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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

동화작가가 경험한 일상화된 성폭력의 그림자들

2018-02-28 13:53

글 : 김진 동화작가, 문학세계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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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열한 살 때였다. 학교 갔다가 돌아왔는데 엄마는 보이지 않았고, 뒷방 아저씨가 우리 집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우리 집은 뒤꼍 쪽으로 방이 두 개에 부엌이 딸려 있어 세를 주고 있었는데, 그 집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서 보기 드문 고학력자로, 명문대를 나왔다고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저씨는 직장이 없었고, 일을 하지 않았다. 그 아저씨의 아내와 중·고등학생 나이의 세 아들들이 학교도 다니지 않은 채 돈을 벌러 다녔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그 아저씨를 무척 존중해주는 분위기였다. ‘많이 배운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우리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이 그러하니, 어린 내 눈에는 좋은 인품을 가진 훌륭한 어른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저씨가 나를 보자 손짓을 하며 가까이 오라고 했다. 나는 아무런 경계심도 두려움도 없이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아저씨는 물어볼 게 있다면서 나의 손목을 잡고는 가까이 오라더니 나를 끌어당겼다. 반사적으로 손목을 틀어 빼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내 손목을 더 바짝 그러쥐고는 자기 몸 쪽으로 나를 휙 당겼다. 나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아저씨 몸 쪽으로 끌려갔다. 기분이 나빴다.

“아 아파요, 이거 놓고 말하세요.”

나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어른한테 말투가 그게 뭐냐며 다시 내 손목을 꽉 쥐고 끌어당겼다. 나는 또 휙 끌려갔다. 내가 손목을 비틀며 빼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 순간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이거 놔, 개새끼야!”

그 아저씨는 깜짝 놀라 내 손을 놓았다. 그때 난 재빠르게 도망쳤다. 심장이 터져라 뛰었다. 
 
 
#이십대

대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된 때였다. 친구들과 잔디밭에 앉아 있는데 남자 선배들 몇몇이 다가왔다. 자연스레 선배들과 우리는 잔디밭에 둘러앉게 되었다. 남자 선배 중 한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 입에서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란 듣기 민망할 정도의 음담패설이었다.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들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리벙벙한 우리를 보고는 남자 선배들이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리고는 친절하게도(?) 음담패설의 뜻을 설명까지 해주었다. 나와 친구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거나, 소심하게 같이 웃거나, 일부러 크게 웃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아무도 불쾌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삼십대

출근 시간이었다. 지하철은 예외 없이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역마다 꾸역꾸역 사람들이 올라탔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점점 웅크려 설 수밖에 없었고, 환승역에 다다르자 사람들로 인해 멀미가 날 정도로 복잡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또 밀고 들어왔다. 사람들이 밖으로 튕겨져 나갈 정도로 빽빽이 사람을 태우고 기차는 출발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보니 나는 족히 180㎝는 되는 젊은 남자의 등짝을 벽을 바라보듯이 서서 가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거려 틈을 확보하려고 할 때였다. 앞에 선 키 큰 남자가 팔을 슬그머니 들더니 팔꿈치로 내 젖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처음에는 좁아서 그러려니 몸을 틀려고 하자 이 남자가 나를 뒤로 밀어붙이면서 팔꿈치로 또 가슴을 눌렀다. 그제야 나는 화들짝 놀라 그 남자의 등짝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미친놈!”

때마침 정거장에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그 남자는 사람들을 밀치고 뛰쳐나갔다. 출근길이 바빴던 난 그 남자를 더 이상 뒤쫓지 못했다.
 
 
#사십대

늦은 시각 지하철을 탔다. 객실에는 남자 한 명이 스포츠신문을 읽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갑자기 그 남자가 신문을 들고 내 옆에 와 앉았다. 그러고는 신문을 펼쳐 들었다. 순간 등골이 싸해졌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뭐해 불편한 심정으로 가는데, 옆에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남자는 신문에 실린 비키니를 입은 모델 사진의 유방 부위를 문지르면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일어나 다른 칸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 남자가 곧장 일어나 나를 따라오더니 다시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쳐다보고 웃음을 흘렸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자칫 잘못하다간 범죄로 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려야 하나, 티를 내지 말고 버텨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무 역에서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튀어나갔다. 뒤따라올까 봐 숨이 턱에 차도록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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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이밖에도 지하철에서 당한 온갖 성추행과 폭력적인 일은 수도 없이 많다. 직장 동료 중 한 사람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어떤 남자가 자신의 코트에 사정을 해놓은 끔찍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당한 온갖 성추행과 폭력적인 일들 때문에 나는 지금도 지하철을 잘 타지 않는다. 특히 밤늦은 시각에 지하철은 타지 않는다.

직장 동료들과 회식 후 노래방에 갔다가 강제로 블루스를 추게 되었는데(도대체 싫다는 블루스를 왜 강제로 추자고 하는지) 소름끼치는 손길을 느껴야 했고, 좌석버스 옆자리에서 낯선 남자가 자위하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다양한 나도 “그만하길 다행이야”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니, 어린이나 여성들이 얼마나 많이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는지 짐작이 간다. 
 
 
#미투, 놀라운 폭로들

얼마 전 서지현 검사의 미투는 사실 나 같은 평범한 여성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검사라는 막강한 실력을 갖춘 여성조차 성추행에 노출되어 있다니, 경악스러웠다. 그러니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은 얼마나 더 충격스러울지 짐작이 될 정도였다.

친구들과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남자 선생들에게 당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땐 그게 성추행인지 몰랐다.”

그것이 우리의 공통된 말이었다. 선생이 슬쩍 겨드랑이 밑살을 집고 지나가는 일, 손으로 브래지어 끈을 훑는 일이 그저 기분 나쁜 일이었지만, 성추행이 범죄라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중에야 그것이 성추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사회 일반에 퍼져 있는 인식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설사 성추행이라고 인지했더라도 그걸 공론화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피해자가 오리려 ‘여자 행실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 누군들 그걸 용기 있게 입 밖에 내고 싶었을까.

지금이라도 미투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성은 가장 자유롭고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목적으로든 강압하는 것은 안 된다. 싫으면 싫다고 말할 권리를 뒤늦게 우리는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 속 성폭력
“오빠들의 구시대 질서와 이별해야 할 때”

이숙명(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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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TV를 틀어보라. 어딘가에선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여자들이 교복을 줄여 입고 나와 구애의 노래를 부르며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군무를 출 것이다. 여자를 애 취급하다 못해 숫제 턱받이를 하고 나오는 걸그룹까지 생겼다. 이러니 ‘Girls Can Do Anything’이라 적힌 폰 케이스를 쓴다는 이유로 여자 연예인을 생매장시키려 드는 남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걸그룹의 역할은 애교, 애교, 애교뿐이니까. 자, 이제 채널을 돌려보자. 다른 어딘가에선 이유 없이 참혹하게 아이와 여자들이 죽어나간다. 범행 묘사는 날이 갈수록 적나라하고 잔인해진다. 영화에서 시작된 ‘고문 포르노’가 방송으로 옮겨갔다. 여자가 죽어나가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전개가 막히면 등장해서 모든 사건을 한 방에 해결해버렸다는 기계의 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사내들이 여자를 두고 농담 좀 할 수 있지,
그만한 일로 남자 앞길 막으면 되겠어?”

사이코패스만 등장시키면 여자들의 줄초상이 가능하다. 사건 해결이나 복수는 남자의 몫이다. 어쩌다 수사팀에 여자가 있어도 남자 주인공한테 잔소리나 할 뿐이다. 됐다. 로맨스나 보자. 일일극 속에선 대화를 거부하는 여자를 거칠게 벽으로 밀치고, 손목을 잡아끌고, 강제로 키스하는 ‘실장님’들이 등장한다. 거부하던 여주인공은 끝내 그의 집요한 사랑에 무너진다. “여자는 좋아도 튕기는 존재니까 걔네가 노(No)라고 말하는 건 신경 쓰지 마, 강제로 밀치고 손목 잡는 정도가 무슨 폭력이냐, 좋아서 그런 건데…” 그런 인식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예능 프로에선 성범죄 혐의로 재판에 섰거나 인터넷 방송에서 여성, 장애인, 대형 재난 생존자들을 참담한 말로 짓밟던 개그맨들이 버젓이 출연해 여성 아이돌들을 앉혀놓고 외모 품평을 하며 낄낄거린다. “사내들이 여자를 두고 농담 좀 할 수 있지, 그만한 일로 남자 앞길 막으면 되겠어?”라는 방송국 윗사람들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머리가 아프다. 좀 건전한 프로그램, 그러니까 다큐멘터리나 교양 방송 같은 걸 틀어보자. 요즘 방송은 시사, 역사, 지리, 경제, 요리 안 가르치는 게 없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들은 죄다 남자다. 남자들은 남자들만 사랑하고, 남자들만 신뢰하고, 남자들한테서만 배우려 든다는 게 사실인 듯하다.

아무래도 TV에는 더 이상 볼 게 없는 것 같다. 책이나 읽자. 유명한 한국 문학들을 섭렵해볼까. 당신은 곧 몇 가지 공식을 발견할 것이다. 여자는 반드시 성녀 아니면 창녀다. 혹은 성녀이면서 창녀다. 모든 걸 희생하신 내 어머니, 몸 파는 누이와 아내, 어린 나를 성장시킨 이웃집 창녀, 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는 형수님이나 제수씨, 동네 형님들이 짓궂게(?) 굴던 첫사랑 누님, 전쟁이나 가난 때문에 남자들에게 짓밟히고 정신 나간 아낙네… 그리고 무기력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비애를 느끼는 불쌍한 ‘나.’ 성녀 혹은 창녀 학대 서사와 그걸 지켜보는 화자의 무기력함은 지난 한 세기 넘게 한국 소설의 고정 포맷이었다. 여기에도 내 얘기는 없는 것 같다. 영화나 보자. 아뿔사! 남자 검사, 남자 형사, 남자 정치인, 남자 소시민 가장이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면서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는 얘기 말고, 이유 없이 여자 괴롭히는 얘기 말고, 이유 없이 여자 벗기는 얘기 말고 뭐가 있을까. 거의 없다. 지난해 여성 원톱 상업영화라고는 구질구질한 모성애와 사랑을 빌미로 남성 악당들 흉내나 내는 <악녀>와 <미옥> 정도뿐이었다. 여자는 자식 일이면 이성이고 뭐고 없다는, 여성 숭배로 포장된 혐오의 다른 얼굴들이다.

연극은 차마 말도 하기 싫다. #00_내_성폭력 #MeToo 운동 덕에 알려진 연극계의 참상은 읽기조차 고통스럽다. 한 줌도 안 되는 대한민국 연극계 ‘네임드’라는 작자들이 자기만의 왕국을 꾸리고 여성 예술가를 학대한 사례들은 성범죄 심리분석 교본으로 써도 좋을 정도다. 스스로는 예술가입네 하면서 여성 창작자들의 씨를 말려 문화 다양성을 말살시키고, 산업 전체를 제 시대에 발목 잡아놓은 이런 자들이야말로 문화예술의 적이다. 어쩐지 이름짜한 한국 창작극들도 20세기 한국문학의 틀에서 못 벗어나고 있더라니, 이런 징그러운 원로들 때문이었다.

문제는 대중문화 속 여성 혐오가 많은 달콤하고 향긋한 것들과 뒤섞여 있기에 은연중에 받아먹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여성 혐오’라는 용어도 대중을 헷갈리게 만든다. 혐오라니, 뭔가를 아주 극렬하게 싫어한다는 뜻 아닌가. 아이돌이 애교 부리면서 춤추는 건 그게 예뻐 보이니까 그러는 거고, 우리는 그녀들을 사랑하니까 혐오가 아니지 않나? 걔네들도 원해서 하는 거잖아? 그걸로 돈 벌잖아? 실제로 여자들이 살인을 많이 당하는 건 사실이잖나? 얼마나 여자를 좋아하면 벽에 손목을 끌어서라도 갖고 싶겠어? 너네도 그런 거 좋아하잖아. 그거 다 여자 작가들이 쓴 거 아냐? 하다하다 프로그램에 여자가 없는데도 여성 혐오라네? 조금쯤 성차별일 수는 있지. 그런데 혐오는 아니지 않나? 말 좀 가려서 하라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행동과 선택 제약이 억압,
억압해도 되는 존재라는 인식이 혐오”

여자들 입장에서는 본인이 아직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행동과 선택을 제약받아야 하는 모든 상황이 억압이고, 억압해도 되는 존재라는 인식이 곧 혐오다. 대중문화 속 여성 혐오는 흔히 세 가지 형태로 표출된다. 증오, 숭배 그리고 배제다. 숭배와 배제는 증오와 결이 다른 것 같지만 이것들은 쉽게 한데 결합한다. ‘여성은 이러저러할 것’이라는 판타지는 여자들을 가두는 틀이 된다. 그 틀을 벗어나는 여자들에게 사람들은 쉽게 가혹해진다. 크게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스토킹과 이별 범죄부터 작게는 자기 어머니처럼 가정에 희생하지 않으려는 여자친구, ‘여자답지’ 않은 여자들에 대한 잔소리 등이 여성 숭배 문화에서 비롯된 억압이다. ‘배제’는 대개 미필적고의로 발생하지만 결과적으로 여성 혐오에 기여한다. 최근 영화 <1987>을 보고 일부 관객은 여자들이 어떻게 역사에서 지워졌나를 배웠다. 나는 “세상 모든 위대한 발명은 남자들이 하지 않았냐”는 말로 남성우월주의를 설파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헤디 라마르가 없었다면 아직도 유선전화나 쓰고 있을 원숭이 같은 놈들이 그런다. 여성의 업적을 이야기에서 배제하는 일은, 개별 작품에서는 문제가 안 될지 몰라도 그것이 누적되면 불균형한 운동장을 더욱 기울게 만든다. 물론 여자들의 창작물에서도 여성 혐오는 쉽게 발견된다. 왜 아니겠나. 남자와 여자는 대중문화라는 폭우에 함께 노출된 존재들이다. 여성을 혐오하는 문화는 남녀불문 모두를 억압자이자 피억압자로 만든다.
 

과거 질서와 다른 <82년생 김지영> <보건교사 안은영> 등장

#MeToo #00_내_성폭력 운동의 가장 큰 효과는 적어도 문화를 생산하는 위치에 있는 눈치 빠른 여자들만이라도 각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자들에게 제작, 투자 결정을 받을 필요도 없고, 저질 리뷰어도 드문 출판계가 가장 빨리 변화를 보였다. 한국 여자 보편의 삶을 담은 <82년생 김지영>, 여성도 극적 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보건교사 안은영> 같은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페미니즘 소설집이 나온다. 과거 ‘아버지’로 대변되는 부패 권력, 폭력적인 구시대 질서와 싸우며 성장한 한국 문학계가 이제 ‘오빠’ 죽이기에 나선 것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여자들을 대상화하고 길들이고, 가부장제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들고, 스스로 무언가 쟁취하기를 포기하게 만든 오빠들, 우리를 학대하며 고통받는 모습을 전시하던 오빠들, 아버지를 죽이고 우뚝 선 과거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며 어떤 게 얘기될 가치가 있고 어떤 게 무가치한지 결정하는 제2의 아버지가 돼버린 오빠들, 그 오빠들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 표제작에서, 주인공은 남자친구에게 의미심장한 편지를 쓴다. “벌써 십 년째, 그러니까 거의 제 인생 삼분의 일을 오빠와 함께 지내온 셈이니까요. 그런 오빠를 앞으로 영원히 못 본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이제 여기서 멈추려고 합니다.” 그렇다. 이제 오빠들이 만들어놓은 구시대 질서와 이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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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ㅛㅛㅅ  ( 2018-03-08 )  수정 삭제    답글 찬성 :0   반대 : 0
여자들힘약한거이용 무시하며 지하철성추행당하고 경찰불러도 되려 더 큰소리 빵빵치는사람남들도 있다.말못할고통속에 침묵해야하는여자들..이쁜여자좋아하지말기를..벌써부터 이제부터라도 소리를 막지않기를.. 지하철수사대와도 무슨일이냐고묻고 법적해결할꺼냐묻고 안한다하면 그럼방법없다면서 없는일로하라고함..남자는 되려소리빵빵지르고 당당하게 걸어나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