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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같은 엄마가 아니다! 김해숙

2018-07-05 06:38

취재 : 김수정 TV리포트 기자  |  사진(제공) : TV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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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데뷔 44년 차에도 여전히 변화를 시도하는 이가 있다. ‘국민 엄마’라는 영광스러운 수식어에 안주하기는커녕 단 한 번도 같은 ‘엄마’를 연기해본 적 없다는, 40년째 진화 중인 배우. 바로 김해숙이 그 주인공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김해숙(61)은 그야말로 ‘중견 배우’의 저력을 보여주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 해왔다. 특히 스크린에서 그가 보여준 활약은 흥미로울 정도다. <무방비도시>(2007, 이상기 감독)의 소매치기 대모 강만옥부터 <박쥐>(2009, 박찬욱 감독)의 그로테스크한 라 여사, <도둑들>(최동훈 감독)의 씹던 껌, 지난해 1000만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김용화 감독)의 초강대왕 역까지. 김해숙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 캐릭터는 팔딱팔딱 살아 숨 쉬고 관객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김해숙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장면

김해숙은 영화 <허스토리>(민규동 감독, 수필름 제작)에서 또 한 번 관객에게 마법과도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일본 정부에 당당히 맞선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 이야기를 그린 작품. 당시 일본 열도를 뒤집을 만큼 유의미한 결과를 이뤄냈음에도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관부재판 실화를 소재로 한다. 시사회 직후 평단의 극찬이 쏟아지며 주목받고 있다.

“처음엔 막연히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뛰어들었어요. 지금 와 생각해보니 정말 무모했어요. 제가 감히 할머니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말이죠. 시사회 때는 영화를 안 보고 싶을 정도로 두렵더라고요. 그런 느낌은 또 처음이에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습니다. <허스토리>는 시작부터 완성까지 모든 게 새로웠던 작품이에요.”

<허스토리>는 인물들이 재판에 동참하게 되는 계기부터 6년간의 지난한 재판 과정, 후일담을 차분히 그려낸다.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인물들과 사연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2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모든 출연진의 인생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진정성 담긴 연기도 압도적이다.

그 가운데 김해숙의 열연은 단연 독보적이다. 김해숙이 연기한 배정길은 과거 아픔을 딛고 자신의 위안부 과거를 공개하며 일본에 당당히 맞서는 할머니. 긴 세월 남몰래 지켜온 상처와 얼룩진 감정을 일본 재판장에서 쏟아내는 장면은 숨이 턱 막힐 정도다. 김해숙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장면. 울음과 분노를 목 끝으로 밀어내며 일본의 토악질 나는 과거를 폭로하는 모습은 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뜨거운 장면이다. 

“재판 장면만 나흘을 찍었는데, 컷 소리가 나면 쓰러질 정도로 몰입해서 연기했어요. 모든 걸 다 쏟아냈죠. 몸에 있는 물기마저 빠져나간 느낌이랄까요. 촬영 전에 물을 한 잔도 안 마셨어요. 제가 배정길 할머니였다면 입이 말랐을 것 같았거든요. 물을 조금만 마셔도 윤기가 돌까 봐 물은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연기를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 할머니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길 바랐어요. 최선을 다해 연기하고 기도하는 일밖에 없었죠. 처절하게 연기했어요. 어떤 날은 촬영장 가는 게 무서울 정도였죠.”

재판 장면을 찍고 나선 가슴이 뻐근했다. 카메라가 꺼지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겪었을 치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 깊은 몰입은 김해숙 인생 처음으로 우울증을 겪게 했다. 촬영 내내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열연이었다.

“원래 한 작품 끝나고 나면 쉬는 편인데 쉴 틈을 주지 말아야 할 것 같아 <허스토리> 끝나고 바로 SBS 드라마 <이판사판>에 들어갔어요. <허스토리>와 전혀 다른 캐릭터라 우울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더 힘들었어요. 저는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거든요. 작품이 끝나면 역할에서 금방 빠져나오는 편이에요. 제가 우울증에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허스토리> 찍는 동안, 찍고 나서는 모든 사물이 슬퍼 보이고 모든 게 무기력했어요. 몸이 아픈가 걱정했죠. 건강검진을 한번 받아봐야 할 것 같아 갔더니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내렸어요.”
 
 
단 한 번도 쉽게 연기한 적 없다

배우는 다른 인물의 삶을 살아야 하는 감정 노동자 아닌가. 그간 단 한 번도 쉽게 연기한 적 없다는 김해숙. 늘 감정의 끝까지 쏟아내던 그였지만 <허스토리>는 차원이 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에 제 영혼과 몸을 맡기는 심정이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허스토리>가 훈장처럼 남긴 깊은 우울은 약 두 달간의 나 홀로 여행 끝에 떨쳐낼 수 있었다.

“처음엔 겁 없이 하겠다고 뛰어들었는데. 물론 <허스토리> 이전에도 힘든 연기 많이 했고, 이 감정이 끝일 것이란 심정으로 연기하곤 했어요. 그런데 <허스토리>처럼 큰 블랙홀을 마주한 적은 없었어요. 하면 할수록, 시나리오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끝을 모르겠는 거예요. 나라는 것을 모두 내려놨는데도 ‘이 정도면 되겠지’ ‘이런 감정이겠지’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죠. 할머니들의 고통을 단 0.01%도 알 수 없다는 막연함이 제가 병들어가는 것도 모르게 했죠. 저로서는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말이죠.”
여러모로 김해숙에게 <허스토리>가 남긴 울림은 크다. 그는 <허스토리>는 그 자체로 역사이자 현재진행형인 아픔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허스토리>는 과거 사실을 미화하지 않았고, 과거 아픔을 들춰내서 사람들의 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도 아니고, 있는 사실 그대로 관부재판이 있었다는 이야기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실태를 조금 더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분이 저희 영화를 봐주시고 그 힘들이 모여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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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 먹을 때,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

김해숙에게 마지막 질문으로 언제 가장 행복하냐고 물었다. 맛있는 것 먹을 때와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라며 소녀처럼 웃는 그이 눈빛이 투명하게 빛났다. 왜 대중이 김해숙을 사랑하는지, 그가 왜 늘 새로운 연기를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늙지 않는 눈빛.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잃지 않는 다정함, 천진함이 아이 같은 눈빛을 유지하게 한 원동력일 테다.

“아직도 하고 싶은 역할이 많아요. 드라마든 영화든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나이 때문에 할 수 없을 때 좌절감이란 이루 말 할수 없어요. 지금보다 젊다고 해서 꼭 그 역할에 캐스팅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희망을 가질 수는 있으니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내 에너지와 현실 사이 간극에서 오는 딜레마는 여전히 힘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매번 다른 연기를 하려는 게 제 신념이에요. 저는요, 일할 때 제일 행복해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면 흥분돼요. 연애할 때 느끼는 설렘 같은 게 아직도 제 마음에 있어요. 연기하는 게 늘 짜릿해요. 엔도르핀이 돈다니까요. 앞으로도 맛있는 것 많이 먹으면서 열심히 연기하고 싶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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