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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연기라는 것 산다는 것

2019-04-08 09:46

취재 : 김수정 TV리포트 기자  |  사진(제공) :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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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 한석규라는 배우가 지닌 의미는 남다르다. 그는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 <접속> <넘버3>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영화가 쏟아진 1990년대를 관통하며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
“별 발광을 다 했죠”

다양한 미덕의 작품이 두루 사랑받던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논할 때 배우 한석규를 빼놓을 수 없다. ‘티켓파워’라는 말이 처음 붙은 배우도, 한국판 블록버스터 서막을 연 이도, 장르를 넘나들며 꾸준히 사랑받은 이도 바로 한석규다. 하지만 한동안 침체기를 겪은 그다. 2000년대 접어들며 <베를린>을 제외하고는 대표작이라 꼽을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한석규 역시 “내 연기, 상대방의 연기, 작품 모두가 가짜놀음처럼 느껴진 시기”라고 회상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석규의 신작 영화 <우상>은 의미가 각별하다. 그의 화두는 늘 ‘새로움’이다. <우상>은 새로움 그 자체다.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정치 인생 최악의 위기를 맞은 구명회(한석규)와 목숨 같은 아들이 죽고 진실을 좇는 아버지 유중식(설경구), 사건 당일 비밀을 간직한 채 사라진 여자 최련화(천우희)까지, 그들이 맹목적으로 지키고 싶어 한 참혹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스릴러 장르 형식을 지녔지만 그 안에 담긴 면면은 파격적이다.

“이런 얘길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이런 얘기가 있어요. 한 부자가 있다. 그 부자는 자기가 가진 재산을 투자해 더 큰 재물을 얻고 싶었다. 마르지 않는 재산으로 창고에 가득 담으려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죽었다. 예수가 한 얘기예요. 전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이 정곡을 찌르는 비유, 뒤통수를 후려치는 이야기, 이걸 하고 싶었어요. <우상>이 딱 그랬습니다.”

나아가 <우상>은 대한민국의 고민, 인간의 민낯, 우상이라는 환상에 대한 영화다. 이런 문제의식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우상>이 신선하다는 한석규. 영화를 꿈꾸고 연기를 갈망하던 초심을 되찾아보게 한 작품이기도 하단다.

“늘 새로운 걸 꿈꿔요. 연기도, 영화도 늘 새롭길 바라죠. 전 캐릭터보다 이야기의 테마가 더 중요하거든요. 24년 동안 24편의 영화를 했어요.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착한 연기도 해보고, 별 캐릭터를 다 해봤죠. 물론 진폭이 넓은 캐릭터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지만 영화가 지닌 테마가 제겐 더 중요해요.”

<우상>에서 발견한 새로운 점을 묻자 “인상파 영화”라고 답한다. 영화가 지닌 인상, 뉘앙스, 분위기, 이미지가 중요한 작품이다. 그 이미지의 정점은 엔딩에서 가장 강렬하게 객석을 휘어 감는다.

“엔딩은 히틀러를 생각하면서 연기했어요. 독일 관객들도 계시니 조심스럽긴 하지만요.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법, 무대 연출은 우상이라는 이미지를 강력하게 준다는 점에서 거의 톱3 안에 들어요. 그걸 생각하며 연기했죠. 엔딩에서 한 대사는 전부 제 애드리브고요. 다른 언어가 있는 게 아니니까. 이수진 감독님은 후시 녹음 때 개 짖는 소리를 한번 해달라고 했죠. 그건 너무 센 것 같아서 안 넣었는데, 넣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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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한석규에게도 고민의 순간은 늘 곁을 맴돈다. 연기라는 것,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몰입이라는 단어를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번역했는지는 모르지만 썩 좋아하진 않아요. 한때 메소드 연기에 정신 팔려 별 발광을 다 했죠. 연기자 한석규는 어떻게 하면 리액션을 잘하나 연구하고 있어요. 제 연기의 가장 큰 숙제죠. 연기라는 게 뭔가를 하는 건 줄 알던 시절이 있었어요. 돌이켜보니 연기라는 직업의 대부분은 리액션에 관한 일들이더군요. 내 연기할 차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듣고 반응하는 게 연기예요. 산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산다는 건 평생 반응하는 일이에요.”

그는 본인의 출연작 중 최고점을 준 작품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꼽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변두리 사진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 정원(한석규)이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 멜로 영화의 교본으로 꼽히는 영화로 지금도 많은 영화에 영향을 주는 명작이다.

“한 3년 지나봐야 내 영화가 쓸 만한가, 이 영화가 쓰레기인가 아닌가 알 수 있어요. 제 출연작 중 어떤 작품은 다시 보기도 하고, 어떤 영화는 평생 안 보기도 합니다. 거들떠보기 싫은 것도 있죠. <8월의 크리스마스>는 80점 정도 줄 수 있겠네요. 제가 출연하지 않은 작품 중 최고작은 <일 포스티노>(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예요. <8월의 크리스마스>가 제겐 <일 포스티노> 같은 작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출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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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기하는 게 꼴 보기 싫었어요”

<쉬리> <구타 유발자들> <베를린> 등 충무로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한 그는 매번 자신의 연기에 대해 “아쉽다”고 평한다. ‘연기신’이라 불리는 그가 유독 스스로 연기에는 야박한 이유가 뭘까.

“예전엔 내가 연기하는 게 꼴 보기 싫었어요. 눈이 좀 멍 때린다고 해야 하나. 요즘 좀 봐줄 만 합니다. 관객으로서 내 연기를 보면 이제 눈에 좀 사연이 담겨 보입니다. 그게 마흔은 넘어야 눈에 담기더라고요. 한때는 가짜라는 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내가 연기하는 게 다 가짜구나, 가짜만 가지고 발버둥 치는구나. 내 가짜 연기를 상대방도 가짜로 받아치니까. 이게 아주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거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더 힘들었죠. 내가 하는 이 일이 가짜놀이 같았다고요. 참 구차했습니다.”

가짜에 대해 고민한 이유를 물었더니 “몸과 마음이 다쳤다”라는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다쳤거든요, 2002년도 즈음. 몸과 마음, 단어도 비슷하네요. 몸과 마음은 떼려야 뗄 수 없어요. 몸이 안 좋으면 마음도 안 좋아지죠.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안 좋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어느 날 문득 ‘내가 하고 있는 게 다 가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서 밀려드는 허무감이 컸습니다. 이제야 한 문장으로 답을 내렸어요. 가짜를 통해서 정곡을 찌르는 게 내가 하는 일이구나.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는 게 연기구나. 진짜를 가짜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게 배우들이 할 일 같습니다.”

한석규는 “뭘 이루고 완성하는 건 하나도 안 중요하다”라고 했다. 뭔가를 해내는 결과보다 한다는 행위 자체, 연기 그 자체가 유의미한 것이라고.

“젊을 땐 이루는 것, 잘하는 것, 해내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어요. 어느 순간부턴 그게 별게 아니더라. 하나도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중요한 건 일단 하는 게 중요하구나. 저는 늘 플레이어로 남고 싶어요. 특별히 변한 계기는 없어요. 자식도 낳아보고, 죽음도 보고, 나이 먹으면서 점점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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