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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올림픽 눈물 섞인 감동 사연들

2018-02-26 13:28

취재 : 서재경 기자  |  사진(제공) : 조선DB,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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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덕분에 우리는 오랜만에 한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외쳤다.
그러나 선수들의 값진 승부사 뒤에는 못 다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 섞인 감동 스토리를 전한다.
# 스피드 스케이팅
‘빙속 여제’ 이상화(29)

0.39초 차이. 올림픽 3연패에 도전한 이상화 선수는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 경기에서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선수와 간발의 차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 이상화는 태극기를 흔들며 목 놓아 울었다. 아쉬움의 눈물이라기보다 지난 4년간의 압박과 부담감이 사라진 해방감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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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존경해”
이상화와 고다이라의 뜨거운 ‘워맨스’

이상화는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500m 경기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몇 년간 이상화에겐 적수가 없었다. 국제빙상연맹(ISU) 종목별 선수권대회가 열릴 때마다 자신이 세운 세계신기록을 자신이 갈아치웠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도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당연한 듯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상화를 이길 수 있는 선수는 이상화밖에 없어 보였다.

고다이라 나오의 급부상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고다이라는 밴쿠버 올림픽 500m에서 12위, 소치 올림픽 500m에서 5위에 머무는 등 지난 올림픽에선 이상화의 실력을 뛰어넘을 거라고 예상하기 어려운 기록을 지녔다. 절치부심한 고다이라는 자비로 네덜란드 유학길에 올랐다. 소치 올림픽 당시 이미 은퇴할 나이였음에도 그녀는 4년 뒤를 기약했다. 외양간을 개조한 것 같은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서 외로움과 싸우며 2년간 트레이닝을 받았다. 실력 상승의 원동력으로 손꼽히는 주법의 변화도 네덜란드에서 갈고닦은 것이다.
 
지난 2월 18일, 결전의 날이었다. 이상화와 고다이라는 두 사람의 주종목인 500m 경기에서 진검승부를 펼쳤다. 초반 레이스 기록은 이상화의 승리였다. 그러나 마지막 코너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렇게 고다이라는 32살의 나이에 평창에서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획득했다. 고다이라는 경기 직후 패배에 대한 아쉬움과 경기가 끝났다는 시원 섭섭함 등 복잡한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에게 다가가 “잘했어, 존경해”라고 말해 감동을 자아냈다.

“그 친구는 밴쿠버와 소치 때도 내가 경기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링크 밖에서 기다리곤 했다. 어제 내 몸이 저절로 고다이라에게 가더라.”

경기 다음 날 이어진 인터뷰에서 이상화는 경기가 끝난 뒤 고다이라와 나눈 포옹의 의미를 설명하며 고다이라와의 진한 우정을 과시했다. 이상화의 어머니 김인순 씨 역시 “고다이라가 고2 때 상화를 보러 한국에 놀러 왔을 만큼 두 사람은 옛날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그때 고다이라가 우리에게 낫토를 선물했고, 우리는 고다이라를 수원에 데려가 갈비를 사 먹였다”며 고다이라 선수를 “좋은 아이”로 기억했다.
 
이상화의 반응에 화답하듯 고다이라 역시 이상화와의 좋은 기억을 일본 언론에 공개했다. 일본 스포츠 전문 매체 <스포츠 나비>와 인터뷰에서 “이상화는 슬럼프 때 옆에서 자리를 지켜준 친구”라며 고마움을 표한 것. 메달을 떠나 오랜 기간 값진 우정을 나눈 두 사람의 사연이 한일 양국을 훈훈하게 달궜다.  
 
 
융자 받아 훈련시킨 부모님
동생에게 스케이트 양보한 오빠

이상화의 성공 뒤엔 가족들의 희생이 녹아 있었다. 이상화가 처음 스케이트를 시작한 것은 오빠 이상준 씨 덕분이었다. 먼저 스케이트를 시작한 오빠 뒤를 따라 7살 때 처음 쇼트트랙에 입문했다. 일취월장하는 이상화의 실력을 보고 이 씨는 ‘좀 하네’라는 생각을 했다고.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가세가 기울면서 부모님은 더 이상 남매를 동시에 지원해줄 수 없었다. 한 명은 스케이트를 벗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 씨는 동생에게 스케이트를 양보했다. 지난 2014년 소치 올림픽 당시 이상화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오빠는 좌절했을 것이다. 스케이트를 못 타니까. 그런데 티를 안 냈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자신을 위해 꿈을 포기한 오빠에 대한 고마움은 이상화가 빙상 위를 질주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녀는 밴쿠버 올림픽과 소치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을 모두 오빠에게 선물했다. 이 씨는 지난 2월 18일 경기 직후 이어진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금메달을 두 개나 땄다”며 “금메달이 집에 있는데 그래도 상화 거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경기 내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이상화’를 연호하던 오빠 이 씨는 자신이 흘린 눈물은 동생에 대한 고마움과 위로라고 전했다.

이상화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그녀의 부모님도 조명받고 있다. 어린 시절 이상화는 발에 맞지 않는 중고 스케이트화를 신고 훈련해야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다. 어머니 김인순 씨는 집 지하실에 옷 공장을 차리는 등 부업을 이어가야만 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융자를 받아 1년에 한 번씩 딸을 캐나다로 전지훈련을 보냈다. 1천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들었지만 자식의 미래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 이상화는 힘들어도 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세계를 놀라게 한 이상화 선수의 실력 뒤엔 가족이 있었다. 그녀는 올림픽 일정이 마무리되면 선수가 아닌 딸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자신이 처음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밴쿠버로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스켈레톤
‘아이언맨’ 윤성빈(24)

설날 당일, 스켈레톤 선수 윤성빈은 대한민국에 큰 선물을 안겼다. 사상 첫 썰매 종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죽을 만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레이스를 마치고 윤성빈은 자신을 응원해준 팬들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썰매를 탄 지 6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신예는 자신이 탄 썰매만큼이나 무서운 속도로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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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 선수 母 배구 선수 父
재능 물려받은 ‘운동천재’의 탄생

지난 2월 15일, 평창군 올림픽 슬라이딩 센터는 응원 열기로 뜨거웠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도 현장을 찾아 응원 대열에 합류했다. 우리나라에선 다소 생소한 종목인 ‘스켈레톤’의 윤성빈 선수가 금메달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윤성빈은 이날 1~4차 레이스 합계 3분20초55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금메달은 당연히 그의 몫이 됐다.

윤성빈의 이력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썰매를 시작한 지 6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윤성빈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스켈레톤에 입문했다. 운동을 곧잘 하긴 했지만 평범한 인문계 학생이었다. 그런 윤성빈을 스켈레톤의 세계로 불러들인 것은 당시 그가 다니던 신림고등학교의 체육 교사인 김영태 씨다. 탁구 선수 어머니와 배구 선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탁월한 운동감각을 지닌 윤성빈을 알아본 것. 김 씨는 대한민국 썰매 종목 개척자인 강광배 한국체육대학교 교수에게 윤 선수를 추천한다.

이후 윤성빈은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스켈레톤 입문 3개월 만에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고, 2014~15 시즌 월드컵 2차 대회부터 3위를 차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올림픽을 앞두고 10년간 스켈레톤 황제로 군림해온 라트비아의 마르틴스 두쿠르스 선수마저 꺾고 랭킹 1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평창 동계올림픽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해외 전지훈련 떠난 윤성빈,
새벽에 울며 어머니에게 전화한 이유

“죽을 만큼 무서웠고 고민할 것도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스포츠라고 생각했다.”

윤성빈은 2012년 북아메리카컵 1차 대회로 스켈레톤 공식 대회에 데뷔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죽을 만큼 무서웠다”고 표현했다. 맨몸으로 머리를 정면으로 향하고 엎드린 자세로 썰매에 탄 뒤 평균시속 140㎞, 최고시속 154㎞로 트랙을 질주하는 스포츠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터.

시합이 끝나고 윤성빈은 어머니 조영희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저히 썰매를 계속 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에 조 씨는 “한 번만 더 생각해보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엄마는 네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현명한 조언에 용기를 얻은 윤성빈은 다시 썰매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주변에서 ‘너무 늦게 시작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들의 결정을 100% 믿고 지지해주고 싶었다. 그게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라고 생각했다.” 올림픽 기간 내내 수많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진 윤 씨는 아들이 스켈레톤 왕좌를 차지한 뒤에야 비로소 취재진을 만나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표현했다.
 
 
“얼른 할머니 뵈러 가야 해”
아버지 대신이던 할머니에 대한 효심

짧은 시간에 쟁취한 성과지만 분명 쉽게 이룬 성과는 아니었다. 보통 훈련량의 2배가 넘는 8차례 주행 훈련을 거쳤고, 추진력을 얻기 위해 몸무게를 75㎏에서 90㎏까지 늘렸다 뺐다 하며 적정 몸무게를 고민했다. 86㎏이 최적의 몸무게라는 판단이 나오자 하루 8끼를 먹으며 체격을 유지했다.

어렵게 딴 금메달이니만큼 관중의 환호와 축하 세례를 조금 더 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성빈은 경기가 끝난 직후 취재진과 짧은 인터뷰를 끝으로 경기장을 떠났다.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를 빨리 뵈러 가야 할 것 같다”는 것이 그가 열렬한 함성을 뒤로한 채 걸음을 재촉한 이유였다.

배구 선수였던 아버지는 윤성빈이 어렸을 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어머니와 떨어져 경남 남해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없었던 윤성빈에게 할머니는 부모 같은 존재였을 것. 이날, 휠체어를 타고 불편한 몸으로 손자의 경기를 지켜본 윤성빈의 할머니 하순엽 씨는 금메달 소식에 “손자 키운 보람이 있다”며 웃었다. 
 
 
 
# 쇼트트랙
‘오뚝이’ 임효준(22)

첫 금메달 소식에 대한민국이 들썩였다. 쇼트트랙 남자 1500m 경기에서 임효준 선수는 네덜란드 싱키 크네흐트 선수에 앞서 1위로 골인했다. 올림픽 신기록까지 달성했다. 곱상한 얼굴에 훌륭한 실력까지 얼핏 모든 걸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임효준의 별명은 ‘오뚝이’다. 일곱 번 넘어졌는데 여덟 번 일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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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차례 대수술… 
‘불운의 아이콘’에서 ‘금메달리스트’로

지난 2월 10일,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쇼트트랙 남자 1500m 경기가 끝난 직후였다. 지난 4년간, 남자 쇼트트랙은 소치 올림픽 ‘무관왕’이라는 불명예를 짊어지고 있었다. 올림픽 효자 종목으로 손꼽히던 쇼트트랙이 지난 올림픽에서 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하자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다. 대한빙상연맹과의 파벌 갈등 탓에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안현수)’의 3관왕 소식도 국민이 등을 돌리는 데 한몫했다.

임효준의 활약으로 쇼트트랙은 그간 부진을 씻고 ‘돌아온 효자’가 됐다. 그러나 그가 다시 효자 노릇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빙상부에 들어간 임효준은 4학년 때부터 고학년 형들을 제치고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실력만큼 운이 따라주질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오른쪽 정강이뼈가 부러진 것. 1년 반 동안 스케이트를 신을 수 없을 만큼 큰 부상이었다. 운동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을 믿어준 코치와 함께 재기를 노렸다. 2012년 인스브루크 동계 유스올림픽에 나가 1000m 금메달과 500m 은메달을 따냈다. 그러나 회복과 함께 또 다른 부상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땐 오른쪽 발목이 부러져 수술대에 올랐다. 6개월 만에 복귀하자 뒤이어 오른쪽 인대가 끊어졌고, 허리와 손목 골절도 입었다. 대수술을 일곱 차례나 거치며 임효주는 ‘쇼트트랙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부상을 입은 허리는 지금도 비가 올 때마다 쑤신다고.

다시 일어났다. 지난해 4월, 국제대회에서 금메달 따기보다 어렵다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1위로 통과하며 임효준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국가대표로 선발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1차 대회에서 허리를 다친 것이다. 메달은 획득했지만 올림픽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부상은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또 한 번 ‘오뚝이’ 정신을 발휘했다. 당시 임효준은 “올림픽을 위해 지금까지 버텼다”며 “반드시 올림픽 무대에 서겠다”고 집념을 활활 태웠다.
 
“아직 올림픽이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죽기 살기로 하겠다.”
1500m에서 메달을 땄지만, 임효준은 남은 경기에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과연 ‘오뚝이’다웠다.
 

수영 꿈나무, 고막 터져
스케이트 신게 된 사연

천생 쇼트트랙 선수일 것 같은 임효준에겐 사실 숨겨진 과거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수영 선수로 활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고로 고막이 터져 더 이상 수영을 할 수 없게 됐고, 수술을 받은 뒤 쇼트트랙으로 전향했다.

운동신경이 출중한 편이라 금세 쇼트트랙 유망주로 떠올랐지만 그때 후유증으로 지금도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겪은 큰 시련은 임 선수가 훗날 겪은 무수한 불운을 덤덤히 넘길 수 있는 원천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안현수를 보고 국가대표의 꿈을 키웠다. 존경한다.”

임효준은 인터뷰에서 줄곧 자신의 롤 모델로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를 꼽았다. 이번 평창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려 했던 안현수는 출전 직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도핑 관련 출전 금지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대해 임효준은 “안타깝고 속상하다”며 아쉬운 마음을 전했다. 자신에게 영웅과도 같은 안현수와 한무대에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효준은 여전히 밝고 씩씩하다. “나도 후배들에게 안현수 같은 선배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그의 바람이 부디 이뤄지길 바란다.
 
 
 
# 스피드 스케이팅
‘동생 바보’ 노선영(29)

14위의 기록. 4회 연속 올림픽에 출전한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노선영의 최고 성적이다. 지난 소치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계획했던 노선영이 평창 올림픽을 찾은 이유는 오직 하나, ‘동생’ 때문이다. 2년 전 암투병으로 세상을 떠난 쇼트트랙 국가대표 노진규에게 빙판 위를 질주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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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안현수’로 불리던
동생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노선영의 동생 故노진규는 한국 쇼트트랙의 기대주였다. 2010년 국제빙상연맹(ISU)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뒤 줄곧 훌륭한 성적을 거뒀다. 2011~2012 시즌 월드컵 대회에선 1500m 6연패 대기록도 달성했다. 그가 ‘제2의 안현수’로 불린 이유였다.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으로만 예상했다. 누구도 노진규에게 ‘골육종’이라는 비극이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2014년 1월, 그는 뼈암의 일종인 골육종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소치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팔꿈치 부상을 당했고 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병이 발견된 것이다. 10~20대 남성의 무릎이나 팔 등에 종종 발병한다는 골육종은 100만 명 가운데 15명 정도에게만 발병한다는 희귀 질환이다. 결국 노진규는 투병 끝에 24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마감하고 말았다. 재작년의 일이었다.

“동생이란 이유도 컸다.”

노선영이 평창 올림픽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이유를 묻자 내놓은 답이다. 세 살 아래 동생 노진규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을 따라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먼저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 누나를 보며 올림픽의 꿈을 키운 동생이었다. 노선영은 그런 노진규와 함께 4년 전 열린 소치 올림픽에 함께 출전할 예정이었지만 동생의 갑작스러운 암 선고 탓에 그럴 수 없었다. 4년 뒤 평창, 동생은 이제 곁에 없지만 혼자서라도 올림픽을 찾았다. “평창 올림픽에 함께 출전하자”던 동생의 생전 소원을 이뤄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12일 여자 1500m 경기에 출전해 최종 14위를 기록한 노선영은 환하게 웃었다. “동생이 봤다면 만족했을 것”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기록과 상관없이 동생과의 약속을 지킨 노선영의 질주는 많은 이들을 감동케 했다.
 
 
빙상연맹 실수로
한 달 전 경기 출전 무산될 뻔

사실 노선영은 이번 평창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할 뻔했다. 대한빙상연맹의 행정 실수로 올림픽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출전불가 통보를 받은 것이다. 빙상연맹은 사과 한마디 없이 노 선수를 선수촌에서 퇴촌시키려고까지 했다. 당시 노선영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더 이상 국가 대표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 않고 국가를 위해 뛰고 싶지도 않다. 빙상연맹이 우리 가족의 마지막 희망마저 빼앗았다”라는 글을 남기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하늘에 있는 동생이 안타까운 사정을 도운 걸까. 빙상연맹 사건이 발생한 지 1주일 정도 후에 국제빙상연맹(ISU)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도핑 파문으로 러시아 선수들의 출전이 금지되면서 엔트리에 자리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예비순위 2위이던 노선영에게 기회가 왔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평창행 티켓을 얻을 수 있었다. 출전이 확정되고, 노선영의 첫마디는 “하늘에 있는 동생 노진규를 위해 뛰겠다”였다.
 
 
‘팀추월’ 왕따설?
끝나지 않는 우여곡절
 
어렵게 출전하게 된 평창이었지만 노선영의 우여곡절은 계속됐다. 지난 2월 19일 열린 여자 팀추월 경기가 시발점이 됐다. 김보름, 박지우 선수와 함께 준준결승전에 출전한 노선영은 두 선수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한참을 뒤처져서 결승선을 통과했다. 가장 늦게 통과하는 선수의 기록으로 순위를 판가름하는 팀추월의 특성을 따졌을 때 상식적인 경기 방식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론 뒤처지는 선수를 챙겨 함께 결승선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난 후 진행된 김보름과 박지우의 인터뷰는 논란에 더욱 불을 지폈다. 김보름은 경기 후 소감을 묻는 취재진에게 “팀추월은 선두가 아닌 마지막 선수의 기록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안 좋은 기록이 나왔다”며 “(노선영과) 같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면서 연습을 많이 했다. 잘 타고 있었지만 마지막에 저희와 격차가 조금 벌어져 기록이 아쉽게 나온 것 같다”는 답을 내놨다. 경기 성적이 좋지 못한 것을 노선영의 탓으로 돌리는 듯한 뉘앙스에 누리꾼들은 ‘노선영 왕따설’을 제기했고, 김보름과 박지우를 향한 여론은 악화됐다. 다음 날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의 백철기 감독과 김보름은 사태 수습을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백 감독은 “감독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죄송하다”고 입을 뗐다. 그는 이어 “(오히려) 노선영의 의사를 존중해 전략을 짰다”고 했다. 왕따설에 대해서도 강하게 부인했다. 김보름은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에 눈물을 보이며 “많이 반성하고 있다. 선두로 달리며 다른 선수를 챙기지 못한 내 잘못이다”라는 답을 내놨다. 노선영 선수는 감기 몸살을 이유로 기자회견에 불참했다. 선수의 이름을 걸고 마지막으로 출전하는 올림픽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것으로 기대됐으나 순탄치 않았다.  
 
 

 
평창을 울린 두 글자, ‘엄마’
돌아가신 어머니 기린 최다빈과 잃어버린 어머니 찾는 이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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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올림픽에서는 유독 어머니와 관련된 선수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쏟아져 국민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첫 번째 사연의 주인공은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선수 최다빈이다. ‘김연아 키즈’로 불릴 정도로 한국 피겨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최 선수의 어머니는 지난해 6월,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최다빈은 한동안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했고, 부상까지 겹쳐 선수 생활 최대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지난 2월 11일 단체전(팀 이벤트)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실수 없이 완벽한 연기로 개인 최고 기록인 65.73점의 기록을 세웠다. 경기 후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동안 많이 믿고 의지하던 엄마가 생각난다”며 눈물을 보였다. 2007년 김연아가 내놓은 장학금의 수혜자로 알려진 최다빈은 21일 또 한 번의 기록을 위해 쇼트 프로그램에 출격한다.

여자 프리스타일 스키 한국 국대대표 이미현에게도 특별한 사연이 있다. 그녀는 이번 올림픽을 통해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찾고 싶단다. 1994년 10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한 살 때 미국으로 입양됐다. 3살 때 아버지에게 스키를 배웠다. 스키라는 평생의 동반자를 찾았지만, 낳아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설원의 서커스’라 불릴 정도로 다양한 곡예를 선보이는 슬로프 스타일 종목으로 경기에 출전한 이미현은 한때 부상으로 스키 선수의 꿈을 접어야 했다. 4년 전 우연히 한국 땅을 밟았고, 대한스키협회의 눈에 띄어 평창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었다. 이번 대회에서는 아쉽게도 예선 탈락했지만 이미현은 아쉬움보다 기대감이 크다. 올림픽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부모님을 찾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나중에 왜 찾지 않았을까 후회할 것 같습니다.” 엄마를 애타게 찾고 있는 이미현이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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