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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해서 빛난다 엄태구

2019-11-16 13:54

취재 : 이근하 기자  |  사진(제공) : CGV 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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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히려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야 설명이 되는 배우다. 보여주고 말하는 게 다 진짜인 사람. 배우 엄태구의 연기는 곧 ‘그’다. 영화 <판소리 복서> 속 복싱을 간절해하던 주인공 ‘병구’와 매 작품 자신을 쏟아붓는 엄태구가 겹쳐 보이는 이유다.
원래도 살집이 있는 배우가 아니라지만 유난히 마른 듯했다. 핼쑥한 뺨은 그가 말할 때마다 더 파일 것만 같았다. 전력을 다했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엄태구는 극 중 ‘병구’를 닮아 있었다.

병구는 영화 제목처럼 판소리 장단에 맞춰 복싱 스텝을 밟는 ‘판소리 복서’다. 어수룩한 표정과 몸짓은 민첩한 움직임이 절로 떠오르는 복싱과 어울리지 않건만, 그 동떨어짐이 괜스레 기분 좋다. 굵은 선의 얼굴과 낮은 목소리를 가진 엄태구에게서 예상치 못한 여린 모습을 발견한 때의 반가움이랄까.

“어쨌든 제가 연기하는 거니까 제 안에서 다 나온 거예요. 배역과 가장 비슷한 저를 찾아 결합시켜 만들어낸 게 그 캐릭터 같아요.”

그의 말대로라면 답변마다 진심을 꾹꾹 눌러 차분히 얘기하는, 병구와 꼭 닮은 엄태구는 곧은 사람이다.

본인 작품인데 어떻게 봤어요. 재밌게 봤습니다.(웃음) 웃기면서 짠하고 이상하면서 슬프기도 하고. 되게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졌어요. 아무래도 복싱 촬영이 힘들었는데, 고생한 보람도 있었어요.

이상하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캐릭터) 조합부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웃음) 재밌으면서도 슬픈 것 같으니까. 어쨌든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와 감정들이 아닌가 싶어요.

이전 배역들로 미뤄보아 어떤 코믹 연기를 해낼지 상상이 안 됐어요. 제가 뭘 했다기보다 감독님이 재밌는 요소들을 잘 놓아주신 것 같아요. 일부러 웃기려고 한 적은 없어요. 최대한 진지하게 제 할 도리를 하면 이 장면이 되게 재밌으면서도 슬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임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지금 병구랑 있는 기분이 드네요. 욕하시는 거예요?(웃음) 농담입니다.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극 중 복싱을 너무나 간절해하잖아요. 엄태구의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있었나요. 연기를 너무 하고 싶은데 일이 안 들어왔을 때요. 간절함과 동시에 내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도 있었고, 적성과 안 맞나 하는 의문도 들었어요. 여전히 무섭고 걱정되지만 한 작품 한 작품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저 역시 병구처럼 최선을 다해서 사는 중입니다.

‘판소리 복서’는 참 낯선 역할이에요. 그런 역할을 연기할 땐 부담감이 제법 들 법도 해요. 어느 작품을 하든 부담감은 다른 색깔로 항상 존재해요. <어른도감>, <밀정>, <택시운전사> 모두 부담 그 자체였죠. 떨리고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 무서운 느낌. 이번 작품에서 (‘판소리 복서’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걱정한 건 단 하나예요. 복싱을 직업으로 하시는 분들이 보셨을 때 “뭐야, 저거 다 가짜잖아! 이상한데?”라고 하시면 아무리 제가 열심히 해도 아닌 거잖아요. 그래서 목표를 되게 높게 잡고 시작했어요. 코치님껜 선수분들이 봐도 제 자세가 진짜 선수 같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선지 몸이 굉장히 마르게 나와요. 복싱은 정말 대단한 운동이더라고요. 한순간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발도 손도 몸도 계속 움직여야 해서 한 테이크만 가도 실신할 것 같아요. 체력 소모량 때문에 거의 뼈밖에 없는 상태가 절로 된 거죠. 진짜 선수분들 몸처럼 보이고도 싶었고요. 운동선수들 정말 존경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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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료들이 말하는 “심약한 사람”, “바른 사람”

외모에서 전해지는 일차원적 분위기만 두고 본다면 이전에 연기한 선 굵은 배역들과 이질감이 없다. 이를테면, <밀정>의 일본 경찰이나 <택시운전사>의 군인 연기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니 말이다. 그런데 아는 사람은 안다. 배우들 사이에선 “심약한 사람”이라고 통할 정도로 수줍음이 많고 낯가림이 심하다. 조인성은 <안시성> 홍보 당시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엄태구와 함께 출연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심신이 미약해서”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한 시간 남짓 바로 옆에서 본 엄태구는 조인성의 얘기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병구는 복서로선 치명타인 펀치드렁크(뇌세포손상증)를 앓고 있어요. 배우인 엄태구의 치명타가 문득 궁금합니다. 다들 현장에서 잘 어울리고 이야기도 많이 하시는데 저는 말주변도 없고 ‘내가 저 앞에 어떻게 서서 연기를 하나’ 긴장을 엄청 해요. 말도 못 하는 내가 정말 이 직업과 맞는 건가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극복 중인 건가요. 네. 그걸 처음으로 풀어주신 분이 송강호 선배님이세요. 저는 술을 못 마시니까 술자리에서 한마디도 못 하고 앉아 있는데, 선배님이 저를 계속 불러주세요. 옆에 앉혀주시고 적응할 수 있도록 말도 붙여주시고. 선배님 덕분에 술자리가 낯설지 않아지기 시작했어요. 이런 표현 안 좋아하실 수 있는데 영화계의 아버지 같으신 분이죠.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저렇게 해도 다 받아주시고. 자신감을 갖게 된 게 선배님 덕분이라 선배님 생각만 하면 감사한 마음이 가장 커요.

동료들 평판이 아주 좋아요. 바르고 자기관리를 잘한다고요. 한지민 씨가 말하길 캐나다까지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안 자고 성경을 읽더래요. (웃음) 그건 선배님이 오래 주무셔서 그렇지 저도 잤습니다. 진짜 바른 사람은 한지민 선배님이에요. 송강호 선배님도 그러셨지만, 한지민 선배님은 지금까지도 구석에 앉아 있는 절 보시면 “태구 씨 이리 와요” 하면서 챙겨주세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최고로! 닮고 싶은 선배님입니다. 저는 바르지 않아요.(웃음) 바르게 살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어요. 사실 ‘바르다’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웃음) 사람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엇나갈 때도 있고 여러 가지 일이 생길 수 있는데 최대한 반성하고 기도하면서요.

평소에도 이렇게까지 쑥스러워하고 차분해요? ‘어떤 나를 보여줘야지’라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아요.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제 안에 있는 모습. 이러다가도 혜리(극 중 상대역을 연기한 배우) 씨가 옆에 있으면 같이 “오~ 오~” 하게 되고 형 만나면 “아, 뭐 어쩌라고!” 이렇게 돼요. 다중인격자는 아니고(웃음) 꾸미려고 하지 않아요. 지금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상에선 엄태구에 대해 ‘입덕을 하면 출구가 없다’고도 해요. 스스로 생각하는 매력은. 그 문구는 회사에서 아주 고민해서 만든 것 같고요.(웃음) 감사합니다. 제 매력은… 뭔가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러운데.(웃음) 쉽지 않지만 최대한 진실하게 연기하려고 해요. 제가 진짜 슬퍼서 눈물이 나면 보시는 분들도 정말 슬플 것 같거든요. 진짜로 채워나가는 부분들, 저를 좋게 보시는 분들은 그런 점을 봐주신 게 아닐까 해요.

엄태구의 연기에서 목소리를 빼놓을 수 없어요.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는가 하면 두 시간 동안 이 목소리를 어떻게 듣느냐고 하는 분들도 계세요. 근데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일단 제가 할 것에 최선을 다해서 마치고 나머지 부분은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라마 <구해줘2> 종영 인터뷰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 기준은요? 보시는 분들이 제가 표현하는 감정대로 느끼시는 거요. 그게 항상 잘 안되고 무너지는데, 잘되면 정말 보물을 얻은 것 같아요. 작품마다 보물을 많이 채우고 싶습니다.
 

# 감독 엄태화의 동생, 배우 엄태구의 형

엄태구와 영화감독 엄태화는 형제다. 엄 감독의 이야기가 나오면 짓는 심드렁한 표정은 되레 두 형제의 끈끈함을 짐작하게 했다. 깊숙이 자리한 애정과 믿음, 고마움이 그의 답변에서 여실히 묻어났다.

형(엄태화 감독)이 동생 출연작을 다 봐요? 티는 안 내는데 유심히 보고 있지 않나….(웃음)

이번엔 어땠다고 해요? “재밌는데”래요.(웃음) 그렇게 말하면 진짜 재밌게 본 거거든요. 저희는 항상 냉정합니다! 그래도 형은 저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부분이 많아서 고맙죠.

부모님 입장에선 뿌듯할 일 아닌가요. 요즘엔 뿌듯해하시는 것 같은데 한때는….(웃음) 저희를 보시면서 “쟤네가 뭐 하려고 저러나”. 한 명은 감독 한다고 하지, 또 한 명은 배우 한다고 하지. 되게 걱정하셨을 텐데 계속 응원해주는 모습이 짠했어요. 감사하고. 지금은 부모님을 시사회에 초대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영화 보고 자랑스러워하시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어요.

류승완, 류승범 형제처럼 엄태구 형제의 시너지를 기대할게요. 모르겠어요. 롤모델 같은 형제분들이 계신 덕에 큰 힘이 되는 건 맞아요. 뭔가 마냥 좋고 영광이에요. 저도 류승범 선배님처럼 잘하고 싶습니다.

올해 마무리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에요? 영화 <낙원의 밤>을 끝내야 올해가 끝납니다. 12월에 크랭크업이거든요.(웃음) 그 작품까지 무사히 마치는 게 가장 큰 목표예요.

가만 보니 말수가 적다면서 꼭 그렇지만도 않네요. 길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웃음) 질문 주실 때마다 감사해서 최대한 제가 답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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