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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누리고 돌아간 신격호 명예회장

#창업1세대 #발로뛰는경영 #세여인의남자

2020-02-10 07:10

취재 : 장가현 기자  |  사진(제공) : 뉴시스, 롯데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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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한 99년이었다. 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떠나 지금의 롯데그룹을 일궜다. 사업은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집안은 편안하지 못했다. 세 명의 여인에게서 자식을 봤고 말년에는 두 아들의 경영권 싸움을 지켜봐야 했다. 99년간 치열한 삶을 살다 간 신격호 회장의 삶을 돌아봤다.
1세대 기업인이자 한국 서비스업의 아버지,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99세. 백수를 누리다 떠난 신 명예회장은 롯데를 일구는 데 한평생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을 살았다. 최고령 현역 경영인, 대한해협의 경영자, 유통거인 등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를 보면 고인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신 명예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이 쓴 저서 <나의 아버지 신격호>에는 신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뒷받침하는 말이 나온다. 신 명예회장은 “고객으로부터, 동료로부터, 협력회사로부터 직접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왕성한 경영활동을 펼치는 와중에도 롯데백화점, 롯데마트, 롯데호텔 등의 현장에 불쑥 나타나 현장 경영을 몸소 실천했다.
 

냉철한 오너이자 인정 넘치는 경상도 남자

신 명예회장은 성실함과 철저함, 집념이 있는 기업인이었다. 롯데호텔 34층 집무실에서 계열사 대표들에게 보고를 받을 때, 숫자를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자료를 뒤적거리면 불호령을 내렸다. 롯데호텔을 세울 때는 일본에서 들여온 각종 기자재와 의자 숫자를 일일이 파악할 정도였다. 서울의 랜드마크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1988년 ‘제2롯데월드사업’을 계획했지만 수차례 계획이 엎어졌다. 그럼에도 신 명예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2017년 결국 롯데월드타워를 세웠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고 말한다. 오전 8시쯤 일어나 9시에 호텔방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일을 할 때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칭찬에도 인색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어하는데 성격은 내성적인 편이었다고 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아버지는 결단코 자상한 분이 아니다”라고 했을 정도.

철두철미한 신 명예회장도 고향 사람들과 동포들을 향한 애정은 남달랐다. 댐 건설로 고향이 사라진 울산 둔기리 주민들을 위해 1971년부터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위로잔치를 열어줬다. 이 잔치는 43년이나 지속됐다. 디아스포라 재일동포 후원에도 앞장섰고 1994년 세운 롯데 장학재단과 복지재단을 통해 장학생을 지원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고향민들을 위한 롯데삼동복지재단을 세웠다.

신 명예회장이 83엔으로 사업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21년 울산 울주군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은 소설가가 되는 것.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도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일본에서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며 학비를 벌어 와세다 공업고등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신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성실하고 꼼꼼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시간이면 고객의 집 앞으로 물건을 배달했다. 이런 면이 입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밀려들 정도였다. 신 회장의 성실함에 감동한 일본인 사업가 하나미쓰가 사업자금으로 6만 엔을 빌려준다. 그 자금을 밑천으로 도쿄 인근에 윤활유 공장을 세웠지만, 미군의 폭격을 받아 가동도 못 해보고 공장이 불타버렸다. 6만 엔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빚이 됐다.

공장이 불에 탄 다음 해, 해방이 찾아왔다. 일본에 머물던 한국인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신 회장은 다시 사업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 돈으로 1946년 도쿄에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라는 공장을 세워 비누, 크림 등 생활용품을 만들어 팔았다. 공장을 세운 지 1년 만에 하나미쓰에게 6만 엔을 갚을 만큼 사업이 잘됐다. 1948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자본금 100만 엔, 종업원 10명을 둔 회사 ‘롯데’였다.

롯데라는 이름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샤를로테’에서 따왔다. 신 명예회장은 기업 이름을 롯데로 지은 것을 두고 “일생일대 최고의 수확이자 선택”이라 할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롯데의 시작은 풍선껌이다. 밥도 안 되는 걸로 성공할 수 있겠냐는 시선이 많았지만 롯데껌은 인기 간식으로 떠오르고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껌이 성공한 이후 초콜릿, 캔디류, 빙과류로 사업을 확장시켜가면서 롯데는 일본에서 식품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 롯데상사, 롯데부동산, 롯데물산 등 계열사를 확대해 일본 1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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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장례식 초례에 가족들이 참석해 절을 하고 있다.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신격호 회장 내외.

일본에서 세운 롯데, 한국에서 키워

일본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된 신 회장은 1965년 한일수교 후 고국으로 눈을 돌렸다. 양국 간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자 자본금 3000만원으로 롯데제과를 세웠다. 쥬시후레쉬, 스피아민트, 빠다코코낫 등 히트 상품을 만들어냈다. 또한 유통, 관광, 석유화학, 건설업에도 진출해 롯데를 성장시켰다.

이때부터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짝수 달에는 일본에서”라는 말처럼 양국을 오가며 일했다. 신격호 명예회장의 ‘셔틀경영’이다. 그는 월말이 되면 수행원 없이 홀로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양국을 오갔다.

1973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 소공동에 호텔롯데를 지었다. 1970년대 롯데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된 후였다. 이 사태로 껌 제조가 정지됐고 박 전 대통령이 신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호텔을 지어 경영하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전해진다. 신 회장은 호텔롯데 신관 34층에서 30여 년간 지낼 만큼 호텔에 애착을 보였다. 1977년 칠성한미음료와 삼강산업을 인수해 롯데칠성음료, 롯데삼강(현 롯데푸드)으로 사명을 바꿨고 1979년에는 소공동 호텔 옆에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를 세우고 유통업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롯데백화점이 문을 열 때는 서울시민 30만 명이 몰릴 만큼 호황이었다. 개점 100일 만에 입장객 수 1000만 명을 채웠다. 롯데건설의 전신인 평화건업사, 롯데케미칼의 전신인 호남석유화학, 한국후지필름, 롯데캐논, 대홍기획 등을 설립하며 그룹의 몸집을 불렸다.

2011년 롯데그룹 총괄회장직에 오른 다음 2015년에는 일본 롯데 지주회사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에서 명예회장으로 직함을 바꾸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2017년 롯데쇼핑, 롯데건설, 일본 롯데홀딩스, 롯데알미늄 이사에서 퇴임했다. 롯데그룹이 창업한 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이때 롯데는 경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지주사 체계로 전환했다. 2018년에는 한국 롯데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다각도로 사업을 확장시켰지만 그의 주된 업적은 한국에 서비스업을 뿌리 내리고 발전시킨 점이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 동탑산업훈장, 1995년 관광산업계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신 명예회장은 평소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갈수록 준다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찾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를 세워야 한다는 집념은 여기서 비롯됐다. 그는 1988년부터 ‘제2롯데월드사업’을 구상했지만 번번이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사업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2017년 롯데월드타워를 개장했다.

평생을 경영 일선에서 산 그는 안타까운 말년을 보냈다. 2016년에는 여동생 신정숙 씨가 신 명예회장의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다며 성년후견인 심판청구를 했고, 법원은 ‘사단법인 선’을 신 명예회장의 한정후견인으로 선정했다. 검찰이 롯데총수 일가를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했을 당시, 신 명예회장은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버지 입장에서 가장 한으로 남을 일은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경영권 분쟁, 일명 왕자의 난이다. 신 명예회장은 경영 현장에서 발로 뛰겠다는 신념 때문에 후계구도를 제때 세우지 못했다. 그 결과 2015년 불거진 두 아들의 경영 싸움을 지켜봐야 했다. 두 아들은 신 명예회장이 눈을 감는 날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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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고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 고향인 울산 둔기리에서 가족들과 찍은 사진.
왼쪽부터 시게미쓰 하쓰코, 신 명예회장, 신동주 회장 아들 정훈, 맏딸 신영자 롯데장학복지재단 이사장,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큰며느리 조은주 씨,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신동빈 회장 장녀 규미, 둘째 며느리 시게미쓰 마나미, 신동빈 회장 아들 유열, 차녀 승은.아래 고인의 구순연 때 모습. 왼쪽부터 맏며느리 조은주 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 신 명예회장,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둘째 며느리 시게미쓰 마나미 씨.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병간호는
‘조강지처’ 딸 ‘신영자 이사장’

신 명예회장의 복잡한 가족사는 유명하다. 그는 두 번의 결혼과 한 번의 사실혼으로 세 여인의 남자로 살았다.

신격호 명예회장의 유족은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아내 조은주 씨,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아내 시게미쓰 마나미 씨 그리고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와 딸 신유미 씨가 있다.
 

조강지처, 재혼한 일본인 아내, 가장 사랑한 ‘미스롯데’

19살 무렵 결혼한 고 노순화 여사는 신영자 이사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일본으로 떠난 뒤였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신영자 이사장은 고인의 아픈 손가락이라 평소에도 많이 아낀 것으로 알려졌다. 신 이사장은 할아버지 손에서 크다가 10살이 넘어서야 아버지와 대면했으며, 대학 졸업 후 호텔롯데에 입사해 아버지를 보필했다. 롯데백화점 설립 때부터 참여해 백화점을 키운 장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신동빈 회장이 그룹 경영을 맡은 후로는 롯데장학재단, 롯데삼동복지재단,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을 겸직하고 있다.

노 여사가 작고한 뒤 신 명예회장은 하쓰코 여사와 재혼해 슬하에 신동주 회장과 신동빈 회장 두 아들을 뒀다. 하쓰코 여사는 일본에서 명망 있는 집안 자제다. 외가에 부총리와 외무장관을 지낸 인사가 있다고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롯데가 하쓰코 덕분에 일본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 하쓰코 여사는 회사 경영과 동떨어져 있는 인물로 일본 롯데홀딩스 대주주인 광윤사의 지분을 상당 부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미스롯데’로 활동한 서미경 씨와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22살 때 유학을 간다며 돌연 연예계 은퇴를 선언한 서 씨는 24살 되던 해인 1983년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을 낳았다.

‘신 명예회장의 샤롯데’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서 씨는 고인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신 명예회장의 측근은 2016년 <여성조선>과 인터뷰에서 “곁에서 지켜보면 신 명예회장이 진정 사랑한 여자는 서미경 씨”라며 “서미경 씨 이야기를 할 때면 눈빛이 반짝거릴 정도로 달라진다”고 전했다.

롯데가 막내 신유미 고문은 중학교 때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한 신 고문은 일본인 남자와 결혼해 2015년 12월경 아이 엄마가 됐다.

신 명예회장은 서 씨 모녀를 상당히 아꼈다. 두 사람은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 6.8%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2019년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총수 일가가 보유한 롯데홀딩스 지분은 서 씨 모녀가 가장 많았고, 장녀 신영자 이사장이 3.0%를 보유하고 있었다. 장남 신동주 회장은 1.6%, 차남 신동빈 회장은 1.4%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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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하쓰코 여사, 신영자 이사장, 장남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 씨.

한·미·일 다양한 국적 롯데가 여인들

신 명예회장의 며느리들도 눈에 띈다. 맏며느리 조은주 씨는 미국 LA에서 미쓰비시 상사에 근무할 때 지인의 소개로 남편 신동주 회장을 만나 연애결혼 했다. 조 씨는 남편 내조에만 전념하다 ‘왕자의 난’이 있던 2018년 광윤사 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둘째 며느리 시게미쓰 마나미 씨는 일본 귀족인 화족 출신이다. 그와 신동빈 회장은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총리가 주선해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마나미 씨는 일본 굴지의 기업인 다이세이 건설 부회장, 고문을 지낸 오고 요시마사의 차녀다.

쟁쟁한 롯데가 여인 중 마지막까지 고인의 곁을 지킨 이는 누굴까. 신 명예회장의 네 자녀가 모두 고인의 임종을 지켰다고 알려져 있다. 노환이 심해져 아산병원에 입원한 고인을 자주 살폈던 것은 조강지처의 딸이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신 명예회장이 아산병원에 입원한 후 한정후견을 맡은 사단법인 선에서 기본적인 관리를 맡았다”며 “가족들 중에는 장녀인 신영자 이사장이 가장 자주 병원을 찾았다”고 전했다. 또한 “서미경 씨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병원을 자주 찾진 않았다”며 “아무래도 사모님(하쓰코 여사)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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