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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아름다움, 정영주

2019-09-06 09:52

취재 : 이근하 기자  |  사진(제공) : 장호  |  스타일리스트 : 민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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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주위에 발산하는 기운을 두고 ‘오라(Aura)’라고 한다. 배우 정영주의 오라에는 단단한 데가 있다. 여배우에 거는 대중의 기대감을 좇기보다 스스로 정한 기준을 흔들림 없이 따르는 견고함이다. “눈을 감고 느껴지는 에너지가 예쁜 사람이 정말 예쁜 것”이라는 그의 대답에서 ‘정영주 오라’의 원천을 찾았다.
“후~. 방금 막 운동을 하고 왔더니 되게 덥네요.”
선풍기 앞에 서서 머리칼을 털어내는 정영주의 탄탄한 구릿 빛 팔뚝이 아름답고 건강해 보였다. 드라마 <황금정원>과 <열여덟의 순간>을 번갈아가며 촬영 중인 터라 피곤한 기색을 드러낼 법도 하건만, 시종일관 힘을 쏟아냈다. 문득, 드라마 <열혈사제>에서 표현한 구담구청장의 무게감이 떠올랐다. 꼭 연기만은 아니었으리라. 그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전해지는 특유의 힘에 기분 좋게 압도됐다.
 

미의 기준? ‘나답게’

정영주는 대중이 입을 모아 꼽는 ‘예쁜 배우’와는 살짝 거리가 있다. 카메라 화면 속 정형화된 외모 기준에 맞추면 들어맞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작 그는 개의치 않는다. 정영주의 기준이라면 그는 충분히 예쁜 배우이니 말이다.

“기준을 무엇에 두느냐 차이 같아요. 만약 전 세계 미의 기준이 비욘세라면 저는 거기에 맞는 사람이에요.(웃음) 근데 어떤 미의 기준이든 누군가에게 두고 맞추는 건 서글프잖아요. 부모님이 자식을 만든 타이밍, 유전자 등이 다 다른데 어떻게 하나의 기준에 맞춰 예쁘고 예쁘지 않고를 이야기할 수 있나요. 가장 나다운 게 기준이라고 생각해요.”

외모에 관한 지적 댓글이 많다고 했다. 과거 몇몇 선배는 “난 네 몸매면 그런 옷 못 입고 다닌다”면서 핀잔을 주기도 했단다. 그의 반응은 하나. “뭐 어때, 이게 나인데.”

“오늘처럼 민소매 입고 나오면 팔뚝 살 신경 쓰이죠. 이걸 수술할까, 자를까 할 때도 있었는데(웃음) 결국 타고난 제 몸인걸요. 관리를 안 한다는 게 아니라 굳이 다른 사람 눈에 맞춰 내 팔을 가리진 않는다는 거예요. 난 소중하고 이건 내 몸이죠.”

촬영이 아니고선 평소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다. 무대 공연을 하다 보면 꽉 끼는 코르셋을 착용하는 경우가 있어 그 외의 시간에는 몸에 자유를 주고 싶어서다. 친정 엄마가 유방암 수술을 두 차례나 받으면서 생긴 속옷에 대한 강박관념도 지울 수 없었다.

“여성 속옷은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을 미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등장한 거예요. 브래지어를 모두에게 강요하진 않았으면 해요. 가슴 밑에 철사를 두고 다니는 게 좋은 것만도 아니고. 가끔 왜 안 입느냐고 묻는 남성들이 있으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네 팬티에다 와이어 달고 입으라면 입을래?’ 그건 싫대요.”(웃음)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의상을 부담스러워하던 때도 있다. 스물한 살, 에어로빅을 처음 배우러 간 날 몸매를 다 감추는 벙벙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강사는 근육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면 수영복처럼 딱 붙는 옷을 준비하라고 했다. 덩치가 큰데 그렇게 입어도 될지 염려스러웠다. 웬걸, 월등한 에어로빅 실력 덕분에 1년 가까이 트레이닝을 받고 강사 자격증까지 따냈다. 그러다 보니 몸매나 차림이 창피하다는 생각은커녕 자신감이 붙었다.

“에어로빅 옷 입고 첫 뮤지컬 오디션을 보러 갔었어요. 안무 시험이 있으니 안무하기 좋은 복장을 입고 오라는데 제가 발레나 무용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니까. 사람들이 절 보고 뜨악하더라고요. 근데요, 뽑혔어요. 하하. 그러고서 1년 뒤에야 안 사실인데 스태프 시키려고 뽑았다가 (연기를) 곧잘 해서 배우를 시킨 거라네요.”(웃음)

근래 드라마에 얼굴을 자주 비치는 그이지만 뮤지컬계에선 이미 실력으로 정평이 난 25년 차 베테랑 배우다. 지난 1월엔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당시 그는 “스태프같이 생긴 게 3년을 버텨서 25년을 걸어왔습니다. 혹시 저를 롤모델로 삼고 있는 후배들이 있다면 끝까지 버티세요. 이런 날이 오네요. 사실 저는 여우주연상을 60살에 받고 싶었거든요. 지금 받아도 좋네요”라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 정영주의 표현처럼 “배우 노릇 하기에는 보편타당하지 않은 외모”로 지나온 시간이 결코 쉽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외모로 인한 배역 제한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있죠. 일단 주인공은 못 하고요.(웃음)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지고 갈 수 있는 여자 주인공의 포맷은 굉장히 정형화돼 있거든요. 저 같은 캐릭터가 주인공을 할 수 있는 작품이 있긴 해도 비상업적이라든가…. 그래도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이라면 그게 한 장면이든 두 장면이든 덤비고 보자였기 때문에 분량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한 장면에 나와도 그 이유가 타당하면 상관없어요. TV 속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티켓파워를 배제할 수 없는 시대가 되면서 제 선택만으로 작품, 역할을 가져올 수 없는 경우도 생기지만 그걸 받아들이니 제가 할 수 있는 게 계속 생겨요. 그렇게 무대에서 25년을 채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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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 블라우스는 빅토르 앤 롤프. 블랙 슬리브리스 슬릿 드레스와 슈즈는 자라.

6년 전 이혼, 달라진 일상

정영주는 6년 전 남편과 헤어지고 열여덟 살 아들과 지내는 중이다. 그때만 해도 ‘이혼’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일뿐더러 가정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몸에 새긴 타투 중 하나는 그 흔적이다.

“다른 사람은 잘만 지내는 걸 나는 왜 못하는 건지 너무 힘들었어요. 지인 결혼식을 피하기도 하고. 내 가정도 못 지킨 사람이 남의 결혼식에 가서 어떻게 축하를 해주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요. 이젠 시간이 좀 지나서인지 괜찮네요. ‘나는 실패했지만 너희는 건강하게 잘 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니까.”

이혼을 하고서 마주한 가장 큰 변화는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 맏며느리로서 챙겨야 할 집안 대소사가 많았던 만큼 배우로서 할애할 시간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이혼 뒤 처음 맞은 명절 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을 정도로 일상이 변했다.

“그동안 못 했던 걸 했어요. 원래 책 읽고 영화 보고 분석하고 그걸 사람들과 나누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독서할 시간도 영화를 볼 시간도, 나에게 공들일 수 있는 시간들이 많아졌어요.”

공들이는 시간에서도 아들과 보내는 순간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촬영이 없는 날이면 아들과 함께한다. 전날도 영화를 보고 왔다며 아들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일상을 스스럼없이 공유하는 살가운 아들이라고.

“아이가 엄마랑 대화하는 걸 좋아해요. 저는 늘 말해요. 선입견을 갖지 말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다른 부분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제대로 된 남자는 엄마가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봐요. 엄마를 통해 여자라는 걸 알게 되잖아요. 엄연히 여자와 남자는 다르다는 점을 이해시키려면 엄마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아요.”

아들의 이성교제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의 연애 소식이 궁금해졌다. 올해 초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연애의 맛>을 통해 만난 남성과의 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연애) 안 하진 않죠. 연애 중요해요. 사람이 사람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거든요. 교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응원하고 응원을 받아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연애는 배우라면 더더욱 필수라고 생각해요. 다만 연애를 열심히 하는 만큼 혼자 있는 시간도 유지하는 게 필수고요. 일종의 균형이죠.”
 

배우 안성기처럼 근사하게 늙고 싶다

그는 내내 망설임 없이 이야기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이미 답한 내용에 대해 되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배우’, ‘엄마’, ‘여자’ 정영주에겐 흔히 말하는 자신감 이상의 무언가가 흘러나온다.

“어제 아들이랑 본 영화 <사자> 속 장면인데 눈이 먼 채로 무당인 된 아이가 점을 보러 온 상대를 에너지로만 느끼더라고요. 그 에너지라는 게 참 대단해요. 개인적으론 에너지가 예쁜 사람이 정말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눈, 코, 입은 세월이 지나면 다 시들해진다지만 에너지에 붙은 멋은 더 근사해지잖아요. 에너지를 격 있게 만드는 것, 내 에너지에 게으르지 않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요. 자글자글해도 멋지게, 안성기 선배님처럼요. 그런 얼굴의 배우, 70대 여성, 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의 말대로라면 더 나이 든 정영주를 기대해도 괜찮겠다. 묵직한 멋이 훨씬 더해졌을 정영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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