
“학교 터를 다지겠다고 곡괭이 들고 뒷산에 올라가면 따라와서 같이 파고, 풀 뽑으러 가면 같이 와서 뽑고 그랬습니다. 학교를 만든다고 자금을 몽땅 써버려서 제대로 된 집 한 채도 없었습니다. 비가 새는 그런 집이었어요. 아내는 양동이로 빗물을 받으면서도 좋다고, 부잣집 딸내미가 가난뱅이처럼 살게 됐는데도 좋다고 웃었어요. 고맙고 미안했지요. 훗날 옥과에 아파트가 들어섰는데, 그 23평짜리 집에 이사 갈 때 아내가 너무 좋아했어요. 나는 더 큰 집에 살게 해줘야 하는데, 하면서 미안해했는데 아내는 그 집이 세상에서 제일 좋대요. 이름이 ‘고운 아파트’였는데 이름처럼 참 고운 집이라면서요. 그렇게 지난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아파트에서 불평 한번 없이 살았습니다.”
요즘도 틈이 나면 아내의 묘소를 찾는다.
“마음이 참 고운 사람이었습니다. 평생을 고생만 많이 하고 떠났는데 불평 한번 없었어요. 갈 적엔 그야말로 웃으면서 보냈어요. 나도 곧 감세, 하면서요. 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요. 간혹 무슨 꽃이라도 생기면, 가까우니까 가서 갖다 주고 오곤 합니다.”
지금의 학교가 생기기까지 이 여사의 공도 크다. 생전 학교법인 우암학원 이사장이라는 직책도 받았지만, 그저 명예로만 생각하고 자신이 학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항상 생각했다고 한다. 전남과학대학의 전신인 ‘정선실업전문대학’의 설립 이념에도 일정 부분 이 여사의 뜻이 담겨 있다.
“인류가 최초로 만나는 교사는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어머니 교육에 주력했고 그 대표적 보기로 신사임당을 들고 있잖습니까. 그러한 어머니상을 상정하고 가르치는 덕목을 기록해놓은 서적들이 우리나라에도 한둘이 아니지요. 훌륭한 신부, 알뜰한 주부를 교육해내는 과업이야말로 현실적으로 오늘날 사회의 요구에 가장 부합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근원적 소망인 행복한 삶을 영위케 할 첩경이라는 이념으로 정선실업전문대학을 세웠습니다.”
국내 최초 여성만을 위한 전문대학이었다. ‘어머니 교육’을 온전하게 이행할 수 있는 목표와 방법을 마련해 정선실업전문대학을 설립했지만, 운영은 녹록지 않았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학생 모집에 한계가 있었다. 여성을 위한 실무 커리큘럼은 그대로 보존하되, 남학생까지 수용하도록 방향을 재설정했다. 그렇게 남녀 실용 중심의 남부대학교와 전남과학대학교가 탄생했다.
 
본문이미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다
 
조 학원장은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의 자세로 세상을 살았다. 실제로 그의 호는 ‘우암(愚巖)’이다. ‘어리석은 바위’라는 뜻이다. 이는 조 학원장의 가훈이자 교훈으로 삼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라’와 뜻을 함께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형과 나를 불러 세우고 빗물이 내리는 처마 밑에 손가락을 받쳐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손을 내리고 처마 밑에 있는 댓돌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 댓돌은 오랜 세월 빗방울이 떨어져 움푹 파여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위보다 강한 손가락으로 세상을 뚫고 나가라는 교훈이었습니다.”
손가락으로 큰 바위를 찌르고 찌르다 결국은 뚫었다. 우직함으로 성공의 길을 연 셈이다. 폐허가 된 땅 위에 친 천막 두 개로 시작한 학교는 옥과고등학교, 1990년 정선실업전문대학(전남과학대학교 전신), 1998년 남부대학교, 2002년 곡성 시니어클럽, 2005년 우암유치원 설립 등 유아원부터 4년제 대학까지 9개의 학교를 가진 종합교육센터로 발돋움했다.
그 과정에서도 암초는 있었다. 가장 큰 위기는 국민의 정부 시절 의 ‘사학법 개정’이었다. 당시 한국사학연합회장을 맡고 있던 조 학원장은 총대를 메지 않을 수 없었다. 사학법 개정안은 ‘학교 설립자는 설립자로 명예만 갖고 운영은 교사들에게 맡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조 학원장은 학교마다 설립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설립자의 정신이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생처음 삭발투쟁도 했다. 결국 개방형 이사를 4분의 1 정도 받아들이는 데서 매듭을 지었다. 조용기 학원장이 교육계에서 ‘사학의 대부요, 한국교육계의 초석을 놓은 분’이라 불리는 이유다. 조 학원장은 한국사학연합회장을 10년 동안 연임했다.
“학생들에게는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으라’고 가르칩니다.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예요. 학부모들에게도 ‘달걀이 깨어나 바위를 넘는다’고 말합니다. 달걀로 바위를 쳐서 이길 수는 없지만, 기다려서 병아리가 닭이 되면 바위를 넘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아이들을 다그치지 말고 기다리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열 번 된다’고 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에요. 다음 세대에 넘겨줄 사회적 재산입니다. ‘내 아이’라고 안달 내지 말고 기다리다 보면 결국 보배가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조 학원장의 자녀교육에도 묻어난다. 그는 슬하에 4남 1녀를 뒀다. 그중 둘째 아들 조성수 총장(전남과학대학교와 남부대학교)이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청년 시절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학교에 몸담고 싶으면 청소부터 시작하라고요. 3년간 변소 청소를 시켰어요. 그 3년 동안은 차 타고 교문을 통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걸으면서 쓰레기를 줍도록 했지요. 조교, 전임강사, 교수를 거쳐 총장이 됐습니다.”
 
본문이미지
남부대학교 도서관 전경.
 
 
건강 비결은 ‘감사하는 마음’
 
그는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난다. 20대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인간은 모든 재능과 조건을 다르게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시간’만큼은 평등하게 갖고 있지요. 남들보다 시간을 더 많이 쓰려면 시간을 앞서가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뭐라도 합니다. 강의 원고를 쓰기도 하고, 일기도 쓰고요.”
해가 바뀔 때 그해 쓴 원고를 쌓아 보면 40㎝ 정도 높이가 된다. 원고를 쓰다가 5시가 되면 일기예보를 틀어놓고 날씨에 맞는 옷을 챙겨 입는다. 그리고 집을 나선다. 걸으면서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머릿속에 있는 고민들을 치열하게 자문하고, 답을 구한다. 그렇게 학교까지 걷는다. 2㎞ 거리다. 생각만 하면서 걷는 게 아니다. 발에 치이는 쓰레기가 있으면 다 줍는다. 교문 앞에 커다란 쓰레기통을 가져다 놓은 것도 그래서다.
“학교에 도착하면 교정을 천천히 한 바퀴 돕니다. 그러면서 또 쓰레기를 주워요. 처음에는 학생들이 버린 담배꽁초를 주우면서 스스로 불평을 하게 되더라고요. 허리도 아프고 다 줍고 나면 손에 담배 냄새도 배니까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담배꽁초가 보물인 겁니다. 제게 할 일을 주는 거지 않습니까. 보물이다, 생각하고 주우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일과를 설명하다 “이게 어쩌면 내 건강을 지탱해준 힘이 아닌가 싶다”며 웃는 조 학원장에게 앞으로 더 이루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지금 이 나이에 더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욕심일 겁니다. 저는 제 인생에 후회가 없습니다. 훗날 하나님한테 칭찬받을 기대로 여생을 보내고 있어요. 다만 한 가지, 제가 세운 학교가 작지만 강한 대학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학교가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 의지를 가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진 그런 사람을 배출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국가에 힘이 되는 그런 인재 말입니다.”
 
Copyright ⓒ woman.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 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1. 메인으로
  2. 기사목록
  3. 맨 위로
글쓴이 :      비밀번호 : (숫자 4자리를 입력해주세요)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