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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de Veteran 4]서사로 노래하는 감성 소리꾼 장사익

2020-03-05 16:50

글 : 이상문 기자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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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좀 뜸하지만 한동안 그의 소리에 흠뻑 빠져 지낸 적이 있다. 장사익의 소리는 구성지다. 불규칙한 박자, 아니 무박으로 늘어졌다가 다시 휘몰아치곤 하는 소리가 매력적이다. 가슴을 울리는 서사가 그만의 소리에 얹혀 외줄 타듯 곡예를 한다. 70대에 들어선 지금도 아직 판을 접지 않았다.
‘먹는 TV’만큼이나 ‘노래하는 TV’ 열풍도 거세다. 노래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지나치다 싶다 할 만큼 난립한다. 트로트는 광풍 수준이고 케이팝, 세기말 대중가요, 클래식 등 장르도 다양하다. 최근에 합류한 MBN <보이스퀸>도 그 대열에 선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얼마 전 이 방송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노출돼 화제가 됐다. 유튜브도 들썩였다. 스페셜 초청무대에 출연한 장사익의 ‘소리’가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기 때문. 김형영이 만든 글에 장사익이 곡을 입힌 ‘꽃구경’이었다. 고려장을 치르려 노모를 등에 업고 산에 오르는 아들, 죽으러 가는 줄 알면서도 아들이 길 잃지 않도록 돌아갈 길에 솔잎을 뿌리는 어미. 구슬픈 해금 소리에 애절한 그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니, 세상 모든 어미들의 한결같은 모정이 보이고 회한에 목이 메는 자식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연재 칼럼 초대 손님을 찾던 중에 그 ‘꽃구경’ 이야기를 들었다. 수년 전, 뒤늦게 들은 뉴스에선 그가 성대 혹 수술을 받았다고 했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나 잠깐의 휴식기를 지내고 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소문 끝에 들은 얘기로는 목이 다시 심상치 않다고 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안부도 챙겨볼 심산으로, 10년 만에 그와 마주 앉았다.
 
올해 나이 71세. 10년 전 인터뷰 때가 환갑이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모습이다. 더 부드럽고 깊어진 미소, 더 윤기를 발하는 듯한 잘 정돈된 하얀 머리. 말하지 않아도 입을 열어도 그는 그 자체로 ‘광대’이고 ‘꾼’이며 ‘풍류’다. 전국 공연이 계속 이어졌지만 근래엔 멈추고 쉬는 상태. 그의 표현을 빌면 “병균(코로나19)이 창궐해서” 다 취소됐기 때문이다. 핑계 김에 모처럼 길게 놀고 있다며 그는 하얗게 웃었다.

“거기 기자님, 커피 식어유. 건배 먼저 하구 일해….”

촬영 장비를 세팅하는 사진기자를 챙기며 하는 소리는 큰형님을 닮았다. 집 대신 인터뷰 장소로 잡힌 사무실은 통창에 인왕산을 가득 품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그림 같은 풍경에 넋을 잃자 그가 넉살좋게 한마디 던졌고, 덕분에 비워두었던 실내의 한기가 부쩍 가시기 시작했다.

“겨울엔 눈이 와야쥬. 오신다고 해서 선물 준비했어유. 인왕산에 눈 좀 뿌렸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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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곳곳에 붓글씨다. 전시까지 했으니 이제 전문가 수준 아닌가? 그냥 한번 해본 거다. 꼬임에 빠져서.(웃음) 작년에 전문기획사에서 해보라고 해서 했는데 반응은 좋았다. 70점 냈는데 다 팔렸다. 수익금은 유니세프에 기부했다. 내가 앙드레김 선생으로부터 이어받은 유니세프 홍보대사다. 고맙게도 배우 안성기 씨랑 둘이.(웃음)

배운 적은 없나? 언제부터 어떻게 이런 취미를 갖게 됐나? 배운 건 없고 혼자 하던 취미를 발전시켰다. 15년 됐다. 내 맘대로 손 가는 대로 하는 거다. 전통 서예는 대개 중국 문인이나 시인의 글을 옮겨 한자로 쓰는데 난 한글이 좋다. 마음을 표현하고 공감하기에 훨씬 친근하다. 폼 잡지 않는 글이라 다들 좋아하는 것 같다. 그냥 낙서다. 나 좋자고 즐기는 글씨. 누가 선물을 보내오면 예쁜 포장지가 버리기 아깝더라. 거기에다 글을 써서 다시 선물로 드렸더니 좋아들 하셨다. 내가 뭐 줄 게 있나. 내 마음을 글로 넣어서 선물하는 거다.

배운 게 없는데 그렇게 잘 쓸 수가 있나? 노래처럼 타고난 걸까? 누구나 타고난 것들이 있긴 할 텐데, 내가 재능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엔 학교에서 펜글씨 수업을 받았다. 습자지에다 궁서체로 쓰는 거. 그래서 글씨의 기본기가 좀 있을 순 있다. 우리 세대는 그랬다. 다시 말하지만 그냥 낙서다. 즐겁게 하는 놀이, 낙서.
 
소리꾼 장사익은 지난해에 붓글씨 전시회를 열었다. 정동의 한 갤러리에다 70점을 수줍게 펼쳐 보였는데, 금방 동이 났다. 이때 전시회 제목이 <낙락장서(落樂張書)>. ‘낙서를 즐기는 장사익의 글씨’라는 의미로 만든 제목이었다. 글씨를 쓴다는 건 황홀한 고통이라고 말했던 그. 고통스럽지만 즐겁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꿈을 꾸되 그 꿈으로 가는 길이 험하고 힘들어도 피하지 않고, 물 흐르듯 즐겁게.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다.

천생 소리꾼으로만 살 사람으로 알았다. 다른 분야에 대한 욕심도 강한 편인가? 그냥, 살면서 옆길로 한 번씩 가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나 생각하는 거다. 꿈꿔왔던 걸 해보는 거, 맘먹고 도전해보는 거, 그런 게 사는 재미 아니겠나. 내게는 노래하는 게 큰 꿈이었지만 다른 것들도 있었다. 환갑 되기 4~5년 전에 오래전부터 꿈꾸던 목표를 정했다. 마라톤 완주였다. 환갑 선물로 나 자신에게 주려고 결심했다. 5㎞ 코스부터 시작해 결국 중앙일보 마라톤에서 완주했다. 그다음이 붓글씨였는데, 내겐 스승 격인 김대환 선생이 쌀알에다 글씨 쓰는 게 신기했었다. 그분은 평생 쌀에다 반야심경을 쓰고 또 썼다. 너도 한번 해보라고 해서 시작했다가 취미 붙였다. 디자이너 이상봉이 옷에다 한글 디자인 처음 입힌 거, 그때 그 글씨가 내가 한 거였다. 난 절차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놈인데 재미로 하다 보니 이래저래 무임승차하는 게 많다.(웃음) 눈썰미 있는 사람한테 발견돼서 그런 것들이니까 다 운이 좋아서 이나마 행복하게 살아가는 거다.

살아온 인생을 봐도 말한 걸 들어봐도, 장사익은 행복을 좇기보다 맞이하는 사람 같다. 이게 맞는 느낌인가? 꿈을 꾸고 산다. 꿈꾸니까 되더라. 돈 버는 걸 떠나서 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 꿈꾸고 노력하고 이뤄내는 거, 그게 행복인 것 같다. 마라톤 완주를 회갑 선물로 하고 나서 이후론 안 했다. 그거 하고 몇 달 동안 뭔가 이상하게 넋이 빠진 듯하고 힘도 없었다. 골목 돌아다니면서 걷기 운동은 했지만 마라톤은 끊었다. 마라톤을 하는 게 그냥 욕심이었다면 계속 매달렸을지도 모르지. 욕심 때문에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내가 즐거운 걸 하면 행복이다. 난 그냥 좋아하는 걸 하는 거다. 지금은 그냥 골목 걷기가 좋다.

정식으로 배우기보다 혼자 즐기는 걸 좋아하나? 실상 노래도 그렇게 시작한 건가? 거의 다 혼자 시작한 건 맞다. 음악도 전공자가 아니었고 그냥 좋아서 시작했다. 박자도 없는 노래를 그냥 내 멋대로 흥얼흥얼하다 이렇게 여기까지 왔다. 사람들이 갸우뚱하면서도 재미있어하니깐 나도 더 즐기며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렇다고 음악 교육을 하나도 안 받은 건 아니다. 상고를 졸업했다. 3학년 2학기라 다른 친구들은 다 취업 나가고 교실이 거의 텅 비었다. 난 그때 종로 화신백화점 옆 학원에 가서 노래를 배웠다. 시골에서 자랄 때 목소리가 좋아 웅변을 좀 했었다. 목소리를 믿고 가수가 되고 싶었다. 3년 동안 빠듯하게 유행가만 배웠다. 당시 대중가요 중에 안 불러본 노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멈췄나? 예를 들어 ‘가슴 아프게’라는 노래를 부른다 치면 음정과 리듬, 호흡, 바이브레이션까지 다 따라 하며 배웠다. 그런데 내가 재능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막연하게 가수가 될 생각으로 대들긴 했는데, 나보다 쟁쟁한 가수가 너무 많았고 나는 한참 모자란 듯 느껴졌다. 진짜 가수가 되려면 노력뿐 아니라 투자가 돼야 하는데, 자금력이나 기획력이나 받쳐주는 게 없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점수로 치면 50점 이하 가수 지망생이었을 거다. 결국 군대 가서 3년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내고 제대 후엔 ‘내 인생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20년 넘게 이런 직업 저런 직업을 떠돌며 직장생활을 했는데, 직업 가수에 큰 미련은 없었다. 워낙 제 분수를 아는 성격이었다.(웃음) 마음이 열 개라면 한 개 정도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길 잘했다고 자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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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취미로 태평소와 대금, 단소 등 국악기를 배우며 지냈다. 국악 판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가끔 연주에 참여하고 뒤풀이에도 얼굴을 내비쳤다. 그저 ‘내가 즐기기 위해’ 음악 주변을 어슬렁거렸을 뿐이다. 그러나 마치 운명처럼 그에게도 뜻하지 않은 기회가 왔다. 뜻하지 않은 계기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그 역시 무의식중에 필연적인 기회를 기다렸을지 모른다. 그의 주변엔 이미 미래의 장사익을 만들어내기에 족한 기인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 타악 연주계의 대가 김대환과 임동창이 그들이었다.

노래를 시작하는 데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이 김대환 선생이라 했다. 무슨 영감을 준 것인가? 그분은 박자가 없다. 열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채를 끼우고 북을 쳤다. 그냥 막 치는데 그게 다 음악이다. 프리 뮤직이다. 국악 판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불던 시절, 연주 때나 뒤풀이 때 꼽사리 껴서 그들과 같이 놀았다. 목청은 좋고 노래도 좀 했으니까 서슴없이 어울려 놀았다. 선생이 나를 눈여겨봤는지 앞으로 불러 노래 한번 해보라고 했다. 동요 ‘송아지’를 불렀다. 듣다 말고 “박자 맞추지 말고 다시 불러보라”고 하셨다. 다시 불렀더니 “너 인마, 속으로 박자 세고 있잖아!”라고 역정을 내더라. 깜짝 놀랐다. 그때 깨달음이 왔다. ‘아, 이거구나…’ 싶었던 날이었다.

박자를 놓는 장사익만의 소리는 그때부터 만들어졌다. 틀에 갇히지 않은 돌연변이 같은 소리여서 오히려 묘한 호응을 얻었다. 늘 변하는 소리여서 완제품이랄 것이 없다. 때마다 다르다. 이야기하듯 서사를 풀어내는 그의 소리는 따로 악보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다. ‘봄날은 간다’가 그랬고 ‘찔레꽃’도 ‘님은 먼 곳에’도 그의 가슴과 성대를 통하면 새롭게 만들어졌다. <보이스퀸>에서 오랜만에 공연된 ‘꽃구경’은 노래라기보다 차라리 판소리나 시 낭송에 가깝다. 노랫말이 슬픔을 자아내지만 그의 구성진 소리가 없다면 객석의 호응이 그리 크진 않았을 듯.

김대환 선생이 영감을 주었다면, 그를 대중 앞에 내세운 이는 친구 임동창이었다. 당시엔 그 역시 무명이었다. 임동창은 박자를 풀었다가 묶었다가 제 맘대로 요리하는 친구를 보고 감탄했다. 장사익이 직접 만들었다는 곡 ‘찔레꽃’을 들어보고는 결심한 듯 그의 등을 떠밀었다.

“임동창이가 괴짜거든요. 걔도 나도 무명일 때였는데, 나더러 자꾸 한 판 놀아보자고, 나가보라고 꼬셨죠. 마지못해 나 피아노 걔 북 하나씩 놓고 시작했어요. 여기까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그래서 세상은 묘하고 살 만해요.”

박자를 파괴하는 음악은 하는 이도 어렵지만 듣는 이도 생소하고 난감했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고 난 뒤, 언젠가 예술의전당에서 클래식과 콜라보 무대를 올릴 때였다. 듣기엔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연이었지만 당사자들은 시쳇말로 ‘멘붕’이었다. 장사익은 박자가 없는 노래를 해야 했고 오케스트라는 그래서 난감했다. 약속된 악보가 불분명하니 생소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소리꾼 장사익이 소리를 내면 반주가 그걸 따라 맞춰가는 식이었다. 박자를 풀었다 묶었다, 묶었다 풀었다 하길 수차례. 객석은 당황했다. 어디쯤에서 감동해야 할지 어느 대목에서 호응을 해야 할지 애매했던 것. 그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나라도 그랬을 거야. 박수 칠 구멍이 없으니 난~감하쥬”라며 웃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파바로티를 최고의 서양 소리꾼으로 꼽았다. ‘베스트 18’ 카세트테이프를, 20년 동안 매일 아침마다, 밥알을 꼭꼭 씹듯 따라 불렀다. 파바로티를 존경하는 이유를, 그렇게 연습해야만 했던 이유를, 그는 유난히 길게 설명했다.

파바로티의 천재적 재능이 부러운 건가? 아니면 전공자가 아님에도 끝내 성공한 노력을 높이 사는 건가? 내가 전공자가 아니고 음악으론 무학이라지만, 코르위붕겐 악보 공부도 했고, 발성 연습도 한 사람이다. 작곡만 몰랐지 나머진 다 해봤으니 기본기는 있었던 거다. 더 깊게 공부하진 못했지만 그때 경험이 몸속에 녹아 있다. 국악을 한 것도 녹아 있고 가요를 한 것도 스며들었을 거다. 뭐든지 그냥 저절로 갑자기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니 교육은 필요하다. 창의적 천재성이 중요하긴 하지만, 아무 경험이나 도전 없이 좋은 결과를 내기란 힘들다. 기본기도 경험하고 끝없는 실험을 해봐야 맛을 제대로 안다. 피카소 같은 미술 대가들을 보자. 눈을 위아래로 여기저기 뒤죽박죽 갖다 붙인다. 나라도 하겠다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점 하나를 찍기 위해 수만 번 생각하고 수천 번 연습했으리라는 걸 알아야 한다. 피카소도 이두식 선생도 데생을 엄청 잘한다. 그런 기본기가 있고 나서야 추상으로 가더라도 영감 있는 작품이 나오는 거 아니겠나. 나도 물감을 쫙 짜서 뿌리면 작품이 될 듯해서 해봤는데 영 아니더라. 뭔가 비어 있다는 걸 나는 안다.(웃음) 노래도 마찬가지다. 교육이나 경험이나, 그런 과정이 없었다면 뭔가 비어 있는 듯하고 남들한테 잘 보여도 스스로 용납이 안 됐을 것이다. 갑자기 나오는 건 없는 것 같다. 기본과 과정이 축적되어야 뭔가 채워지고 나오는 거다. 벼락같이 뜬 건 갑자기 사라진다. 파바로티 음악은 이름 알 만한 성악가 누굴 갖다 붙여도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거기엔 끈질긴 발성이 뒷받침돼 있다. 사람마다 성음이라는 게 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성음은 다 다르다. 타고나는 건데, 그래서 이미자나 조용필 같은 가수의 매력적인 성음은 아무도 똑같이 따라 할 수 없는 거다. 그런데 그 음색이 아무리 잘해도 매력이 없는 게 있다. 반대로 멋지지 않아도 매력 있는 성음이 있다. 얼굴도 그렇지 않나. 잘생겼다고 무조건 매력 있는 거 아니다. 결론은 성음은 계속 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훈련을 해야 안정되고 매력도 더해진다. 깎을수록 영롱하고 예뻐지는 보석처럼, 성대도 갈고닦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사익 노래는 독특한 장르다. 제2, 제3의 장사익을 키울 생각은 없나? 그런 거 안 한다. 그래야 내가 계속 먹고살지. 농담이다.(웃음) 젊은이들한테는 그게 안 보이는 것 같다. 랩은 몰라도 서사적인 노래가 안 보이고 안 팔린다 생각하는 것 같다. 선생님이 너무 많은 시대다. 지적도 옳고 좋은 충고도 너무 많다. 잘 새기고 열심히 하면 된다. 관건은 꿈만 꾸지 말고 움직이는 거다. 기술과 재능으로만 되는 건 별로 없다. 내실로 채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계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온다지만, 사람의 지혜와 노력은 계속 필요하지 않겠나. 노래는 특히 사람 냄새가 나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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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두 번 팬카페 모임이 열린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빠지지 않는다. 지난 연초엔 그가 조그만 이벤트를 기획했다. 조그만 쪽지에 토정비결의 운수풀이 글귀를 붓글씨로 써 넣었다. 물론 저마다 희망적인 꿈을 가질 수 있도록 좋은 얘기만을 골랐다. 150명 분량을 직접 써서 똘똘 말아 1000원씩에 팔았다. 우스개 장난으로 한 일인데 너무들 기뻐했다.

“꿈을 써놓고 희망하는 걸로 끝내면 이런 건 휴지 조각에 불과합니다. 꿈을 위해 겸손하게 노력해야 이루어집니다.”

이벤트 마무리에 그는 그렇게 말했다. 노래하는 게 꿈이라는 어떤 이에겐 “10년 연습하면 돼요. 끊임없이 움직이면 됩니다”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70대를 맞으며 <자화상 七(칠)> 무대를 올렸다. 80대와 90대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나? <자화상 七> 공연 때 말 그대로 나를 거울에 비춰 보았다. 80, 90대에 새로운 시도랄 건 없을 거다. 있던 대로 유지되는 것만도 고맙지 않겠나. 머리가 나빠서 더 연구해낼 것도 없다.(웃음) 그래도 힘이 있는 한 노래는 할 테고…. 그래서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 생각해보긴 했다. 결론? ‘늙은이니까 늙은이처럼 노래하자’다.(웃음) 나이 들어 열광적인 춤을 추고 고음으로 혈압을 높이는 건 안 어울리지 않겠나. 힘주지 않고 편하게 노래하기로 했다. 더 늙어 외모나 음색이 볼품없어지더라도, 끝내 진정성 있는 소리를 낼 수 있다면 좋겠다.

외모나 음색이 변하더라도 서사는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그럴 것 같다. 오늘도 인터뷰하러 여기 오는 동안 시 한 편을 봤다. ‘뒷짐’이라는. ‘한 손이 외로워서 가기가 힘든 모양… 두 손을 맞잡고 가야 하네…’. 시를 쓰듯 내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며 노래하고 싶다. 캐나다에 코헨이라는 가수가 있었다. 그분은 늘 가장 낮은 저음으로 노래하는 분이었다. 그냥 이야기하듯이. 멋있었다. 나도 그런 걸 하고 싶다.

서사를 노래하는 소리꾼 장사익은 자신을 어릿광대라고 표현한다. 감성풍류인이기도 하다. 마음대로 내는 소리니 악보가 필요 없다. 작곡할 때도 악보 기록이 아닌 녹음을 택한다. 다시 듣고 연마하고 또다시 듣고 다듬는 식이다. 악보를 쓰든 녹음기를 쓰든 노래만 만들면 되지 않냐고, 버스로 가든 기차로 가든 서울로 가면 되는 거 아니냐며 웃는다.

그간 무대가 수없이 많았다. 언젠간 해보고 싶은 ‘꿈의 무대’랄 게 있나? 언젠가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환경 관련 공연이 있었다. 나미비아 사막 관광을 갔는데 거대한 모래언덕이 감탄스러웠다. 그런 곳에서 환경 캠페인 메시지를 걸고 콘서트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합창단이랑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는 무대를 상상했었다. 또 하나는, 우리가 통일이 된다면 휴전선 철책선을 끊고 할리 데이비슨 같은 모터사이클 수백 대가 휴전선을 통과하는 그림이다. 합창단과 함께 부르는 웅장한 ‘아리랑’이 세계에 울려 퍼지는 무대를 그려봤다. 신의주까지 모터사이틀 행렬이 이어진다면 얼마나 멋있겠나. 역동적인 노래와 움직임, 상상하면 즐겁다.

인생 중반에 뒤늦게 노래하는 가수가 됐다. 다시 태어난다면 온전히 무엇을 시작하고 싶은가? 산다는 것은 ‘길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늦었지만 25년째 노래하고 있는 걸 보면, 난 내 길을 찾은 거구나 생각한다. 노래할 때가 정말 행복하다. 목수를 할 때도, 보험회사 다닐 때도, 카센터 할 때도 좋았다 한들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배고픈 것처럼 노래가 늘 고프다. 그러니 다시 태어나도 지금 제일 좋아하는 이 길을 선택할 것 같다. 이번 생과 하나 다른 것은, 미리부터 준비하고 노력해서 더 좋은 예술인이 되는 거다.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사람, 그런 선물을 남기는 소리꾼이 되고 싶다. 우리 어머니가 예전에 “너, 전생에 기생이었다”고 한 적 있다. 기를 살리는 기생이라면 맘에 든다. 사람을 울리고 웃기고 기분 좋게 해주는 지금의 어릿광대 역할도 좋다. 전생도 현생도 이렇다면 내생도 그 팔자대로 살면 좋지 않겠나. 더 제대로 된 예술인으로.
 

인터뷰는 끝나가고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촬영을 준비하는 사진기자를 또 불러 군고구마와 강정을 권하는 그. 늘 사람을 따뜻하게 배려하고 기분 좋게 해주는 백발의 어릿광대다. 예전 같으면 ‘뭘 그런 걸 다 물어유~’ 했을 질문에도 답이 쉽다.

“머리?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지. 머리 나쁘고 쓸 일도 없으니까 안 빠지나 봐요.”

“하는 거 없어서 잠 많이 자요. 10시면 자. 컴퓨터도 모르고 TV도 모르고 스마트폰도 모르니깐, 글씨 쓰고 라디오 듣고 잠자고 걷고… 그게 다여. 멍청하게 멍 때리면서 놀아요.”

“스트레스? 그딴 거 난 없지. 만날 즐긴다는 생각을 하니깐. 내가 이제 울 아버지 나이 또래가 됐는데, 지금 유행가 부르고 다니면서 박수 받고 먹고살고, 얼마나 행복한 일이여? 옛날 같으면 뒷방에 쭈그리고 앉아 곰방대나 빨고 있을 나이인데… 안 그려요?”

“아들? 둘 다 국악 하잖아. 대금. 밥만 먹고 살아요. 딱 그만큼. 반찬은 그리 잘 먹진 못하는 것 같던데, 이놈들이….”(웃음)

“손주도 봤지. 벌써 고등학생인데, 키가 엄청 커요. 공부는 꼴등이지만. 하하하.”
 

눈 내린 겨울날 인왕산 화폭에 앉은 장사익. 노래 없이도 취하게 하는 그의 인생 서사에, 꽤 오래 그 좋은 풍경을 놓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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