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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의 멜로

2018-12-10 09:59

취재 : 박지현 기자  |  사진(제공) : 이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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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어림잡기도 송구하다. 50여 년. 배우로 산 세월이 더 긴 두 사람. 박인환, 정영숙이 상대역으로 만났다.
젊은이들의 사랑은 뜨겁다. 한여름처럼 맹렬하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한다 말하고, 어루만지는 데 거리낌이 없다. 더위가 꺾이면, 이별이 온다. 노년의 사랑은 다르다. ‘어린’ 이들이 보기엔 무미건조하고 차가울 수도 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깊게 팬 주름만큼이나 진하다. 상대를 끌어안으려 하기보다 그 사람이 앉을 자리를 가만히 닦아준다. 극 중 김만석의 말마따나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이기에 두 사람에게 이별은 ‘죽음’밖에 없다. 그의 죽음을 볼 자신이 없어 이별을 택한다.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박인환, 정영숙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노년 세대 ‘사랑의 미학’을 보여준다. 긴 세월을 지내온 노인들에게도 새삼 특별한 ‘사랑’에 대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낼 예정이다.
 

최근 영화 <비밥바룰라>에 함께 출연하시긴 했지만 두 분이 상대역은 처음인 것 같아요. 연습에 한창이신데, 호흡은 잘 맞나요?

정영숙 연기를 이 정도 했으면 다 맞출 수 있어요. 안 맞아도 바로 맞춰져요.(웃음)

박인환 <간첩 리철진>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내가 나이든 간첩으로 나오고, 유오성이가 젊은 간첩으로 나온. 그때 내 부인 역을 했지, 처음은 아니에요.

정영숙 어머, 어머. 그걸 기억하세요? 한 20년 전이지, 아마? 대단해요. 그걸 기억하시네.

박인환 호흡은, 갈수록 뭐랄까. 이 나이 되면 모난 게 싫어지더라고요. 상대방한테 맞추고, 서로 편한 게 좋아요. 젊을 때는 치기 같은 게 있어서 괜히 이기고 싶어서 양보 안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부부 싸움에서도 지는 게 이기는 거라잖아요.
 

아주 잘 맞는다는 말씀으로 알겠습니다. 우유 배달하는 김만석 할아버지, 폐지 줍는 송이뿐 할머니 역을 맡으셨어요.

박인환 김만석은 성격이 아주 급하고 욕쟁이예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막무가내 할아버지고, 송이뿐은 아주 곱고 착한 할머니예요. 서로 전혀 다른 것 같은데, 아주 잘 엮이는 거지. 허허. 그러면서 서로 관심이 생기고 정이랄까, 사랑이랄까 그런 호감을 가지게 돼요.

정영숙 극 중에서 성격적으로 서로 극과 극이에요. 극은 통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잘 맞는지도 몰라. 아시다시피 박인환 선생님은 표현의 폭이 굉장히 넓은 배우예요. 많은 걸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배역이 아닌가 싶어요.
 

정영숙 선생님은 이미 드라마 <그대를 사랑합니다>(2012)에서 송이뿐 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지나 다시 송이뿐이 돼보니 어떤가요?

정영숙 글쎄, TV는 촬영 중간에 커트를 할 수 있는데, 이건 100% 라이브잖아요. TV보다 몇 배로 긴장해야죠. 예전에 연극 작품하면서 두 달 동안 몸을 ‘굴린’ 적이 있어요. 아주 힘들게, 힘들게 해서 작품 끝나고 병원에 실려 갔다니까. 그러고 나서 “나 이제 연극은 안 해” 그랬는데, 또 하고 있어요. 관객과 호흡하고 그런 매력이 있어요. 보람도 있고요.

박인환 드라마에서는 만석이를 누가 했어요?

정영숙 이순재 선생님이 했어요.
 

그러고 보니 더블 캐스팅된 이순재 선생님은 이미 영화와 드라마에서 김만석 역을 하셨더라고요. 선생님은 처음이고요. 부담되지 않으세요?

박인환 안 된다면 거짓말이에요. 자타가 인정하는 그런 분이랑 같이 하는데. 그렇다고 진짜로 비교되면 안 되잖아요? 욕은 먹지 말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있어요. 해결책은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어요. 대본을 한 번 더 보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덧붙이자면, 누가 맡느냐에 따라 다른 맛이 또 있어요. 햄릿을 하더라도, 결국 그 배우라는 사람을 통해서 걸러서 나오니까요.

정영숙 당사자뿐만 아니라 상대역도 마찬가지로 누구와 호흡을 맞추느냐에 따라 표현이 다르게 나와요. 연극에서 볼 수 있는 맛 중 하나죠. 이번 작품에서는 짝이 정해져 있지만 말예요(이순재의 상대역은 손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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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사랑 이야기지만,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객석을 떠나는 이들이 어떤 마음이었으면 하나요?

정영숙 빈촌에서 어려운 삶을 사는 이들 이야기예요. 전체적으로 노인의 사랑과 처신 문제를 서정적이고 깔끔하게 처리한 작품이에요. 그런 가운데 아름다움이 피어나는데, 중년의 경우 대리만족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사실 노인들이 연애를 하는 게 쉽진 않잖아요. 젊은 세대에겐 부모 세대를 생각해볼 기회가 될 수도 있겠고요.

박인환 언어 구사도 시적이고, 따뜻하고 예쁜 말이 많아요. ‘사랑’이라고 말하기조차 조심스러운….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서 마무리도 깔끔하고요. 나보다 상대를 더 생각하는 거, 그게 쉽지 않잖아요. 형식은 ‘노년의 러브스토리’를 빌렸지만, 세대를 넘어 감동을 줄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한겨울에 따뜻한 공연이 될 거예요. 가슴이 아릴 수도 있겠고요.

정영숙 요즘 참, 정서적으로 메말랐잖아요. 흉흉한 소식도 많고요. 마음을 살짝 적셔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아직도 무대에 오르기 전에 떨리시나요?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현역 때 그랬다잖아요. “내 최악의 적에게도 이 느낌은 겪게 하고 싶지 않다”고.

정영숙 그럼요. 초연 올려놓기 전까지는 떨려요. 언젠가 청심환 먹은 적도 있다니까. 한 알을 다 먹었는데, 너무 세더라고. 반 개가 좋은 것 같아요. 어떤 날은 떨려서 박카스 두 병을 연거푸 먹었는데, 혀가 말려서 고생했지 뭐야. 대사가 안 되는 거야. 어찌나 고생했는지. 박인환 선생님은 연극 많이 하셨잖아요?

박인환 나는 연극으로 데뷔를 했어요. 1년에 5~6개 한 적도 있고. 밥 먹고 연극만 한 거지. 많이 했어도 아직도 그래요. (초연) 한번 올려놓고 나면 좀 수월하지. 초연 올릴 때 보면 여러 가지 유형이 있어요. 화장실 들락날락하는 사람도 있고, 진정제 먹는 사람도 있고요. 나는 하느님을 찾아요. 도와달라고 하지.

정영숙 정말? 하느님을 찾는다고요?

박인환 기도라는 게 때에 따라 다르지만 ‘잘되게 해달라’는 것일 수도 있고, 단합심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기능이 있어요. 기도라는 게 그런 거죠. 기본으로 하는 게 있고, 감사 기도가 있고, 무사히 공연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도 있고.

정영숙 교회 다니세요?

박인환 원래는 개신교였는데, 아내 따라 가톨릭으로 갔어요.

정영숙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아니라? 드문 케이스네. 남자들이 나이 들면 이래요. 부인 따라 가는 거야.(웃음) 
 

반백 년 연기 인생

둘이 합하면 연기 세월 백년이 넘는다. 박인환은 연극영화과 졸업 이후 연극 무대로 데뷔, 1965년 본격적으로 드라마에 출연한 이후 54년간 약 100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굳세어라 금순아> <소문난 칠공주> <조강지처 클럽> 등 드라마의 중심을 지탱하는 묵직한 역할은 물론 영화 <박쥐>의 노신부, <집행자>의 김교위, <수상한 그녀>의 박 씨까지 스크린에서도 존재감을 내비쳐왔다. 작년에는 데뷔 이래 첫 스크린 주연작인 <비밥바룰라>에서 이 시대의 아버지를 완벽히 표현하며 연기 내공을 과시했다. 정영숙은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1968년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그 또한 약 100편의 작품에서 여군, 부잣집 딸, 대책 없는 며느리, 다방 마담, 김정일 부인, 선덕여왕, 청각장애인, 엄한 시어머니까지 안 해본 역할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역을 소화했다. 줄곧 드라마와 영화에 매진하다 지난 2011년 <친정엄마>를 통해 처음 연극에 도전했다. 내년 설 즈음에는 이순재와 함께 찍은 영화 <로망>의 개봉을 앞두고 있기도 하다.
 

최근 어르신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국내외를 막론하고 흥행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국내의 경우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주인공의 엄마, 아버지’ 등으로 조연에 그치곤 했는데요. 이 같은 현상을 남다르게 느끼실 것 같습니다.

정영숙 젊은 친구들을 노역을 시켜서 학예회 같은 영화들이 많았죠. 노인들이 출연하더라도 웃고 즐기다 끝내던 것이 이제는 휴먼으로 가는 것 같아요.

박인환 드라마, 연극, 영화 모두 시대를 반영하잖아요. 100세 시대가 왔고, 고령화되면서 사회가 많이 달라졌어요. 자연히 공연예술계에도 이런 변화가 스미는 거예요. 재력 있는 노인들이 많아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공연예술에 관심을 돌리니까 자연히 이러한 작품이 많이 나오는데, 고무적인 일이죠.

정영숙 요즘 압구정에서는 “너희 할아버지 뭐하니?”라고 한다잖아요.(웃음) 게다가 국민들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서 문화를 향유하는 중년도 많아졌어요. 예술의전당 클래식 음악회에 가보면 2000석 정도 되는 객석이 중년층으로 가득 찬다니까요.
 

이러한 작품은 대부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박인환 그렇다마다요.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고 봐. 어느 날 남산에 갔는데 지팡이 짚은 80대 노인이 젊은 여자가 지나가니까 휘파람을 불더라고. 우스갯소리가 아니에요. 나이 들면 다 초월할 것 같죠?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똑같아요. 나이가 들어도 똑같아요. 정말 숫자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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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다 배우로 산 세월이 더 깁니다. 약 100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나다운 캐릭터는 뭐였나요?

정영숙 글쎄요. 뭐가 잘 맞았는지 모르겠어요. 실제 제 성격은 순한 것에 가깝거든요. 그런데 연기할 때는 독한 게 더 수월한 것 같기도 하고요. 글쎄… 연기는 다 어려워요. 어떤 배역은 너무 안 된 적도 있어요. 너무 안 돼서 “왜 이렇게 안 되지” 하며 주저앉은 적도 있는데, 또 그게 상을 타더라고요.

박인환 나도 그래요. 직장생활 해본 적 없이 평생 연기만 했는데 뭐가 잘 맞느냐, 물으면 글쎄 모르겠어.
 

배우들은 새 배역을 맡을 때마다 몰입하는 데 에너지가 필요하잖아요. 두 분은 좀 수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몸을 악기라고 치면, 이미 수많은 배역을 연주해봤고, 그만큼 다양한 악보를 담고 있으니까 필요할 때마다 척척 꺼내 쓰는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요.

정영숙 그걸 조심해야 해요. 그렇게 딱딱 꺼내 쓰는 거 조심해야 해요. 내가 연기하는 인물은 결국 다 다른 사람이거든요.

박인환 주변에서 말해요. 연기하는 거 이제 편하지 않느냐고. 아녜요. 같은 작품도 없고, 같은 캐릭터도 없거든. 기계처럼 저장된 걸 꺼내 쓴다? 그럼 안 되지. 나는 오히려 지난 연기들은 다 잊어버리는 편이에요. 그래야 새로운 무언가를 온전히 담을 수 있거든. 난 방송 대본도 작품 끝나면 버려요. 연극 대본은 보관해놓은 게 몇 개 있죠.  
 

50년 전으로 잠깐 시계를 돌려보면 어떤가요?

정영숙 처음 연기할 땐 진짜 화장하는 것부터 별세계였고 신기했는데, 벌써 50년이네요. 젊었을 때 사미자 언니나 이런 사람들 보면서 “왜 결혼해서까지 연기를 하는 거지?” 싶었어요. 난 애 낳으면 관둬야지, 했는데 여기까지 왔네요.(웃음) 저는 연기하면서도 주일마다 교회에 갔어요. 너무 힘들 때는 울면서도 갔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래요. 아, 이게 예비의 길이었구나. 정말 감사하고, 좋은 영향을 주는 공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박인환 그땐 연극판이 열악해서 소극장도 제대로 없었어요. 다방 빌려서 하고, 천막 쳐놓고 하고 그랬지. 이걸 계속해야 하나, 갈등하면서도 딱히 딴 거 할 재주도 없고. 중대 연영과를 다닐 땐데 성대 경영학과로 편입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때 망원동 반지하에 살았단 말예요. 건물에 맥주, 소주 빈 박스가 쌓인 집이 있었어요. 누가 사나, 했더니 은행 지점장이 산대요. 아, 은행 지점장이 되면 저렇게 술을 궤짝으로 먹는구나 싶었던 거지.(웃음) 경영학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나병은 고칠 수 있다>는 목적극이 하나 들어왔어요. 3개월간 지방을 돌면서 학교 운동장, 개천 이런 데 천막을 쳐놓고 하는 거예요. 요즘으로 치면 마당극 스타일로 전국을 도는 거예요. 그걸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아, 연극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겠구나 싶어서 편입을 안 하고 계속 연기를 했어요. 그러다 TV로 가게 됐고, 수사반장 단역을 한 게 기억나네. 대사 몇 마디 되지도 않는 걸 그렇게 틀렸더랬어요. 선배 연기자가 그러더라고요.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라고. 허허.

정영숙 그런 얘길 듣던 시절도 있었군요.

박인환 그래도 그만둘 수 없었어. 애기 우유 값도 벌어야 했고. 내가 의외로 소심하고 말주변도 없어요. 사교성도 없고. 그래서 아무한테도 그런 얘기를 못 하고 계속 NG만 내다가 집사람한테 말했더니, “당신 선배들도 다 그런 과정 겪고 그 자리에 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묵묵히 전념했더니 배역이 조금씩 커졌어요. 단역, 단막극, 베스트셀러극장부터 6개월 보장되는 일일연속극에서 주말 연속극까지. 나도 ‘나이 들면 하지 말아야지’ 하다가, ‘애들 대학교 보낼 때까지만 해야지’ 하다가 지금까지 하는 거예요.
 

앞으로도 그렇겠죠?

박인환 이제는 말마따나 ‘벽에 똥칠할 때까지’ 해야죠. 죽을 때까지 한다는 거야. 내가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계속하는 거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선택받는 사람들이거든.

정영숙 모든 게 주어진 안에서 하는 거예요. 이만큼 나이 들면요, 악다구니처럼 살지 않아요. 작품이 없다고 막 용쓰고 그러진 않아요. 다만 연기할 날이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며, 그 몫은 다하려고 하죠.

박인환 이번 작품 끝나면 아내가 가족들이랑 여행을 가재요. 연극은 특히 힘든 걸 아니까. 이젠 하지 말라더라고.(웃음) 가끔 영화나 띄엄띄엄 찍고 그러라고. 나 고생한다고 하는 소리지. 근데 건강이 허락하면, 좋은 작품으로 또 찾아가야죠.
 

마지막으로 두 분에게 “무대 밖 ‘그대’는 누구인지”를 물었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정영숙은 “물론 남편이지. 나이 들수록 남편이 최고”라고 했다. 박인환은 “큰일 날 질문한다”라면서 “당연히 내 마누라”라고 했다. 일상도 ‘멜로’인 이들 공연은 12월 6일부터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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