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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풍운아’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83년

#세계경영 #샐러리맨의신화

2020-01-07 10:11

취재 : 이근하 기자  |  사진(제공) : 조선일보DB,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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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금 500만원으로 시작한 ‘대우’를 재계 2위까지 끌어올린 ‘샐러리맨의 신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생을 마쳤다. 향년 83세. 그의 생엔 ‘세계를 무대로 사업한 선구자’라는 수식과 ‘분식회계와 경영비리를 저지른 경영인’이라는 낙인이 함께 따른다. 파란만장했던 김 전 회장의 삶을 정리해봤다.
“저를 믿고 뜻을 모아 세계무대로 함께 뛴 여러분의 노고에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뜻을 함께하며 한 몸처럼 활동했던 여러분은 언제나 대우의 주인공이다. 여러분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대우는 영원할 것이며 우리는 명예로울 것이다.”

지난 12월 12일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영결식에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그룹 설립 50주년 기념사 중 일부로, 그가 최고 경영인으로서 지녔을 소신을 가늠케 한다.

시간을 훨씬 거슬러 올라 1936년, 김 전 회장은 대구의 한 교육자 집안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안정적인 가정이었고 덕분에 그의 유년시절은 유복했다. 6·25전쟁을 기점으로 삶의 궤도가 달라지기 전까진. 아버지가 납북됐고 형이 군 입대를 하면서 가장의 역할은 그에게 주어졌다. 열네 살의 그는 신문팔이를 하며 어머니와 두 동생의 생계를 책임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시절의 힘듦을 회고하기보다 그때 익힌 ‘부지런함’과 ‘진취적 기상’에 감사함을 표하곤 했다.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그가 부모님을 추억하며 적어내린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부지런함은 아버님으로부터, 진취적 기상은 어머님으로부터 물려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두 분이 주신 어린 시절의 마음속 안정감이 있었기에 나는 훗날 조금 일찍 사회를 접하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천성도 있었겠으나 김 전 회장을 사업가로 이끈 덴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그는 자서전에서 “‘우중이는 커서 큰 장사꾼이 되는 것도 좋겠다’던 아버지의 조언이 마치 예언이라도 된 것처럼 결국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회상했다.
 

재계 2위 그룹을 만들기까지

아버지의 예단은 정확했다. 김 전 회장은 대학 졸업 후 6년간 무역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발판 삼아 1967년 대우실업을 세웠고, 창업 5년 만에 수출 100만 달러를 달성하며 사업가 면모를 여실히 발휘했다. 1973년에는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간판을 바꾼 뒤 대우실업과 합쳐 ㈜대우를 만들었다. 또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고, 대우전자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그룹의 주력으로 삼는 등 부실기업을 인수해 새로이 변신시키는 게 그의 경영 전략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에콰도르, 수단, 리비아 등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함으로써 해외사업의 기반을 다졌다. 그렇게 대우그룹은 대우실업에서 출발한 지 31년 만인 1998년 41개 계열사, 396개 해외 법인을 거느린 기업이 됐다. 그해 자산총액은 76조7000억원, 매출은 91조원. 현대에 이어 국내 재계 2위였다.

그러나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도 IMF 외환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공격적인 차입 경영 방식이 역풍을 맞았고, 대우차와 제너럴모터스 합작 추진이 무산되면서 유동성 위기가 찾아들었다. 구조조정 방안을 내놓기도 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40조원이 넘는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 대우그룹은 결국 1999년 공중분해 됐다. 김 전 회장은 검찰 수사를 피해 수년간에 걸친 해외 도피 생활 끝에 2006년 징역 8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복역 중 2008년 1월 특별 사면됐다. 그를 두고 ‘경영인 성공 신화’, ‘경제사범’ 등 정반대의 평가가 공존하는 이유다.

김 전 회장은 청년들과의 대화를 유난히 좋아했다. 청년들로부터 얻는 기운을 좋아했고,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있음을 벅차했다. 자서전을 출간한 것도 그래서다. 그 때문인지 사면 이후에도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청년 사업가를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젊은이들을 위해 책을 출간한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이 책은 내가 쓴 유일한 저서인데 이 개정판이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항상 가슴에 담아둔 것들을 보충해 넣었다.”

2년 전 출간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개정판 서문에 담긴 그의 목소리엔 청년 지원, 세계 경영에 대한 열정이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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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일이 먼저였던 남편, 아내에게 미안해”

김 전 회장의 사망 소식은 그의 가족 이야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과 장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그리고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이 그의 유가족이다. 김 전 회장은 슬하에 아들 세 명과 딸 한 명을 두고 있었는데, 장남 김선재 씨는 1990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김 전 회장은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자서전에 토로하기도 했다.

“큰아이는 유학 중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한창 바쁘던 때라 가슴 아플 사이도 없이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아니 아픔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달리려고 했다. 남은 아이들에게도 나는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늘 일이 먼저였다. (…) 늘 마음속엔 미안함이 가득한데 표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동안 나의 부족함을 아내가 대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해왔다.”

그의 말마따나 일이 우선인 아빠, 남편이었다. 정희자 여사가 2012년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을 받은 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시 태어나도 김 회장과 결혼하겠느냐는 질문에 “일밖에 모르는 그와는 결혼 안 할 거다. 다정다감한 사람과 살아봐야지”라며 답한 적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렇지만 성실한 아빠, 남편도 맞았다. 정희자 여사는 “친구 소개로 만났는데 열정에 반해 결혼했다. 최소한 굶기진 않을 것 같았다”며 김 전 회장의 성실함을 치켜세웠다. 장남인 김선협 부회장이 영결식에서 읽은 추모사에서도 아버지로서의 김 전 회장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바쁘시고 자주 옆에 계시진 않았지만 늘 자랑스러운 아버지셨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며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며 애틋함을 드러냈다.

김선협 부회장을 비롯해 김우중 전 회장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이어 기업가의 삶을 살고 있다. 먼저 김선협 부회장이 소속된 아도니스는 골프장과 레저시설을 운영하는 곳으로, 김 부회장은 아도니스 골프장뿐 아니라 경남 양산 에이원 골프장, 경남 거제 드비치 골프장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딸 김선정 대표는 국내외 미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어머니가 관장으로 있던 아트선재센터에서 일하며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적극적으로 소개했고,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12년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에 이어 2017년 광주비엔날레 대표를 맡는 등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영국 미술전문매체 <아트리뷰>가 꼽은 2013~2015년, 2017~2019년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에 오르기도 했다. 국내에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대중적으로 알린 데도 그의 영향이 컸다. 김 대표는 1990년대 초 ‘쌍용 스카티’ 광고에 직접 출연해 큐레이터를 소개한 바 있다.

막내 김선용 대표가 이끄는 벤티지홀딩스는 영화 <추격자>의 대성공으로 유명해진 투자사다. 최근엔 영화 배급 사업에도 뛰어들어 또 다른 성과 준비에 한창이다.

김우중 전 회장은 아버지가 그러했듯 자신도 좋은 기억 속 아버지로 남고 싶어 했다.

“훗날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강렬한 추억을 가지게 될지 궁금하다. 부족함이 많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나,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표현 그대로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 적었다” 할지언정 그 역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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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앞둔 정희자 전 관장 자서전, 그 내용은?

김우중 전 회장의 배우자, 정희자 여사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모’라 통하는 문화예술계 유명 인사다. 90년대 후반까지 힐튼호텔을 이끌며 ‘타이거 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을 만큼 여장부 면모로도 익히 알려져 있다.

그는 현대미술이 생소했던 1991년 경주에 국내 최초 사설 현대미술관 ‘아트선재미술관’을 세우고, <워홀과 바스키아>, <임멘도르프>, <알렉산더 칼더> 등 괄목할 만한 전시를 연이어 개최했다. 이후 1998년 서울에도 ‘아트선재센터’를 열어 현대미술을 전시하며 세계적 수준의 기획전과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특히 2012년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 수상은 국내 첫 여성 수상자라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수상 소감으로 “문화예술계를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 상을 받게 돼 뜻밖이다. 딸(김선정 부관장)이 잘하고 있어 난 그저 뒤에서 보고만 있었는데. 기쁘기보다 마음이 무겁다. 큰 부담이다. 젊은 사람들이 날 기억해줘 고마울 뿐”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호텔 경영인, 문화예술계 거목으로서 그의 일대기는 내년 2월 말 자서전을 통해 상세히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의 한 측근에 따르면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 호텔 경영을 시작한 계기, 힐튼호텔 경영방식 그리고 아내와 엄마로서의 이야기 등 삶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다고. 그러나 김 전 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출간 일정과 일부 내용에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인다. 해당 측근은 “집필이 90% 정도 완성된 상황이었는데 김 전 회장님의 사망으로 그와 관련한 소회가 추가될 것 같다”며 “본래 일정에 맞춰 (완성이) 안 될 것 같다”고 얘기했다.

정희자 여사는 남편을 잃은 슬픔이 상당히 큰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회장이 투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이후론 거의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을 만큼, 마지막까지 남편의 곁에서 함께했다고 한다.

먼저 떠난 장남 고 김선재 씨에 대한 소회를 들려줄지도 눈길을 끈다. 아들의 이름을 따 선재아트센터의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아들을 향한 마음이 각별한 그다. 우연히 TV를 보다 배우 이병헌이 아들과 꼭 닮아, 양자로 삼고 싶다는 의사를 먼저 전한 일화는 유명하다. 실제로 이병헌은 김 전 회장의 빈소를 찾아 고인을 애도하며, 이들 부부와 쌓은 20여 년의 인연을 확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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