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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제2의 인생,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2013-07-18 18:04

플라자호텔 22층 다이아몬드홀. 지난해 11월 이곳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열었던 박찬호가 6개월 만에 같은 공간을 찾았다.
이번엔 자신의 야구 인생 30년과 철학이 담긴 에세이 출간 기자회견이다.
가볍고 명랑한 기운을 내뿜으면서 등장한, 코리안특급 박찬호의 새롭게 시작된 삶.



“야구 인생 30년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졸업한 기분이에요. 야구라는 대학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그 논문을 토대로 삶의 작품을 설계 중에 있다고 할까요. 대학 나오면 새로운 직장을 찾는데, 그 첫걸음을 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설위원을 해서 그런지 화법이 더욱 유려해졌다. 자신의 첫 에세이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편안함과 뿌듯함이 전해진다. 시속 161㎞의 강속구, 124승의 영광, 첫 번째 메이저리거 등 각종 새로운 기록을 탄생시킨 코리안특급 박찬호가 이번에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타났다.


30년 야구 인생이 담긴 한 권의 책 

‘박찬호가 연 문과 류현진이 열어야 할 문, 명승부란 무엇인가, 기능과 지능, 박찬호 그리고 노모, IMF와 진정한 영웅’

박찬호의 스마트폰에 있는 메모다. 차로 이동할 때나 잠자기 전, 그는 스마트폰에 틈틈이 메모를 한다. 인간 박찬호의 삶과 생각, 신념, 과거와 미래에 관한 글로 가득하다. 만약 박찬호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가 홈페이지에 편지쓰기를 즐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려서부터 써온 일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야구를 시작하면서 야구가 좋았어요. 저는 경쟁심이 조금 남달랐던 것 같아요. 잘하고 싶고 이기고 싶은 욕심이 많아서, 더 열심히 노력했어요. 장군, 과학자, 대통령들의 위인전을 읽었는데 저는 그보다는 야구도서가 더 매력이 있더라고요. 나중에 자라서 선수가 되면 내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메이저리그 문을 연 선구자. 박찬호는 모든 것을 최초로 기록한 주인공이다. 아마추어 선수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그는 한국인들이 알고 있던 야구에 대한 통념을 깨버렸다. 161㎞의 강속구로 메이저리그의 거구 타자들을 요리하는 박찬호는 국민의 희망이었고, 마지막까지 주인공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는 우리에게 가능성이 무엇인지 알려줬고, 그 역할을 책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선수시절을 돌아보면서 썼어요. 내가, 이랬었구나 하는 순간도 있고 가슴 아팠던 순간도 있어요. 전 개인적인 콤플렉스뿐 아니라 조국에 대한 콤플렉스도 컸는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정받고 싶고, 부모님이 자랑하는 아들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포기하고 싶고 절망하고 싶을 때, 내 편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외로웠다. 억울하고 배신감이 들 때도 있었다. 그는 고국 어디에선가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주는 팬들의 성원을 기억했다. 끊임없는 에너지를 받은 덕분에 그는 이국땅에서 박찬호라는 이름으로 살 수 있었다.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은퇴 발표를 하고 나니까 오히려 당당해지더라고요. 다시 야구를 하겠다고 할 수도 있을 만큼. 발표하기 전에는 다시는 야구를 못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할까 걱정이 많았어요. 사람들이 나를 보지 않으면 어쩌나, 내 인생이 끝인가. 그런데 하고 나니 쉽더라고요. 모든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은퇴를 했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판단할 수 있었다. 책 작업도 선수 생활이 아닌 은퇴 이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넓은 시선으로 담을 수 있었다. 야구선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지금, 그는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를 알게 되었다. 

“자유로움이에요. 야구선수를 떠난 게 아니고, 자유로워진 것. 집착에서 벗어난 것이요. 여러 가지 새로운 것을 준비할 기회도 생겼고요. 언젠가는 동호인 야구를 할지도 모르죠. 더 나이가 들어서 동호인 야구선수가 될 수도 있고요. 제가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지는 저도 몰라요.”

야구선수로서의 역할은 더 이상 못하겠지만, 어떤 일에 도전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고, 또 메시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나는 아직도 마이너리그
 

은퇴를 하고 보니 야구 이외의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게 됐다. 대학을 졸업한 기분이라는 그는 모든 것이 새롭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신입사원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긴장이 돼요. 경험하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잘못될 거라는 두려움은 없어요. 어떤 게 문제였는지 알면 고치면 되고, 고치면 강해집니다. 상처도 마찬가지예요.”

정신력이 대단했던 그답게 은퇴 이후의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견고하다. 상처를 받고 받지 않고는 생각의 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껴요. 아이들은 상처가 났을 때, 피가 안 나면 두려워하지 않더라고요. 같은 통증인데 피가 나면 울고 겁을 먹어요.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면 금세 괜찮아요. 캐릭터를 붙이면 좋아해요.(웃음) 생각의 차이인 것 같아요.”

새로운 일들을 구상하는 그는 설렌다. 아직도 마이너리그라고 말하고 다닌다. 부족한 것은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태도다. 

“공부하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했어요. 부족한 게 탄로 날까봐요. 야구만 하고 공부를 못한 게 창피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잘못됐다, 부족하다 말하는 건 괜찮아요. 그게 뭐지? 궁금증이 생겨요. 그걸 알면 힘이 되잖아요.”

그래서 그는 아직도 자신을 마이너리거라고 부른다. 부족했던 것을 지적받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기 위해서다. ‘내’가 잘해야만 이길 수 있는 마이너리거라는 마인드가 있어야 스스로 변화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은퇴 이후 달라진 삶

“요즘은 아무 식당이나 편하게 가거든요. 그런데 그런 데서 사람들이 싸늘하고 반응이 없으면 ‘이거 뭐지?’ 생각해요. 웨이트리스들이 친절하게 안 대해주면 ‘어, 무시하는구나’ 생각도 하고요. 과거엔 반찬이라도 더 갖다주고 그랬거든요.(웃음) 아직 벗어나지 못한 스타의식이 있어요. 착각이죠. 이제는 그런 것들을 버려야 해요.”

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은퇴 이후 일상에서 스스로의 변화를 절감한다. 사람들의 반응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달라진 점이 있다. 이 상황을 전하는 그의 어투가 굉장히 발랄하고 즐겁다. 새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회에서 인정받는 분들을 만나면, 그런 분들은 아무 식당에 가도 늘 친절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전 야구만 했지 그런 건 잘 몰라서 배울 점이 많아요.”

확실히 잘나갈 때의 박찬호와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사고가 유연해졌다. 기자들의 눈을 맞춰가며 말을 한다. 야구선수가 아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을 배워가고 있다. 어머니가 농담처럼 건넨 “나중에는 사인해달라는 사람도 없으니, 있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잘해라”는 말의 진심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새로운 루틴, 골프와 강의

평생 야구 하나만을 위해 살아온 남자에게 펼쳐진 세상은 넓고, 황량하고, 또 조금은 무서운 대상이었다.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유소년을 위한 야구재단 등 꾸준하게 야구와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지만, 30년을 같은 포맷으로 살던 사람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은퇴를 하고 나서 갑자기 ‘멘붕’이 왔어요.(웃음) 우울해지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내가 진짜 야구를 좋아했구나, 하다가 내가 진짜 야구를 좋아했었는지 질문도 던져보고.”

선수 시절엔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항상 할 일이 있었다. 어떤 음식을 먹고, 무엇을 하고, 운동은 몇 시에 하는지 등등. 오프 시즌에도 그의 일상은 꽉 짜인 틀 안에 존재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팔 굽혀 펴기를 하고, 앉아서 명상을 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공 던지는 것을 해요. 습관적으로 하는데, 하다보니 안 해도 되는 거네? 싶더라고요. 22층 아파트에 사는데, 집에 갈 때 항상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도 굳이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엘리베이터를 타면 돼요. 그렇게 하나둘 루틴이 깨지는데, 저에겐 조금 충격이었죠.”

깨지면 야구를 못 하게 된다든지 성적이 안 좋아진다든지 하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깨지니 삶이 불안해지는 마음이 컸다. 문득 ‘나 제대로 살고 있나?’ 싶은 불안감도 컸다. 새로운 루틴이 필요했다. 

“골프를 시작했어요. 너무 힘들더라고요.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워서 힘든 게 아니라 기술적으로. 한번 해보고 또 해보면 점점 나아지는데, 투수와 똑같다는 것을 느껴요. 투수는 마운드에서 혼자 풀어나가야 하는 존재거든요. 골프도 어디에 정확하게 집어넣느냐가 중요하잖아요. 혼자 공을 가지고 컨트롤하는 것도 그렇고.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에 집중되어 있어요.” 

골프 이외의 새로운 루틴은 배움이다. 아침 6시면 일어나 아이들 학교 가는 준비를 도와주는 그는 오전 시간은 강의를 듣는 것으로 보낸다. 은퇴 전에는 육체적인 루틴이 많았다면, 이제는 정신적인 루틴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을 만날 때 이야기하기 위한 루틴이기도 해요. 변화라면 변화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보려고 하고 좋은 멘토들에게 조언을 들으려고 해요.”


박찬호는 아직도 자신을 마이너리거라고 부른다. 부족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사람 좋아하는 남자의 인맥관리 비결 

박찬호의 에세이는 추천사를 읽는 재미도 있다. 혜민 스님부터 이해인 수녀, 싸이, 안성기, 추신수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글이 책 표지에 빼곡하게 들어 있다. 책 속에는 그를 기억하는 지인들의 멘트가 있는데 그의 부모님, 야구 선후배 등 사회에서 만난 지인들이 전하는 글이 무려 4쪽에 걸쳐 소개된다. 

“더 많은 분량이 있어요. 못 넣었습니다. 재판 때 그분들을 쓸 거예요.(웃음) 출판사에서 처음에 혜민 스님, 이해인 수녀님 등 잘 알려진 분들을 원했는데, 생각해보니 저랑 함께 야구했던 후배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일일이 부탁을 했습니다. 다들 흔쾌히 보내주었고 그 마음들을 다 싣고 싶은데, 그 분량이 제가 쓴 원고보다 많아서요.” 

잘 알려진 대로 박찬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다. 그에겐 사람을 이끄는 매력이 있단 말이고, 그가 사람들과 소통을 잘한다는 말의 방증이다. 인간관계를 만들 때 ‘관리’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에게 인맥관리법을 물었다. 

“그분들을 피곤하게 한 것 같아요. 그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으니까 더 질문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서로 소통하게 되고.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는 것 같아요. 안 좋은 부분을 아는 것도 인맥관리의 중요한 부분이거든요.” 

뭐든지 알고 싶고 궁금한 것이 많은 것은 어려서부터 형성된 것이란다. 집 밖에만 나가면 하도 질문을 많이 해서, 어린 시절엔 어머니에게 피곤한 스타일로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혼난 기억도 있지만, 덕분에 주변에 많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선수 생활을 한국에서 한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친구들, 후배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면서 그는 좀 더 내밀한 관계의 동료들이 많아졌다. 

“과거에는 친구들, 선배들에게 이야기만 들었는데, 같이 생활하면서 한국 야구의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절박한 후배들의 사정도 알게 됐고. 이런 분들 덕분에 제가 많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책으로 건네고픈 희망 메시지
 

“혜민 스님의 책이 베스트셀러를 넘어 스테디셀러인데, 출판사에서는 백만 부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고 기대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책을 많이 팔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할 겁니다.”(웃음)

항상 최고의 자리에서, 시크한 톱스타의 매력이 있는 그의 멘트가 생경했다. 그만큼 그는 이번에 펴낸 첫 에세이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고, 베스트셀러도 됐으면 좋겠다. 책의 인세를 유소년야구 발전기금을 위한 박찬호장학재단의 후원금으로 쓸 예정이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에게 포기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욕심이 크다. 

“이 책을 통해서 의미 있는 일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제 절박함과 진실이 들어 있는 내용이라서 많이 읽혀졌으면 하고요. 많이 읽혀진다는 것은 확률이에요. 확률을 높여서 한 사람에게라도 제대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그가 출연해서 화제가 된 SBS <땡큐> 프로그램에서 그는 몰랐던 것을 많이 배웠다. 그중 하나가 우리나라에 자살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에게라도 희망을 전달하고 싶어졌다.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책을 읽고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면, 그것만큼 커다란 보람은 없을 거라고 했다. 

“기업 회장님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IMF 때 회사가 부도났는데, 제 야구를 보면서 힘을 내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고요. 그것만큼 보람된 일은 없을 것 같아요.”

90년대 후반 우리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줬던 국내 첫 메이저리거 박찬호. 그가 자전 에세이로 두 번째 희망의 직구를 날렸다. 최초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올라선 심정으로 박찬호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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