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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첫사랑, 박정수

2018-09-11 10:02

취재 : 박지현 기자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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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곁에 있는 사람 같다. 차갑고 지독하다가, 또 언젠간 헌신적이고 따뜻하다. ‘푼수끼’ 넘치는 모습으로 큰 웃음을 주다, 아들 잃은 어미 역으로 눈물을 쏙 빼기도 한다. 배역의 성정은 각기 다르지만, 브라운관 안에서 박정수는 ‘어머니’란 이름으로 친숙하다. 그런 그가 화면을 벗어나 무대에 선다. 이번엔 ‘첫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 생애 두 번째 연극

데뷔 4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브라운관 외길’이었다. 1972년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늘 화면 속에서 세상을 그려냈다. 그러다 2015년 연극 <다우트>로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는 “사제 얘기를 하는 연극인 데다 번역극이라 대사가 입에 붙지 않아 힘들었지만, 그럴수록 악착같이 해내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 했다. 그리고 3년 후, 다시 한 번 연극 무대에 선다. 70세 첫사랑의 로맨스를 다룬 <장수상회>. 주인공인 까칠한 노신사 ‘김성칠’이 첫사랑에 빠지는, 소녀 같은 꽃집 여인 ‘임금님’ 역을 맡았다.
 

그동안 왜 안 맡았나 싶을 정도로 잘 어울립니다. 손숙 선생님과 더블 캐스팅인데, 두 분이 그려내는 ‘금님’은 아무래도 다르겠죠? 임금님의 캐릭터가 제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캐릭터 소화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거예요. 손숙 언니의 다른 연극은 봤는데, <장수상회> 공연하시는 건 아직 못 봤어요. 워낙 연극 베테랑이시니까 잘하실 거예요. 저는 그저 거기에 뒤지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이고요.

상대역을 맡은 이순재, 신구 선생님과의 호흡도 기대돼요. 주로 이순재 선생님과 호흡을 맞출 거예요. 신구 선생님은 손숙 언니와 <장수상회>를 오래 했었으니 아무래도 ‘케미’가 잘 맞거든요. 순재 선생님과 저는 둘 다 이 공연이 처음이지만 드라마 <허준>에서 부부로 연기한 적이 있고요. 가끔 단편극에서도 만났던 터라 잘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대사 외우는 노하우가 있나요? 연극은 완전한 라이브잖아요. 예전에는 그야말로 무턱대고 외웠지, 암기식으로요. 지금은 전체적인 상황과 캐릭터를 먼저 충분히 이해하고, 대사를 봅니다. 그러면 절로 외워져요. 이 상황에는 이런 말이 나오겠구나, 하면서요. 후배들한테도 그래요. ‘그거 외우려 하지 말고 이해하라’고.

그간 출연한 드라마 목록을 보니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작품 선택의 기준이 있나요? ‘이런 작품은 결코 하지 않는다, 이런 작품은 꼭 한다’ 하는. 그런 거 없어요. 배우는 무슨 배역이든 내 것으로 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이든 내 감성을 가지고 시청자든, 관객들에게든 표현해야죠.

여태껏 맡았던 배역 중에 가장 나다웠던 캐릭터는 뭔가요? 사람들은 <질투의 화신>이 젤 비슷하다고 하던데, 난 모르겠더라고요.(웃음) 전 <LA 아리랑>을 꼽고 싶어요. 그 배역은 당시 박정수였던 것 같아, 그냥 나였어. 정말 행복했어요. 가정적이고 남편한테 사랑받고, 내 주장도 있는 역할이었죠. 여운계 언니도 너무 좋았고, 김세윤 선생님은 진짜 남편 같았어요. (김)찬우와 정준이는 아들 같았고. 진짜 행복했어요, 그때.

작품마다 새 배역에 몰입하잖아요. 작품이 끝나고도 한동안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캐릭터도 있을 것 같아요. 디테일한 감정을 많이 표현하는 작품이 그래요. 그야말로 완전 몰입 상태여야 하니까요. 한번은 아침드라마에서 암에 걸린 엄마 역할을 한 적이 있었어요. 드라마 종영하고 정말 아팠습니다. 그렇게 한 반년을 앓고 나서야 빠져나왔죠.

실제로 몇 년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으셨죠. 건강관리에 남달리 신경 쓰셔야겠어요. 이젠 완쾌했어요. 예전엔 요가를 했었는데, 요즘은 PT를 해요. 안 아프려고 하는 거예요. 나이 드니까 이게 운동이 아니라 약이야 약. 나도 운동하기 싫어요. 근데 억지로 하는 거예요. 약이다, 생각하고. 진짜로 하니까 몸이 덜 아프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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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태어난대도

대본이 있다는 건 다른 말로 ‘허구’라는 얘기다. 그는 성격상 거짓말을 못 한다고 했다. 미사여구도 싫다고 했다. 인터뷰하면서 시쳇말로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는데, 듣기 불편하지 않았다. 외려 허구 속에서 진실을 마주하는 느낌이라 개운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솔직함을 곡해하는 시선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럴 때면 ‘왜 연예인이 됐을까’ 하기도 했단다. 그 물음은 항상 ‘그래도! 연기가 좋으니까’로 귀결됐다. 천생 배우였다.
 

박정수 하면 ‘고운 중년’과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어요. 배우인데, 연기나 작품 얘기보다는 외모 얘기가 주로 나온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요. 전 죽어라고 연기하는데 왜 사람들은 제가 입은 옷과 액세서리에만 관심을 가질까요? 더군다나 전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뭐가 예뻐요. 물론 흉하게 생긴 건 아니죠. 그런데 이 얼굴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야. 전 좀 도시적이고 이지적인 얼굴을 좋아하거든요. 어쨌든 그간 흐트러진 모습을 너무 안 보여줬나? 싶기도 해요.

그러고 보니 손주를 본 나이입니다. 이미 꽤 됐죠. 큰애가 딸 셋을 낳았어요. 지금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그리고 3살이에요.

예전에 딸들 결혼식 때 많이 울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왜 그렇게 우셨나요? 애들 생각하면 늘 짠하죠. 바빠서 같이 있어주질 못했잖아요. 고마워서, 너무 고맙지. 그런데도 잘 자라줬으니까…. 엄마 사랑을 다 못 준 것 같은 그런 게 있어요. 특히 둘째는 아주 어릴 때 미국에 있는 이모한테 보냈거든요.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또 눈물 고이시네. 그럼에도 모두 공부를 잘했고 능력 있는 여성으로 살고 있잖아요. 이젠 자랑거리겠어요. 애들한테 공부하란 소리를 한 번도 안 했는데 공부를 곧잘 했어요. 고3 때도 그 흔한 과외를 안 시켰고, 학교도 데려다준 적이 없어요. 학교 선생님 말로는 집중력이 좋았대요. 특히 수학 같은 건 서울대 갈 실력이라고 했었어요. 첫째는 연대 갈 성적이었는데 이대를 갔고, 둘째 애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죠.

‘방목형 육아’를 한 셈인데 돌이켜보면 어떤가요? 내가 좀 서구적으로 키우긴 했죠.(웃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희생하며 살아놓고 뒤늦게 ‘내게 남은 건 뭐냐’면서 후회하는 거 하지 않겠다, 내가 먼저 행복해야지, 했던 건데… 돌아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공부하란 소리 안 했기 때문에 알아서 공부했던 거죠. 그때 애들한테 그랬어요. ‘각자 본분에 맞게 사는 것’이라고요. 너는 학생이니 학생 본분을 다 하면 되고, 엄마는 배우니까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 다만 네가 선택한 건 책임져야 하고, 후회할 일 만들지 말라고. 저도 후회 안 해요.

큰딸도 양육 스타일이 엄마와 비슷한가요? 큰딸은 나와는 다르게 키우는 것 같아요. 뭐랄까. 이것저것 챙기면서 요즘 엄마들처럼 키우더라고.(웃음) 근데 난 뭐라고 안 해. 그게 그 아이 스타일인 거죠.

손녀들과는 뭐 하면서 시간 보내세요? 할머니가 살아보니 이렇더라, 이런 얘기 들려줘요. 할머니 시대의 사랑 얘기 같은 것도 들려주고.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얘기, 주부들한테도 들려주세요. 너무 아등바등하게 살 필요 없더라, 마음껏 사랑하라는 얘기 같은 거요. 부부간에 자존심 세울 필요 없더라. 사실 그 나이 때는 알면서도 못 하는 거예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때 떠올려보면 마치 ‘그걸 빼앗기면 죽을 것처럼’ 했거든요. 지나고 보면 그게 아니에요. 뭘 그리 악착같이 지키겠다고 했는지 몰라. 그리고 부부끼리 많이 표현하세요. 순간순간 감정을 그때그때 표현하고, 알려주세요. 미안할 땐 미안하다고 바로바로 말하고요. 그리고 상대방을 내가 판단하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이 말하게 하세요. 

아무리 이런 얘기를 해도 결국 살아봐야 깨달아요, 이건. 연륜과 경륜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죠. 물론 저도 아직 부족해요. 요즘 성당에서 늘 이렇게 기도해요. ‘아버지 저를 낮춰주세요’ ‘더 낮춰주세요’라고요. 이건 기도일 뿐이에요. 이런 기도를 했다는 게, 내가 아직 낮아지지 않았다는 반증이잖아요. 꾸준히 상기하고 새기려는 거죠.

앞으로 시도하고 싶은 배역이 있나요? 그간 대체로 일반적인 주부 역할을 많이 했는데, 아주 디테일한 감정을 살리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그게 특집이건, 단막극이건 극의 형태가 뭐든 간에요. 내 모든 걸 다 쏟아붓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배역에 너무 몰입해서 아프기까지 하셨다면서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다시 태어나도 역시겠죠? 물론이죠. 배우는 너무 좋은 직업이지, 정말 좋은 직업이에요. 배우보다 좋은 직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남들이 봤을 때도 “박정수? 좋은 배우였지”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게 시간 낭비하는 거예요.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 겁니다. 이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정수가 하는 거니까. 그런데 배우의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장담을 못 해요. 배우는 선택받는 사람이니까. 내가 지금 뭘 하고 싶다고 해도 결국 선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저 ‘잘 마치고 싶다’는 말밖에 못 해요. 이 일을 아주 잘 마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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